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이 7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이번 주에 막을 내린다. 이제 남은 이야기는 '비담의 난' 하나뿐이다.
'여왕은 무능하다'는 당태종의 논리를 흉내 내며 비담이 배반의 칼날을 높이 쳐들자 김춘추·김유신이 그 칼날을 내리치고 이 와중에 병약한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등극한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실린 비담의 난의 줄거리다.
서기 647년 비담의 난은 선덕·진덕 교체기에 발생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시간적' 함의를 갖는 사건이지만, 유라시아 대륙 곳곳의 여러 공간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일으킨 결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간적' 함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공간적 함의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정변은 유라시아대륙 중앙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민족들 간의 상호작용이 일으킨 '나비의 날갯짓'이 유라시아대륙 최동단에 있는 신라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소위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유라시아대륙 중앙에서 발생한 사건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연쇄적 인과관계를 일으키며 유라시아대륙 최동단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유라시아대륙이 공간과 시간의 측면에서 긴밀한 상호작용 즉 인과관계의 연쇄 속에서 작동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과관계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지구상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의 인과관계를 무한정 확대해서 과거로 한참 소급하다 보면, 결국에는 아담과 이브가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비담의 난이 있기까지의 모든 사건들을 인과관계로 연결하다 보면, 결국에는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비담의 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하여 형법학에서는 법률적 책임을 지우는 인과관계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한정하고 있다. 예컨대, "100년 전에 사망한 A는 우리 역사에 중대 과오를 범했다"는 내용이 담긴 B의 저서를 읽은 독자 C가 격분하여 A의 자손인 D를 폭행했을 경우에, 자연과학적으로 따지자면 B의 집필이 C의 폭행에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형법에서는 B의 집필과 C의 폭행 사이의 인과관계를 원칙상 인정하지 않고 C에 대해서만 법적 책임을 묻는다.
비담의 난을 가져온 7단계 인과관계마찬가지로, 비담의 난과 관련하여서도 인과관계의 범주를 그처럼 합리적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서 비담의 난 이전의 사건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로부터 6년 전인 641년부터 유라시아대륙 차원에서 발생한 7단계의 사실관계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비담의 난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제1단계] 당태종의 중화주의제1단계는 당태종의 동방정책의 개시(641년). 중국이 분열 양상을 보인 5호 16국 및 남북조 시대(4~6세기)만 해도, 중국 왕조들은 외부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에게 무리한 복속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면서부터 상황이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철철 넘친 당나라가 이웃나라들을 도호부(都護府)라는 자국의 행정체계 안에 편입시키려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것은 미국이 소위 불량국가 혹은 악의 축들을 상대로 "너희는 미국의 한 주(州)가 되어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신개념의 중화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인물이 바로 당태종이었다.
그처럼 오만한 중화주의가 국제사회의 환영을 받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무력으로 국제사회의 반발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강대국들이 밀집한 중앙아시아 쪽과 동북아시아 쪽을 동시에 상대해서 당나라가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양쪽을 상대로 윈-윈(2개 지역에서의 동시 승리)을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한 당태종은 630~641년 기간에 돌궐·토욕혼·고창국을 격파하고 토번(티베트)과 화친을 맺음으로써 중앙아시아 쪽을 자기편으로 만든 다음인 641년부터 동북아시아 쪽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쪽에서 한숨을 돌린 당나라가 동북아시아 쪽에 전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라 당태종이 의욕적으로 동방정책을 개시함에 따라 641년부터 한반도 및 요동(만주)의 정치질서가 급격히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동북아시아 정치질서의 급변이 아래와 같은 인과관계를 거쳐 신라 정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제2단계] 백제·고구려 강경파 정권 출현제2단계는 백제·고구려의 반작용. 당태종의 동방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백제·고구려에서는 강경파 정권들이 출현했다. 641년과 642년에 각각 등장한 의자왕 및 연개소문 정권은 당나라의 세계전략에 맞서 정면 도전의 의사를 표명한 정권들이었다.
이렇게 새로 등장한 두 정권은 대당(對唐) 투쟁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당나라의 우방인 신라를 한층 더 압박하고 나섰다. 642년에 의자왕이 신라로부터 40개의 성을 빼앗은 데에 이어 불과 한 달 만에 대야성까지 쟁취한 것은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대야성 전투 이후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김춘추를 고구려 측이 연금한 것도 동일한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3단계] 신라의 사대주의 강화, 김-김 콤비 전면 등장
제3단계는 신라의 사대주의 강화와 김춘추-김유신 콤비의 전면 등장. 642년에 백제에게 충격의 참패를 당한 신라에서는 2가지 반응이 동시에 나타났다.
하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좋게 말하면 나당동맹을 한층 더 강화한 것이었다. 당나라의 지원이 없으면 고구려·백제에게 나라를 뺏길 수밖에 없다는 판단 하에, 선덕여왕은 당태종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저 애걸복걸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신주류 콤비인 김춘추-김유신이 외교·군사 방면의 '소방수'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었다. 이미 632년에 칠숙의 난을 처리하고 선덕여왕을 옹립한 이후로 신라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양김 가문은 642년의 쇼크를 계기로 이와 같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두 가문의 대표자가 외교·군사의 일선에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신라가 위태로웠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4·5단계] 당태종은 선덕여왕 흔들고, 신라는 당에 기대고제4단계는 당태종의 선덕여왕 흔들기. 선덕여왕이 여왕 12년(643)에 긴급히 파병을 요청하자, 당태종은 군대를 보내주기는커녕 도리어 이를 선덕여왕의 권위를 흔드는 기회로 활용했다. 그는 장안성에 찾아와 원군을 요청하는 신라 사신에게 "너희 나라는 여자가 왕이라서 안 된다"며 오히려 여왕의 하야를 촉구하고 나섰다.
물론 그의 진정한 의도는 선덕여왕의 하야가 아니었다. 여왕을 흔들어서 신라를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그 같은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당태종은 곧 귀국하는 신라 유학승인 자장법사에게 후한 선물을 주고 그가 신라로 돌아가 "여자는 안 된다"는 논리를 확산시키도록 만들었다.
제5단계는 신라의 대당(對唐) 의존도 강화. 당태종의 하야 요구와 자장법사의 여왕무능론 전파를 계기로 선덕여왕의 권위에 흠집이 생기면서 신라에 대한 당나라의 의존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결국 신라에 대한 당나라의 입김이 그만큼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의존도가 심화되었다는 점은, 644년에 당태종이 신라를 대신해서 고구려에 서한을 보내 "신라와 친하게 지내라"고 권유한 점이나, 645년에 신라가 당나라를 위해 무모한 파병을 감행한 점 등에서 압축적으로 잘 드러난다.
특히 645년의 파병은 신라인의 혈세로 운용되는 신라 군대가 신라가 아닌 당나라의 국익을 위해 움직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당태종이 제1차 고구려 침공을 단행한 645년에 3만 명의 신라 군대가 당태종의 요구에 따라 고구려를 협공하는 사이에 백제가 신라의 성 7개를 전격적으로 빼앗은 사실은, 백제 방어에 사용되던 신라 군대가 당나라를 위해 무리하게 차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6단계] '당을 뒤에 업은' 상대등 비담 탄생제6단계는 상대등 비담의 등장. 신라 군대가 당나라를 위해 동원된 때로부터 6개월 뒤에 신라에서는 중요한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다. 비담이 상대등에 취임한 것이다.
당시의 전후맥락을 놓고 볼 때에 비담의 상대등 취임은 결코 단순하게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신라 정국이 당나라의 의지대로 움직이던 때에 그 같은 총리급 인사개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나라가 신라 여왕의 권위를 흔들고 신라 군대를 자기 군대처럼 활용하던 때에 비담이 상대등으로 등장한 사실은, 이 인사개편에 당나라의 입김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임을 추론케 하는 대목이다. 비담이 직간접적으로 당나라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비담이 상대등에 취임한 지 불과 14개월 만에 쿠데타에 필요한 제반 자원을 확보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칠숙의 난 이후로 신라 정계가 김춘추·김유신 가문을 중심으로 재편된 상황 하에서 비담이 두 가문에 대항할 만한 인적·물적 자원을 불과 14개월 만에 확보했다는 사실은 비담이 강력한 외부 후원자의 지원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양김 가문의 견제를 제어하면서 비담에게 그 같은 제반 자원을 몰아줄 수 있는 쪽은 당나라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쿠데타 당시 비담이 내건 구호인 '여왕은 무능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당태종이 만들어낸 정치논리인 점을 감안할 때에, 비담과 당나라 사이의 관계는 한층 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나라의 개입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담의 상대등 취임으로 인해 신라 정계는 칠숙의 난 이전 상황으로 다시 회귀한 것으로 보인다. 김용춘·김서현 가문 혹은 김춘추·김유신 가문으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이 구세력과 경쟁하던 칠숙의 난 이전의 구도가 재현된 것이다.
상대등 비담의 등장 이후에 양김 가문에 맞서는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사실은, 두 가문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세력이 비담을 중심으로 신속히 응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현실을 볼 때에 두 가문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세력을 들라 하면, 두 가문 때문에 정계 핵심부에서 밀려난 구세력을 우선적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당나라가 비담에 대한 후원을 통해 구세력을 부활시켰다고 해서, 당나라가 김춘추·김유신 같은 신진세력을 멀리하려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신라 정계의 양분을 통해 세력균형을 창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양쪽이 모두 당나라를 향한 충성 경쟁을 벌이기를 희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담이 만약에 당나라가 자기만 후원하는 것으로 착각했다면, 그는 1979년의 김재규가 저지른 것과 유사한 과오를 범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곧 제거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예고하던 미국 측과 자주 접촉하던 김재규는 거사 후에 미국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겠지만 김재규의 난을 실질적으로 진압한 전두환 측이 얼마 후에 미국의 전폭적 후원을 얻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자국의 국익에만 부합하면 위성국에서 누가 왕이 되든지 상관치 않는 것이 강대국의 생리가 아닌가. 따라서 비담을 띄운 당나라의 의도는 비담 측뿐만 아니라 양김 측의 충성까지도 동시에 촉진하는 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7단계] 연로병약한 여왕, 신구의 대결 제 7단계는 는 신구 세력의 전면 대결.
당태종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신라 정계의 신구 대립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선덕여왕 16년(647)에 비담 측이 선제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이 여왕 5년부터 중한 불치병을 앓았으며 여왕 16년경이면 이미 상당히 연로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에, 여왕의 건강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정국의 향방을 예측하기 힘들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 같은 쿠데타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말년의 여왕이 이미 상당히 연로했을 것이라는 점은, 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재위 579~632년)이 무려 53년간이나 집권한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여왕이 이미 상당히 많은 나이에 등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양측 중에서 어느 쪽이 국왕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인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국왕 이후'를 보장받지 못한 쪽, 다시 말해 차기 국왕을 확보하지 못한 쪽에서 일을 벌이기 마련이다. 차기 권력에 대한 불안감이 비담을 극단적인 결정으로 몰아넣었다고 볼 수 있다.
음모 단계에서 발각된 칠숙의 난의 경우에는 차기 권력을 확보한 쪽에서 일으킨 조작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비담의 난의 경우에는 그렇게 판단할 여지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권 41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쿠데타 발생 당시에 선덕여왕의 신병을 확보한 쪽은 비담이 아니라 김춘추·김유신 쪽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쿠데타 발발 직전까지 양김이 정치적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인 승만공주(진덕여왕)까지도 자기편으로 만들어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서기 647년 비담의 난은 서기 641년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과의 긴밀한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한 정변이었다. 6년간의 사건 전개를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돌궐·토욕혼·고창국을 굴복시키고 토번과 화친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쪽에서 한숨을 돌리게 된 당태종이 641년부터 동북아시아 쪽을 향해 동방정책을 개시하고(제1단계)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백제·고구려에서 강경파 정권들이 출현하고 이 정권들이 친당적인 신라를 압박하고(제2단계) 양국의 압박에 놀란 신라가 사대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김춘추-김유신 콤비를 전면에 내세우자(제3단계) 당나라는 이 기회에 신라를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 자장법사 등을 활용해서 선덕여왕의 권위를 흔들고 나섰다(제4단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의존도는 한층 더 심화되었고(제5단계), 신라와 당나라의 협조체제가 강화되는 가운데에 비담이 상대등에 취임하고 이로 인해 양김으로 대표되는 신진세력과 비담으로 대표되는 구세력의 갈등구도가 형성되었으며(제6단계), 이 같은 양대 세력의 갈등이 선덕여왕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 전면적인 무력대결로 폭발된 것으로 보인다(제7단계).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를 연상시키듯이, 토번 즉 티베트가 서기 641년에 당나라와 화친한 사건이 위와 같은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647년에 동북아시아에서 비담의 난이 발생하는 데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티베트와의 화해로 인해 당나라가 동북아시아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고 이로 인해 동북아시아가 급격히 요동치는 정세 속에서 야심 가득한 비담이 칼집에서 회심의 칼날을 뽑아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