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용의 피'는 정말 멈출 수 없는 것일까.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언론이기를 포기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단순한 정권의 홍보를 뛰어넘어, 이제는 버젓이 역사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12일, 나는 KBS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역사왜곡'은 일본 왜곡교과서나 중국의 동북공정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벌건 대낮에 시청자를 상대로 우리 현대사를 왜곡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우연히 보게 된 프로그램은 KBS 1TV에서 방송한 <대한민국, 백년의 드라마>(이하 백년의 드라마)라는 특집 다큐프로그램이었다. 제목만 봐도 지난 1910년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2010년까지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되돌아보는 내용이었다. 진행자 역시 '올해 망국 100년을 맞아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거대한 의미가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된 취지라고 설명했다.
난 당연히 망국과 독립, 분단과 건국, 산업화와 민주화, 냉전과 남북화해라는 지난 100년간의 우리 역사가 균형 있게 다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백년의 드라마>는 지난 100년간의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는 역사왜곡의 현장이었다. 항일운동이나 독립,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는 없었고 오로지 가난극복과 산업화만이 있었다.
'균형적 시각' 찾아볼 수 없는 공영방송 KBS이 프로그램만 뜯어보면, 지난 100년 우리 역사엔 오직 박정희와 김종필만 있었다. 김구나 김대중, 수많은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 민주화인사 그리고 통일운동가들의 이름은, 이 프로그램에서만큼은 사라졌다. 독립운동과 민주화, 남북화해를 위해 한 평생을 받쳤던 인사들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실제 이 프로그램에는 박정희와 김종필만 애국자로 등장했다. 그리고 경제발전의 후계자로서 이명박 정권의 경제업적을 홍보했다.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 역사관을 날조하려고 작정한 프로였다. 박정희를 미화하기 위한, 개발독재론을 찬양하는 프로그램에 불과했다. KBS가 독창적으로 창조한 '박정희사관'으로 우리 현대사를 바라보자는 대국민 계몽성 프로였다. 단순히 한 프로의 내용만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현재 KBS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기본 시각이 그대로 들어난 프로그램이었다. 정권 홍보도 모자라, 역사왜곡까지 일삼을 정도로 언론의 기본양식을 포기한 KBS의 모습을 보았다.
어쩌다,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이렇게 됐는가. 정연주 전 사장의 강제 퇴출과 이명박 정권에 대한 홍보성 보도에 대해서는 그래도 그러려니 했는데, <백년의 드라마>를 보면서 'KBS의 '어용의 피'의 끝은 어디일까'하는 암담함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나만의 편향된 시각일까. 다른 민간방송도 역사를 그렇게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공영방송이라면 더욱이 최소한의 균형적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공영방송이 KBS처럼 역사를 통째로 날조하거나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는가.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2주새 3번이나 방송된 <백년의 드라마>어떻게 이런 프로가 방영되나 살펴보았더니, 내가 본 12일 방송은 재방송이었다. 애초는 올해 1월1일 신년특집으로 기획해 방영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특보 출신인 김인규 KBS 신임사장이 '새로운 공영방송'을 외치며 발표했던 '2010 KBS 10대 기획' 중 첫 번째 꼭지였다.
KBS 편성표를 찾아보니, 이 특집프로는 지금까지 무려 세 번이나 방영됐었다. 지난 1월1일 새해 첫날 오전 10시에 KBS 1TV를 통해 2시간짜리 특집 프로로 첫 방영한 데 이어, 9일에는 저녁 10시 15분 KBS 2TV를 통해 1시간짜리로 다시 편집해 재방영했고, 12일 오후 2시 10분 다시 KBS 1TV로 내보냈다.
특정 프로를 2주일도 안 되어, 이렇게 KBS 1, 2TV를 번갈아 가면서 세 차례나 방영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것도 금, 토, 화요일로 나눠 방송 요일이 겹치지 않도록, 그리고 방영시간대도 오전과 오후, 저녁 시간대로 골고루 배분해 내보냈다. 마치 대한민국의 모든 시청자들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역사교육 프로라도 되는 듯.
KBS가 이 프로의 제작과 방영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가 역력하다. KBS가 자체 판단으로 이처럼 많이 재방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청와대나 문화부로부터 '최우수 프로'로 선정되어 재방영하도록 지시를 받았는지 그 배경도 궁금하다.
대한민국 100년 역사엔 박정희만 있었나
나는 KBS가 다룬 다큐 <백년의 드라마> 소재가 문제라고는 보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망한 지 100년이 되는 올해,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공영방송인 KBS라면 당연히 다뤄야할 주제다. 그리고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이른바 보릿고개의 가난을 극복하고 산업화로 선진국 문턱에 올라선 우리 경제성장은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부분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독재와 인권탄압과 별개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도 다룰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경제 분야에서도 오로지 박정희만 찬양했다. 김대중 정권의 IMF 위기극복 업적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프로그램이 경제만 다룬 것도 아니다. 월드컵과 올림픽 등 스포츠도 다루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의아하다. 왜 지난 100년의 역사를 굳이 경제와 스포츠로만 접근을 했는지.
독립과 민주화, 남북화해의 역사는 박정희와 이명박, 그리고 다음에 집권할지 모르는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에 흠집이 나서일까. KBS가 충성해야할 대상은 국민이나 시청자가 아니라, 바로 현실과 미래의 권력이니까.
그러나 우리 역사에 경제발전 과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사적으로도 우리나라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다. 1910년 망국이후 우리는 100년 동안 항일운동과 독립, 분단과 남북의 분열 건국,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남북 화해협력, 선진화라는 큰 흐름을 거쳐 왔다. 진보든 보수든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우리 역사다.
앞서 언급했듯, 이 프로그램의 제작 취지는 '100년 우리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의 숨은 의도는 구체적인 내용 전개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지난 100년을 되돌아본다며 1910년 일제 강점과 1945년 독립과 분단, 한국전쟁의 역사적 사실만을 단순히 언급한 뒤 외국인을 통해본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항일운동이나 김구의 활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생활상에 대한 외국인 인터뷰는 있어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터뷰는 없다.
그리고 바로 60, 70년대의 해외수출과 식량증산과 새마을운동, 경제발전으로 넘어간다. 여기에 이 프로의 진짜 의도가 담겨 있다. <백년의 드라마>가 소개하는 눈물과 감동의 사례 11꼭지는 거의 모두 박정희 시대 개발사례나 경제발전 뒷이야기들뿐이다. 당연히 4·19민주혁명이나 5·16군사쿠데타, 80년 5·18 광주민주항쟁은 없다.
오욕의 역사현장을 '박정희 칭송' 현장으로만 조명KBS가 보기에는 일제 강점기 외국여성의 평양 생활 모습 증언이나 해외 유학생의 증언, 훈련소에서 끌려가 독일어 통역관으로 활동한 사람의 증언만 감동의 드라마고 독립과 민주화는 감동의 드라마가 아니다.
특집프로의 이름을 '대한민국 백년의 드라마'가 아니라, '대한민국 백년, 박정희 드라마'라고 해야 할 정도다. 반공을 내세워 친일을 덮어버리고, 개발을 미화해 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감추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KBS가 바로 이 프로를 '대한민국 백년의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만든 의도가 여기 있다.
프로그램은 이것도 모자라, 박정희 정권의 수출정책과 경제정책을 칭송하면서 아나운서 진행자의 배경으로 서울 장충체육관을 비춘다. 아나운서는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수출의 탑 시상식이 열렸던 장소"라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KBS 눈에는 장충체육관이 자랑스러운 경제성장의 장소로만 기억되나보다. 장충체육관은 유신 독재시절 박정희와 80년 신군부시절의 전두환이 희한한 통일주체국민회의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체육관선거'를 벌였던, 민주주의 오욕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역사를 바라보는 KBS의 '외눈박이 시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모든 사물이 그렇지만, 특히 역사는 결코 한 부분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전체를 외면한 채 한 부분의 사실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결코 '진실보도'가 될 수 없다. 이는 사실보도의 외피를 입은 철저한 왜곡보도가 된다. 다큐 <백년의 드라마>가 바로 '사실보도'로 치장한 진실왜곡이자 역사왜곡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나도 동의한다. 그 누구의 역사라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라며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를 통한 사회적 통합을 촉구했다. KBS는 이보다도 못하다.
일본이 지난 100년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경제성장만 부각시키고, 조선과 중국 등 아시아 침략 전쟁, 태평양 전쟁을 빼버린다면 당연히 역사왜곡이다. 독일이 자신의 과거 역사를 기술하면서 히틀러의 2차 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세계사 왜곡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나치즘을 미화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의 극우세력들의 역사관이다. KBS가 바로 이런 짓을 하고 있다.
'사실보도'를 내세워 교묘한 역사왜곡에 나선 KBS는 분명히 답해야 한다.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를 왜곡한 이유를. 지난 100년 역사에서 독립운동과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화해와 통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최소한의 균형감각도 갖추지 못한 역사왜곡 프로인 <대한민국 백년의 드라마>에 대해 국회는 청문회를 통해 반드시 철저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의 숨겨진 제작 의도와 제작과정, 방영과정에 대한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찾아내야 한다. 문화방송의 <PD수첩>에 대해서 그렇게 공정성을 문제 삼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이 프로에 대해서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궁금하다.
권력에 맞설 수 없다면, '뉴라이트방송'으로 명패 바꿔라
역사는 결코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성장을 내세워 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감추려 하지 말아야 한다. 반공을 내세워 친일의 추악한 과거를 숨기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옛날 친일파와 독재자들의 논리다.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보는 뉴라이트의 논리다.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다. KBS는 이미 그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80년 광주항쟁을 폭도의 난동으로 규정하며 '땡전뉴스'의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는 KBS가, 지금 또다시 10년 후 나타날 또 다른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역사 앞에 경건하고 엄숙해야 한다. KBS는 자신의 목을 내놓을망정 진실만을 기록했던 옛날 사관들의 기개와 자세를 되새겨야 한다.
왜 KBS가 세 번이나 이 프로를 계속 내보내는 지 그 이유를 알 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뉴라이트 성향의 보수인사가 이 프로에 대해 찬사를 들어놓았다. <올인코리아> 조영환 편집인은 "KBS의 급격한 정상화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며 "'대한민국 백년의 드라마'를 비롯해서 KBS의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대한민국 방송의 정상화에 구체적 증거로 판단된다"고 12일 말했다. 뉴라이트가 극찬하는 'KBS의 급격한 정상화'의 구체적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 백년의 드라마> 특집 다큐다.
KBS는 박정희를 찬양하고, 뉴라이트는 KBS를 찬양하는 시대다. KBS는 민족사관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식민사관을 이어받은 박정희사관으로 역사를 보고 있다. 언론의 본분이나 사명은 어디로 사라지고, 오로지 권력과 정권만을 쳐다보고 있다. 국민과 역사는 이미 KBS 사옥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것인가.
KBS는 이제 그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합리적 시민운동가인 박원순 변호사마저 왜 KBS 보도에 분노하고 수신료 거부운동에 들어갔는지를 알 것만 같다. KBS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KBS 구성원들이 국민 앞에, 그리고 역사 앞에 답해야할 차례다.
국민의 방송이 아닌 정권의 방송, 나아가 역사왜곡까지 일삼는 KBS라면 깨끗이 공영방송의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공영방송의 이름으로 수신료 인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권력에 맞서 공영방송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아예 '뉴라이트 방송'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다.
KBS, 그 어용의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