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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5년인 1791년 7월 열닷새. 상감은 평소처럼 규장각에 앉아 있었다. 홍문관 수찬(修撰) 정약용이 나타나 상견의 예를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재위년의 소란을 꺼내들었다.

"과인이 정수찬을 부른 건 지난 정유년(丁酉年)의 난리가 생각났기 때문이오. 존현각(尊賢閣)에 침입한 전흥문 일당은 추후의 심문으로 관련자가 속속 밝혀졌지만···."

당시 도승지로 있으며 세도를 부리던 홍국영이 밝혀낸 배후는 여덟 명으로 압축됐다. 형조판서 홍인한(洪璘漢), 전 좌승지 정후겸(鄭厚謙), 공조판서 이태서(李台徐), 전 좌의정 오현수(吳玄洙), 형조참의 이정호(李貞浩), 전좌찬성 이두복(李斗復), 전병사 장기환(張沂煥), 전 충청감사 이태성(李泰成) 등이었다. 위의 인물 가운데 정후겸은 정조 즉위년인 1776년 3월(영조52년) 25일 유배돼 홍인한과 함께 이미 사사(賜死)됐었다.

영조대왕 때 사도세자의 폐위와 죽음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수직군관 강용희 등과 내응해 전흥문을 침투시킨 것을 호위군관 김춘득이 발견해 이들을 나포했었다.

시기가 적당치 못해 도망한 자들도 모두 체포돼 참수된 후 정조의 경호는 숙위대장 겸 금위대장에 임명된 홍국영의 손으로 넘어가 잔존세력이 뿌리 뽑힌 것으로 알려졌었다. 연루자들을 숙장문에서 치죄한 후 홍상범 집에 머문 전흥문의 처 초희(初姬)를 잡으러 갔을 때 이미 그녀는 사라진 뒤였고 허름한 방안엔 찢겨진 그림만 남아있었다. 그것은 한 폭의 산수화였는데 깊은 산 폭포와 물이 있고 찢겨진 그림 아래쪽에 사내의 하반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려는 정조의 노력은 끝 간 데 없이 진행됐으나 열다섯 해가 지난 지금까지 오리무중이었다. 다만, 그림속의 확연한 증거만은 지금껏 남아 있었다. 상감은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근자에 이르러 당시의 상황이 자꾸만 내 꿈길을 파고드는 데 역모를 꿈꾼 여덟 명의 대신들 이름자가 쓰인 연판장(連判狀)이 나타나고 그 주위에 김이박(金李朴) 성씨를 이용해 김용인(金龍仁) · 박수원(朴水原) · 이한양(李漢陽) 등의 이름이 흐릿하게 나타났소. 그게 역모에 가담한 자들인지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걸 알아보려 정수찬을 불렀소. 대신들은 하세하신 사도세자의 원한을 아직도 잊지 않아 살겁을 부른다 할지 모르나 정유년(丁酉年) 사건 이후 한 번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한 건 반역을 꾀한 역도들이 은연중 암약하고 있다는 예감 때문이오. 이틀 전 용인 현감이 파발을 보냈는데 정유년 소란 당시 과인이 꿈에도 잊지 못한 연판장의 탁본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올려 그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그러한 이유로 정수찬을 불렀으니 아버님의 하세와 관련있는 자의 물건인지를 살펴 그 진위를 가려주기 바라오."

"마마의 뜻 봉행하겠나이다."

"고맙소, 정수찬. 그대 안전을 위해 사헌부 지평으로 있는 이창영(李暢潁)에게 명해 지략이 뛰어난 다모(茶母) 한 사람이 은연 중 동행할 것이네. 과인이 그대에게 큰 실권을 주지 못하나 믿고 의지할 건 그대뿐인 데다 용인 관아의 현감이 정수찬과 동문수학 했다 하니 그대가 이 일을 조사해 주기 바라네."
"알겠나이다, 마마."

규장각을 나온 정약용이 길 떠날 행장을 꾸민 그 시각. 용인 관아는 어둑새벽의 소란 때문에 수문(守門)하며 번(番)을 서는 병사들의 불만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이틀 동안 쏟아진 비가 잦아들어 아침 해가 희움한 빛을 뿌리는 데 느닷없이 꽹과리 소리가 요란스럽게 아침 공기를 흔들었다.

아침 여섯 시 반이나 되었을까. 대다수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뭉그적대며 선하품을 풀풀 날리던 시각에 스물다섯 쯤 뵈는 사내가 꽹과릴 두들기며 목청을 돋웠다.

"사또! 누이의 한을 풀어주시오. 사또, 억울하게 죽은 내 누이의 한을 풀어주시오!"
"며칠 전에도 난리를 쳐 사또께 곤욕을 치르더니만 저 작자 또 나타났구먼."

곁에 있는 신참내기 동료가 물었다.
"누구야?"
"윤치영(尹致暎)이야. 세 해 전 죽은 누이가 어쨌다고 꽹과릴 치고 지랄을 떨었어."

뒤늦게 방에서 나온 또출(又出)이는 잔치꿈이라도 꿨는지 선하품을 날리며 입맛을 다셔대며 어기적거렸다. 아직도 피곤이 물러가지 않았는지 어둑새벽부터 귀따갑게 들은 꽹과리 소리가 마뜩찮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꿈속을 헤매며 겨우 잠이 든 오경하(吳慶河) 현감은 쾅쾅 울리는 꽹과리 소릴 듣는 순간 머릿속 때가 벗겨나가는 개운함을 느꼈다.

"누가 시끄럽게 하느냐?"
"며칠 전에 온 윤치영이라 하옵니다."
"그 자를 데려오라."

오늘은 어떤 이유로 꽹과리 치는 지를 물었다.
"관문을 열기 전 무슨 이유로 소란 떠느냐? 넌 닷새 전에 돌아간 윤가가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사또! 소인이 꽹과릴 치는 건 너무나 분한 나머지 그 한을 풀길 없어 격쟁(擊錚)을 올린 것입니다."
"격쟁? 연유를 말하라."

"소인의 누이는 세 해 전, 최씨 일문에 시집갔는데 시집살이 석 달만에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습니다. 누이는 심성이 고와 인근 고을 사람들은 누이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만날 때마다 얘기하곤 했습니다만, 어찌된 셈인지 시집간 지 석 달만에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걸 부끄럽게 여겨 대들보에 목을 매 자진(自盡)했다는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낙담 끝에 돌아가셨고 소인도 화를 삭이지 못해 술로 세월을 보낸 지 세 해나 됐습니다."

듣다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윤치영이란 인물은 이백(李白)이 살아온 것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었다.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대과를 준비하던 중 누이의 자진소식을 듣고 모든 걸 포기해 버린 아까운 인재였다.

지방관아의 수령으로 향시 장원자를 치하할 때 윤치영을 본 적 있었다. 이규보의 회문시(回文詩)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앞뒤로 낭송할 정도로 문학적 소양이 넉넉한 젊은이였으니 마흔을 훌쩍 넘긴 오경하가 그의 시제(詩才)를 부러워할 정도여서 용인 고을 처녀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꿈이 꺾인 건 누이의 죽음이었다.

"네 누이의 죽음은 내가 부임하기 이레 전의 일이나 소문이 자자했으니 어찌 모르겠느냐. 그 일은 전임사또가 자세히 조사했으나 타살(他殺)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최씨 일문에서 며느리의 근자 행태에 의문점을 제시한 게 받아들여져 스스로 목을 매 자진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이가 얼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격쟁하고 있으니 이유가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사또."
"마루 위로 올라 오거라."

윤치영은 일곱 자 가량 떨어진 대청마루에 부복했다. 일기가 고르지 않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아 오경하가 배려해준 일이었다.

윤치형은 하얀 무명천에 싸인 검은 물건을 꺼내놓았다. 그것은 침술사들이 쓴 대침(大針) 같은 것으로 검게 퇴색되어 있었다. 아전이 받아 건네자 오경하는 입술을 뾰족이 내밀었다.

"이게 뭣인고?"
"죽은 자의 몸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어라?"

"사또, 소인이 어제 삼봉산(三峰山)에 갔다가 쏟아지는 폭우를 피하려 허둥대던 중, 우연찮게 그 자리가 세 해 전 누이가 묻힌 곳임을 알게 됐습니다. 누이는 부정을 저질렀다고 봉분을 올리지 못한 채 해 뜨는 곳을 향해 돌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소인의 생각엔 그렇게라도 해야 누이에게 붙은 흉악한 악귀가 해 뜨는 것과 함께 스러지리라 봤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에도 최씨 집안과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당했던 누이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 누이 무덤을 찾았습니다. 하온데, 갑자기 쏟아진 빗발에 천둥번개가 요란하더니 노송(老松)에 벼락이 떨어져 부러진 나무가 누이 무덤을 덮쳤습니다."

"호오, 어찌 그런 일이···."

"비가 금방 그친 탓에 노송을 치우고 부서진 나무 관을 매만지던 중 누이의 뼈만 남은 주검에서 바로 그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사또!"

검고 칙칙한 물건을 매만지던 오경하는 그것을 아전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네 누이가 세상을 뜬 지 세 해가 지났다. 나무 관을 썼으니 노송이 부러져 무덤을 덮칠 때 관이 부서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관 속에서 튀어나온 못(釘)같은 것일 수도 있잖은가. 사람이든 물건이든 오래 되면 이렇게 흉칙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벌겋게 녹이 슨 것을?"

"사또, 소인이 꽹과릴 울리며 재조사를 청구한 건 다른 이윱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소인이 그 물건을 발견한 곳은 누이 몸 가운데인 배꼽에 해당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로보아 누군가가 누이 배꼽에 침을 꽂고 절명한 누이를 대들보에 매단 게 분명합니다. 이것은 최씨 집안에서···."

"네 이놈! 어디서 방자한 수작을 떠느냐! 죽은 자의 몸에서 나왔다고 살인의 도구란 증거가 있느냐? 간밤을 설친 관장의 마음을 어디서 헤픈 소리로 어지럽히는고? 너의 누이가 자진했을 때 모든 조사가 자세히 이뤄졌거늘 죽은 자의 관에서 나온 지저분한 물건 하나로 재조살 청구한단 말이냐? 허나, 지금껏 네놈 주변에 일어난 일이 범상치 않으니 세 해 전의 검시기록을 살펴볼 것이다. 무엇 하나 이상이 없을 시엔 네 놈의 볼기가 거덜 날 줄 알라!"
"예에, 사또!"

"돌아가 닷새 후 관아에 들려라!"
윤치영이 물러간 후 오현감은 형방(刑房)에게 세 해 전 사건에 대한 검시기록을 찾아 대령시켰다.

격쟁이란 이유있는 항변이다. 이러한 항변은 조선왕조가 초기의 민생치안 명목으로 시행된 신문고(申聞鼓)가 유명무실해진 게 원인이지만 힘없고 나약한 백성들로선 재조사를 청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러한 격쟁은 자손이 조상을 위해, 처가 남편을 위해, 동생이 형을 위해, 종이 주인을 위해 왕이 거동하는 길이나 관아의 문앞에서 꽹과리나 징을 울려 탄원하는 제도다. 그러나 사소한 일로 격쟁하거나 마을 사람들이 수령을 유임시키고자 격쟁하는 건 장(杖) 1백대에 처하는 것이 <속대전>의 법제화였다. 특히 정조 때엔 위외격쟁추문(衛外擊錚推問)의 법을 만들어 함부로 궁에 들어와 격쟁하는 걸 엄벌에 처했다.


#추리,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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