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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나 어릴 적에도 구례엔 산수유가 천지였지. 봄이면 마을이 온통 노란 산수유 꽃으로 가득하곤 했었는데·"

 

지금도 3월이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산수유 꽃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아름다운 마을, 전남 구례. 봄이면 황금빛 산수유가 만발하는 동네 산동면이 홍판순 할머니의 고향이다. 그러나 할머니 기억 속 고향은 산수유의 노란빛이 아닌 붉은 핏빛이다. 

 

"내 나이 여덟 살에 일본 탄광으로 징용을 가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 사망통지가 오고 이내 유골이 도착했는데 믿어지지가 않더라구."

 

이듬해 해방이 되었지만 세 아이들과 함께 남겨진 어머니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초라했다. 남겨진 세 아이를 굶기지 않기 위해 길쌈, 논일, 밭일을 쉬지 않던 어머니. 일 밖에 모르는 시골 촌부였던 어머니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지서로 잡혀 들어가게 된 것은 열 세 살 되던 해였다.

 

"우리 동네는 6.25 나기 전에 빨갱이 난리가 났어. 한번은 반란군이 들어오고, 한번은 국군이 들어오고 반란군이 총을 쏘면, 국군이 총을 쏘고... 그러는 중에 동네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갔는지. 국군이 들어와 어머니에게 빨갱이라고 욕을 하며 우리 눈앞에서 끌고 가는데 울 어매 살려달라고 얼마나 매달리며 울었던가 몰라."

 

1948년 일어난 여순사건 이후 구례는 이데올로기의 격전지가 되어 버린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과 좌익간부들이 토벌대를 피해 지리산으로 잠입이 용이한 구례로 퇴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군은 국군토벌대에 밀려 지리산으로 숨어들었지만 빨치산이 된 반란군과 토벌대의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된다.

 

"반란군이 국군을 피해 산으로 달아나니까 이번엔 토벌대가 횃불을 들고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놓는 거야. 그때 마을 전체가 다 타버렸지."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주민들이 빨갱이 짓을 했다는 이유로 지서에 붙잡혀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빨갱이 색출한다고 젊은 사람은 거의 데려다 죽였어. 동네에 남은 사람들이라고는 어린애들과 노인뿐이었지."

 

어머니가 통비분자 혐의를 쓰고 지서에 잡혀가고 난 후 어린 두 동생을 책임져야 할 소녀가장이 되어버린 할머니.

 

 

"빨갱이 자식들이라고 아무도 우릴 받아 주지 않았어. 우릴 받아주었다가 빨갱이 새끼 도와줬다고 누명 쓸까봐 그랬지. 어린 동생들하고 헛간에라도 하룻밤 묵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오히려 빨갱이 자식들이라면서 냉대를 하고 혀를 끌끌 차더라구."

 

누구도 받아 주지 않아 오갈데가 없어진 할머니는 어린동생들을 데리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밤길을 맨발로 걸어서 산을 넘는다. 산 너머 이모네 집이라도 찾아 가야 했던 것이다. 동짓달 추운 밤 열세 살 어린 소녀가 열 살, 일곱 살 동생의 손을 잡고 산길을 걷는 장면에서 문득 <산동애가>가 떠 올랐다.

 

구례 산동에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가 있다. 할머니가 동생들 손을 잡고 산을 넘던 그 시기에 지어진 노래 <산동애가>다.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진압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짐작한 열아홉 소녀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불렀다는 노래. 할머니에게 <산동애가>를 아시느냐고 하니 부르는 걸 들어는 보았지만 워낙 노래를 못해 불러 들려 줄 수는 없다고 하신다.  

 

<산동애가>

 

잘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 못한 채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며절며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정도 좋아

열 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갈 길마다 눈물 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다행히도 이모는 고아나 나름 없어진 세 조카를 내치지 않았다. 어머니 소식을 모른 채 이모네 집에서 산 게 두 달 여. 어느 날 저녁 낯 익은 얼굴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생사를 몰랐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돌아왔지만 살던 동네로는 갈 수 없었어. 빨갱이라고 쫓겨 났거든. 그래서 이모네 동네 근처에 방을 하나 구해서 어머니와 네 식구 살림을 시작했지."

 

어머니는 돌아왔지만 구례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지리산으로 숨어든 반란군과 토벌군의 전투가 쉽게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열네살 되던 해 우리 어머니가 날 시집보냈어. 어머니 앞으로 편지 한통이 왔는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어머니는 당신이 빨갱이 짓 했다고 잡아다 죽이겠다는 통지라면서 엄마 죽기 전에 혼사를 치러야 한다고 열네살 많은 이웃집 머슴 장쇠와 맺어주신 거야." 

 

나중에 글을 아는 사람을 통해 읽어보니 빨갱이와는 아무 관계없는 공출관련 서류였지만 한번 말을 내 놓은 혼사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지리산 빨치산이 되어버린 반란군과 그들을 소탕하러 온 국군의 밀고 밀리는 전투장이 되어버린 마을. 수시로 마을을 점령하는 쪽이 바뀌다보니 그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 피해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은 국군이나, 인민군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좌익이나, 우익으로 몰려 당해야 했던 해코지였다. 

 

"열여섯에 첫 아이를 임신했는데 8개월 만에 유산되고 말았어. 어느 날 밤, 산에서 군인 행색을 한 사람이 내려와 총을 들이대면서 밥을 달라는 거야. 행색을 보니 딱 인민군 같더라구. 머리카락이랑 눈썹이 불에 그슬려 있고 군복이라고 생긴 것이 누런 게 여기 저기 불티구멍이 뻥뻥 나 있고 말이야. 너무 무서워서 밥을 차려주고 숨어버렸잖아."

 

당시는 전투상황에 따라 인민군들이 산으로 숨는가 하면 어느 날은 인민군에 쫓기던 국군들도 산에 숨어들던 상황이라 산에서 내려온 군인이 인민군인지 국군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때였다. 구분을 하더라도 총을 들이대며 밥을 달라고 하는 군인들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주민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그 군인이 우리 집을 다시 찾아왔어. 나보고 인민군새끼들은 밥도 잘 해먹이면서 국군이 밥을 달라니까 밥 주고 가서 숨느냐고... 마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때리고, 욕을 하더니 등에 총을 대고 죽인다고 호통을 치는 거야. 벌벌 떨고 있는데 총소리가 귓가에서 "쾅"하고 들려. 어찌나 놀랐던지 그 밤에 배가 틀고 아프더니 그만 사산을 해 버린 거야."     

 

좌익 세상이 되었다, 우익 세상이 되었다 수시로 뒤집어지는 세상. 그런 와중에서 한국동란이 터지고 남편은 인민군에 강제 부역을 하게 된다. 또 다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세상에서 단지 눈앞의 죽음이 두려워서 부역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훗날 남편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폐인이 되고 만다. 남편의 혐의는 지리산 빨치산을 돕고 내통했다는 것이었다.

 

"빨치산들에게 뭘 갖다 줬냐? 거기서 뭐 했냐? 빨치산 숨은 데가 어디냐? 그러면서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고, 때리고, 불로 지지고 별짓을 다하니까 고문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한 거야. 그러니 바로 본서로 넘겨져서 처형될 판이었는데 우연찮게 아는 분을 만나 억울함이 풀리고 대신 몇 달 징역을 살고 나오게 됐지."   

 

빨갱이로 잡혀간 어머니 때문에 두 동생과 소녀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할머니는 역시 빨갱이 혐의로 잡혀간 남편 때문에 이후로 쭉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일도 잘하고, 힘도 좋았던 남편이 잡혀갔다 돌아 온 후로는 그냥 폐인이 되어버리더라구. 어디가 망가졌는지 힘도 쓰지 못하고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일에는 관심도 없고. 매일 술만 마시고…사람이 아주 망가진 거야."

 

고문후유증으로 돈벌이와는 아주 멀어져버린 남편 대신 일곱식구의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가르치지도 못했다.

 

"큰 딸은 가난이 지긋지긋하다고 열여섯에 집을 나가 식모살이를 하다 열여덟에 우시장 소장수하고 결혼을 했어. 큰 아들은 초등학교 간신히 졸업시켜서 남의 집 머슴살이 보내고…둘째도 중학교 밖에 못 마치고 공장, 막내아들도 중학교 간신히 졸업하고 공장. 워낙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보니 힘든 일해도 돈이 모이지 않고.지금까지 지들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은데 가르치지도 못한 어미 입장에 보태달랄 수도 없고."

 

가난한 가운데 낳은 아이들. 배불리 먹이지도, 잘 가르치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남의 집 머슴살이, 식모살이를 보낼 수밖에 없었기에 늘 가슴이 아픈 할머니. 자식들 가난마저 엄마에게서 대물림 된 것 같아 늘 미안하고 안쓰럽기만 하다. 5만 원 정도의 가스비도 낼 수 없어 냉방에서 잠을 청하는 처지이지만 이 겨울 자식들이 더 추운 환경에 지내는 건 아닌지 오히려 걱정을 하신다.

 

"자식 형편을 아는데 어떻게 손을 벌려. 아직은 일 할 수 있어서 공공근로라도 나가 벌고 싶은데 호적에 자식이 있다고 그것도 나한테는 순서가 잘 오지 않아. 버는 건 없고 쓰기만하니 그게 걱정이지 뭐."

 

홍판순 할머니는?
서대문구 북가좌동 250/20만원 월세거주. 자녀들이 있지만 모두 형편이 어려워 도움이 되지 못하고 호적상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생활보조금을 지원 받지 못하고 있음. 부정기적인 공공근로를 통해 15만원에서 2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으나 일 년에 서너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 난방비 부담 때문에 난방은 전혀 하지 않고 정 추울 땐 전기장판에 의지해 잠을 주무신다고.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후원은 사회복지법인 우양으로 부탁드립니다.


태그:#홍판순할머니, #독거노인,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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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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