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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포스터
▲ <추노> 포스터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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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드라마 <추노>가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남자 배우들의 복근, 이른 바 식스팩에 대한 찬사와 호평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나 역시 장혁, 오지호, 한정수 같은 남자배우들의 탄탄하고 멋진 몸매를 감상할 수 있어 감사하고, 이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다. 하지만, 드라마 <추노>는 그런 눈요기용 작품이 아니기에 이것을 보며 마음에 들었던 점을 써보고자 한다.

하층민의 삶, 사극에 들어오다

드라마 <추노>는 양반이나 왕이 아닌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이다. 우선 이것이 반갑다. 과거의 사극은 왕이나 귀족계급의 이야기를 담는 경우가 많았다. 하층 계급 사람들에 비해 지배자들에 관한 기록이 훨씬 많으므로 사극을 만들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들의 이야기가 자주 사극으로 만들어졌는데, <장희빈>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내가 기억하는 장희빈만 1980년대의 전인화, 1990년대 정선경, 그리고 2003년 김혜수까지 셋이나 된다. 거의 10년마다 <장희빈>이 나오다보니 세 번째 장희빈 소식에는 지겹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극은 너무 여러 번 써먹어서 이제는 식상한 소재가 되어버렸다.

이에 비해 상민, 천민들을 소재로 한 사극은 신선할 수 있다. 지금까지 거의 제작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층민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는 적지만, 전반적인 경향과 큰 흐름은 지배자들의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그래서 상상력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많다.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어떤 갑남을녀가 주인공이 되는 하층민의 사극은, 그 시대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사건만 집어넣지 않는다면, 학계도 시청자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

대길이(장혁) 패거리나 천지호(성동일) 패거리 같은 추노꾼이 정말 있었는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노비 쇄권색(刷券色), 추쇄도감(推刷都監) 등의 임시 관청을 만들어 국가가 도망 노비를 추쇄한 기록은 있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민간업자가 노비 추쇄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어느 양반이 노비를 추쇄한다며 지역민들을 괴롭히고, 추쇄한 노비에게 사사로이 형을 집행해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여럿 보인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 재해를 수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노비 추쇄를 정지해달라는 여러 대신들의 건의가 대부분이다.

노비인 언년이가 입은 옷 진짜 노비가 입었던 옷으로 보일만큼 낡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다.
▲ 노비인 언년이가 입은 옷 진짜 노비가 입었던 옷으로 보일만큼 낡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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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추쇄꾼은 작가가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든 가상의 집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록에 추노(推奴), 추쇄(推刷)에 관한 기록이 많은 것을 보면 공식 기록에만 없을 뿐 존재했을 수도 있는 집단이다. 이런 점이 바로 사극의 매력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충분히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집단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대상에 맞게 창조하고 풀어나가는 것 말이다.

옷인가, 넝마인가

드라마 <추노>를 본 사람은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양반이 아닌 등장인물들의 옷은 매우 초라하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있으면, [낡고 해어져서 입지 못하게 된 옷, 이불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는 의미를 가진 '넝마'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내게는 아주 반가웠다.

기존 사극의 등장인물들은 한복의 고운 맵시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함인지, 왕부터 노비까지 모두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다. 산속에서 수십 년 무술 수련을 하고 내려온 이의 옷도, 전국을 떠도는 나그네의 옷도, 양반가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노비의 옷도, 엊그제 지은 티가 확 나는 깨끗하고 고운 옷들이었다.

하지만 <추노>는 달랐다. 언년이(이다해)가 입은 먹물빛 옷은 군데군데 해어져 있고, 대길 도령이 언년이에게 신을 선물하며 신겨주는 장면에서 드러난 버선은 여기저기 기운자국에 더럽기까지 했다. 사극에 항상 등장하던 하얗고 날아갈 듯한 버선이 아니었다.

추노꾼인 대길 패거리의 의상도 그렇다. 그들이 입은 등거리는 다 해지고 올이 풀린 모양새를 하고 있어, 가난하고 거칠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잘 보여준다. 그들이 입은 등걸잠방이가 그들의 탄탄한 가슴 근육과 복근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만은 아닌 것이다.

대길 패거리가 입은 등거리 등거리는 조선시대 남자들이 입은 옷으로 깃과 소매가 없거나, 짧은 소매를 단 옷이다. 많이 헤져있는 이들의 옷에서 신산한 하층민의 삶을 엿볼 수 있다.
▲ 대길 패거리가 입은 등거리 등거리는 조선시대 남자들이 입은 옷으로 깃과 소매가 없거나, 짧은 소매를 단 옷이다. 많이 헤져있는 이들의 옷에서 신산한 하층민의 삶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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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인 업복이(공형진)와 초복이(민지아)의 차림새를 보면서는 경탄을 했다. 그들이 진짜 노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요즘엔 걸레로도 안 쓸 만큼 낡은 옷을 입었고, 얼굴도 지저분했다. 바로 이것이 사극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장치이다. 요즘처럼 옷감의 질이 좋지도 않고, 물자가 흔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므로, 가난한 일반 백성들은 분명히 낡아서 구멍이 난 옷을 입고 다녔을 것이다. 과거의 사극은 이런 부분까지 미처 신경쓰지 못했지만, <추노>는 이런 디테일한 면도 세심하게 살려 사극의 시각적 완성도를 높였다.

성적 코드로 가득한 일상의 대화

드라마 <추노>의 또 다른 논란거리는 대사에 비속어, 성희롱에 가까운 음담패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대사가 민망한,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것은 선정적인 대사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꼼수는 아니다.

판소리, 고전 소설, 탈춤의 대본 등을 보면 상민이나 천민인 등장인물들이 일상적으로 성(性)과 관련된 비속어, 성적인 의미에서 출발한 질펀한 농담들을 쏟아낸다. 속담에도 성과 관련된 걸죽한 표현들이 많다. 우리 조상들은 성적인 코드가 가득한 말들을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표현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썼던 것이다.

드라마 <추노>가 여성을 비하한다는 지적도 있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극이다. 17세기의 남자들은 주막의 주모에게 요즘 기준이라면 성희롱이라고 불쾌해할 만한 말로 집적거렸을 것이고, 해우채를 내고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여사당의 성을 매매했을 것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과 상황들은 17세기를 무대로 한 사극이기에 등장한, 리얼리티를 위한 장치이다.

한성별곡, 이천희의 재발견

<한성별곡-正> 포스터
▲ <한성별곡-正>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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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추노>는 곽정한 피디의 작품이다. 2007년 7월 한달 간 8부작으로 방영된 <한성별곡-정(正)> 역시 그의 작품이다. 탄탄한 스토리와 뛰어난 작품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혹시 <추노>의 다음 회 기다리기가 지루하다면, <한성별곡> 보기를 권한다. 요즘 어리버리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는 안내상이 정조 역할을 맡아 까칠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군왕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내게 이 드라마는 '이천희의 재발견'이었다. <한성별곡> 이전에도 이천희라는 배우는 알고는 있었지만 현대극에만 잘 어울릴 것 같은 곱상한 얼굴에 사극 대사나 제대로 할까 싶어 전혀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드라마 <한성별곡>은 그에 대한 나의 모든 편견을 바꾸어 놓았다. 배우 이천희는 주인 아가씨에 대한 사랑을 품은 선한 모습의 청년도,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모습의 시전 행수도 매혹적으로 소화해 냈기 때문이었다. 이천희가 연기한 캐릭터가 너무나 멋있었기에 주인공 아씨가 왜 이 멋진 양만오를 선택하지 않는지 아쉽기만 했다.

추노, 오지호의 재발견

드라마 <추노>는 '오지호의 재발견'이라는 의미를 지닐 것 같다. 인터넷을 보니 많은 이들도 오지호의 매력을 발견한 듯하다. 사실 나는 배우 오지호에게 전혀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분명 잘생기고 몸매도 멋진 남성이지만, 사람마다 제 눈의 안경이 달라서인지 내게는 별로였다.

몇 년 전 사극 <서동요>에 그가 사택기루 역으로 캐스팅되었다가 번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참 잘 됐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한복을 입고 사극 연기를 한다는 자체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조선 무관의 옷을 입히고 월도를 쥐어주니 병자호란 때 전쟁터에서 싸우다 튀어나온 무인이 되었다. 예전에는 느끼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외모가 문무를 겸전한 자부심 강한 조선의 무인의 모습으로 거듭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추노>의 러브 라인을 주인공인 대길-혜원이 아니라 태하-혜원으로 밀어야 겠다.

곽정한 피디에게는 배우의 새로운 매력을 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현대극에만 어울릴 것 같던 이천희와 오지호가 사극 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을 한껏 발휘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추노>에서 송태하 역을 맡은 오지호
 <추노>에서 송태하 역을 맡은 오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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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는 주인공들의 식스팩 말고도 많은 것을 가진 드라마이다. 기존 사극이 다루지 않았던 신선한 소재로 만들었고, 철저한 고증으로 17세기의 시대상을 화면 안에  잘 살려냈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에, 영화 부럽지 않은 영상미도 보여준다.

앞으로도 <추노>처럼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얻는 사극이 많이 제작되기를 바란다. 해외 수출도 염두에 두는 드라마라면 쓸데없는 볼거리나, 한류스타를 모셔오는 데에만 돈을 쓰지 말고 이렇게 만들었으면 한다. <추노>라면 해외에 수출되어도 결코 부끄럽지 않을 작품성과 한국문화 홍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드라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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