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는 흰호랑이 띠인 경인년 새해 들어 날씨가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매섭게 춥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눈이 펑펑 쏟아져 새해 첫 시작인 4일 하루에만 서울에 25cm가 넘는 눈이 내렸다 한다. TV에서는 기상관측 이래 최고 많은 적설량이라며, 마치 신이라도 난 듯 마구 떠든다.
서글프다. 식의주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는 기러기 아빠에게 강추위와 펑펑펑 쏟아지는 눈은 얇은 지갑을 더욱 얼어붙게 만든다. 가스 보일러가 계속 돌아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7~8묶음에 천 원하던 깻잎이 2묶음에 천 원이라는 소리에 또 한번 화들짝 놀란다. 강추위와 눈은 이처럼 가난한 서민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렇다고 보일러를 끌 수도 없고, 먹을거리를 거를 수도 없다. 지갑이 얇아질수록 날씨가 추워질수록 배는 더욱 고프고,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이럴 때 문득 떠오르는 음식이 구수한 맛을 풍기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이다. 청국장은 추운 날 묵은지에 대파 송송 썰어 넣고 끓여 먹으면 추위도 쫓을 수 있고, 겨울철 건강도 지킬 수 있어 참 좋다.
충청도에서는 '퉁퉁장', 경상도에서는 '담북장', 평안도에서는 '떼장', 함경도에서는 '썩장'이라고도 불리는 청국장. 청국장은 성인병 예방은 물론 항암 항균작용까지 매우 뛰어나다. 그래서일까. 요즘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청국장을 미숫가루나 과립, 알약 형태에서부터 물이나 요구르트에 타 먹는 분말까지 나오고 있다.
청국장 처음 이름은 '전국장'이었다?청국장은 무르게 익힌 콩을 따뜻한 곳에 두어 납두균이 생기도록 띄워 만든 우리 된장이다. 청국장을 만드는 방법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메주콩을 10∼20시간 더운 물에 불렸다가 물을 붓고 푹 끓여 잘 익힌다. 그 다음 그릇에 짚을 몇 가닥씩 깔면서 퍼담아 따뜻한 곳에 놓고 담요를 덮어 씌워 하루 정도 지나면 청국장이 만들어진다.
영양가 많고 소화까지 잘되는 청국장. 그렇다면 청국장은 대체 언제부터 만들어 먹기 시작했을까. 기록에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염시'라는 이름으로 청국장이 처음 나온다. 서기 671년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왕 때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보낸 항의문에 웅진길이 막혀 염시가 나타났다는 내용이 있다.
서기 683년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 때에도 김흥운 딸을 왕비로 맞을 때 폐백품목에 '염시'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 염시(삶은 콩에 콩누룩을 섞어 소금물에 담갔다가 발효시켜 말린 것)가 지금 우리가 먹는 청국장이다. '청국장'이란 이름은 청나라 누룩과 같다 하여 이름 지었다고도 하고, 전쟁 때 빨리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장이라 하여 '전국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중기 명의 허준(1539~1615)이 지은 의학서 <동의보감>에는 "콩은 온성(溫性)으로 표현되고, 담두시인 청국장은 한성(寒性), 된장은 냉성(冷性)"이라며 "피부병, 상한(유행성호흡기질환), 소화기 및 해독에 처방약으로 사용한다"고 적혀 있다.
청국장, 소주 반 컵 넣으면 냄새 걱정 뚝!"청국장 이거 하나에 얼마씩 해요?""1500원씩입니다.""그럼 두 개 주세요.""두부는요?""저는 두부 넣지 않은 청국장을 더 좋아해요.""???"새해 연휴 마지막 날인 3일(일). 매서운 추위 때문에 하루 종일 '방콕'(방에 콕 들어박혀 있음)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구수한 청국장 내음이 나면서 입맛이 감돌기 시작했다. 옳거니 싶었다. 그렇잖아도 '오늘 저녁은 또 뭘 먹지' 걱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서둘러 두터운 점퍼를 껴입고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동원시장으로 갔다.
매서운 추위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동원시장 안에는 입김을 호호 불며 먹을거리를 팔고 사려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기러기 아빠는 김이 허옇게 피어오르는 어묵집을 천천히 지나 늘상 된장을 사는 단골집으로 가서 청국장 두 개를 3천 원 주고 샀다. 기왕 시장에 나온 김에 다른 먹을거리도 좀 살까 하다가 추운 날씨와 얇은 지갑 땜에 그만 두고 그냥 집으로 왔다.
청국장 끓이는 방법은 쉽다. 먼저 냄비에 무와 다시마, 국물멸치를 넣고 30분쯤 우려 맛국물을 낸다. 그 다음 맛국물에 청국장을 풀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 마시다 남은 소주를 반 컵 붓는다. 여기에 송송 썬 매운고추와 대파, 어슷썰기한 양파, 빻은 마늘을 넣고 쌀뜨물을 냄비 2/3가량 부은 뒤 보글보글 끓이기만 하면 끝.
청국장이 끓으면 소금으로 간을 한 뒤 입맛에 따라 고춧가루를 조금 풀어도 깔끔한 깊은 맛이 참 좋다. 나그네는 이날 청국장을 끓일 때 고춧가루 대신 고추장을 약간 풀었다. 누군가 청국장에 두부를 왜 넣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한마디 쓴다. 혼자 살아보라. 애써 끓인 청국장을 어찌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겠는가.
"냄새만 맡아도 아주 침이 절로 넘어가네요"사실, 혼자 사는 가난한 기러기 아빠도 청국장에 두부를 넣고 끓여 먹은 때가 몇 번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청국장이 남으면 아깝지만 그냥 버려야만 했다. 왜? 다시 끓이면 두부가 물러 터지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기러기 아빠는 한번 청국장을 끓이면 서너 번은 더 끓여 먹는다. 청국장은 다시 끓여도 맛이 좋지만 여러 가지 밑반찬을 대충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그 맛도 기막히다.
그날, 기러기 아빠는 잡곡밥에 청국장을 듬뿍 떠 넣고 콩나물과 무채나물, 상추를 썰어 넣었다. 이어 고추장과 참기름 서너 방을 톡톡 떨어뜨려 쓰윽쓱 비벼 그야말로 '기러기 아빠표 청국장 비빔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니, 마악 청국장 비빕밥을 한 숟갈 수북히 떠서 입에 넣고 기분 좋게 우물거리고 있을 때 "아저씨! 잠깐 문 좀 열어봐요"라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누굴까. 기러기 아빠가 숟가락을 잠시 놓고 얼른 일어나 문을 열자 집주인 아주머니가 감귤 한 봉지를 건네주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했다.
이런 이런! 기러기 아빠는 아직까지도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새해인사도 못했는데... 이를 어쩌나. 그때 집주인 아주머니가 "그참! 청국장 냄새 한번 좋네"라며 "아저씨! 음식도 참 잘하시나 봐요" 했다. 옳거니 싶어, "좀 드릴게요. 저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서..."라며 청국장을 얼른 한 그릇 떠서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드렸다.
숟가락으로 밥을 비빌 때마다 고소한 참기름 내음과 구수한 청국장 내음이 온몸에 은근슬쩍 배어들면서 추위가 절로 물러나는 것만 같았다
"어휴~ 고마워서 어쩌나. 냄새만 맡아도 아주 침이 절로 넘어가네요.""해도 바뀌고 했는데 양말이라도 몇 켤레 드려야 하는데...""양말보다 새해 선물로는 아저씨가 직접 끓인 이 청국장이 최고네요. 잘 먹을게요""드셔 보시고 맛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이래 봬도 <오마이뉴스>에 맛기사만 200여 꼭지 정도 썼거든요." 그래. 경인년 새해에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끼리 따끈한 청국장 한 그릇이라도 나눠 먹으며, 쌓인 눈도 함께 치워 보자. 추위가 제 아무리 기승을 부리더라도, 눈이 제 아무리 많이 내린다 하더라도 이웃끼리 나누는 살가운 정까지 얼어 붙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날씨가 추울수록, 삶이 힘들수록 더욱 소중한 것이 '나눔'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