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올해 창간 10주년 기획의 일환으로 국내 11개 진보싱크탱크들과 공동으로 '지방선거 10대 어젠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삽보다 사람'이라는 주제가 붙은 이번 기획을 통해 거대 담론보다는 주민들의 삶과 밀접한 과제를 구체적으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가계부채 700조 시대. 빚과는 담 쌓고 사는 이들이 있다. 특별히 가진 게 많아서도 일부러 허리띠를 졸라 매서도 아니다. 고소득과 빠른 승진 대신 저소득이라도 여유 있는 삶을 찾는 움직임을 뜻하는 '다운시프트(Down-Shift)'를 대안으로 삼은 이들이다. 지금까지는 웰빙 열풍과 더불어 친환경 소비 운동 정도로 여겨졌지만 요즘엔 과도한 재테크 열풍의 대안으로도 관심을 받고 있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10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 불이학교에 한때 '재테크의 여왕'을 꿈꾸던 30-40대 여성 7명이 모였다. 가정경제교육을 내건 사회적 기업 에듀머니 제윤경(39) 대표와 고양자유학교 학부모인 조주연(43) 배일영(42) 유성희(41) 이유선(39) 이경재(42) 김종숙(39)씨가 그 주인공.
이들은 지난해 9월 8일 '착한 가계부 소모임(
http://cafe.daum.net/eduhousefp)을 만든 뒤 매달 한 두 차례씩 모여 <다운시프트로 인생을 즐기자> <행복한 경제학> 등 대안적 삶을 다룬 책들을 함께 읽고 가계부를 통해 생활 속에서 직접 실천하며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직업도 가정주부에서 한의사, 교사 등 다양하고 자녀도 초2에서 고1까지 폭넓지만 '부채의 짐에서 벗어나려는 것과 불안감 없는 검소한 미래설계'에서 만큼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빚 때문에 몇 년씩 스트레스, 사람 사는 게 아니죠"다른 소모임들과 마찬가지로 생활협동조합이나 대안학교 등을 통해 친환경 소비나 대안 삶에 익숙한 그들도 '내 집 마련'을 앞세운 이른바 '대출의 유혹'이나 '재테크 스트레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2006년 직장도 그만두고 과감히 집을 판 뒤 전세살이를 하고 있는 이유선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유선: "가계부 모임 하면서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취미 모임에서 시청을 무슨 동으로 옮길지도 모른다는 아줌마들 수다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하더라고요.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그 얘긴 벌써 몇 십 년 전부터 나왔다고 말도 안 된다고 그래요."
조주연: "그럴 때 부동산에서 어디어디 땅 있다고 전화 오면 혹하지 않아요?"
이유선: "재테크 스트레스가 그런 얘기에 관심 갖게 해요. 2006년 회사 그만 둘 때도 주변에서 걱정하더라고요. 맞벌이 하다 외벌이하면 생활이 되겠느냐고요."
배일영: "전 4년 전에 집 팔아 부채 갚는 게 낫겠다싶었는데 친정엄마가 말렸어요. 지금 와서 그때 팔았어야 했는데, 후회해요. 주변 시선 때문에 내 판단대로 못 하겠더라고요. 주변에서 뭐라고 하면 '그런가?' 싶죠."
이유선: "저는 집 팔고 전세살이하고 있어요. 엄마는 '2년마다 집 구하며 이사 다니기 힘들다' 걱정하셨죠. 지금 경제 활동도 하지 않아 더 '강박'으로 다가와요. 노후가 길어져 돈 쓸 기간도 늘어났잖아요. 아이 아빠가 '10억은 있어야 편안한 노후 보낸다'고 했을 때 직장 다닐 때라 나랑 상관없는 얘기라 생각했는데, 첫 아이가 중학교 갈 때 되니 실감하게 돼요."
제윤경:
"'노후자금 10억'은 과장된 얘기예요. 10억 있다고 40년 동안 일 안 하고 살 수 있나요? 또 미래가를 지나치게 높게 반영해 공포를 조장하고 있어요. 자녀들이 독립하면 노후에 쓸 돈은 사실 큰돈이 아니에요. 지금 9억 원이면 퇴직 후에 한 달 90만 원 정도 쓸 돈이에요. 9억 모으려고 지금 무리해서 재테크할 게 아니라 (은퇴 후에도) 한 달 90만 원 정도 벌 능력을 키우는 게 낫죠."
이들에게 가장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는 역시 과도한 빚이었다. 손재주가 많아 여기저기 취미활동이 많은 이경재씨 역시 한동안 빚에 시달린 경험이 있었다.
이경재: "중압감, 하니 떠오르는 게 있어요. 집을 짓다보니 큰 돈을 빌리게 됐는데 2008년 말 환율, 이자가 막 오르니까 부담감이 엄청나더라고요. 평소 주식이나 CMA도 안 했는데, 그때는 외국 유가, 금값에도 민감해질 정도로 서너 달 엄청 시달렸죠. 이게 다 언론 탓이에요. '대출도 자산'이란 식으로 대출 1억 정도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잖아요. 어릴 때 아버지 사업 실패 경험 때문에 빚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결혼생활 10년 하면서 무뎌진 것 같아요. 빚 때문에 몇 년씩 스트레스 받는 거, 사람 사는 게 아니에요."
제윤경: "저도 IMF 때 큰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어요. 난 집을 날렸는데 아파트를 헐값에 사는 사람들 보면 너무 배가 아픈 거예요." (이구동성으로 '맞아 맞아') "그때 다른 데 관심을 돌렸기에 망정이지 또 어디 집 사려고 달려들었을 거예요."
조주연: "예전에 동네 아줌마들 모이기만 하면 누군 어디어디 집 샀다더라, 하며 서로 빚 내서 집 사는 일이 종교처럼 전파된 적이 있어요. 대부분 남편이 은행에서 일해 대출 받기도 쉬웠는데, 지금 다들 어떻게 됐는지…."
'약발' 떨어지면 '한 방' 얘기에 솔깃하기도뒤늦게 모임에 합류한 김종숙씨는 빚은 없지만 상대적 빈곤감이 오히려 스트레스다.
김종숙: "가진 게 없으니 부채도 없어 그런 스트레스는 없어요. 대신 요즘 상대적 빈곤감을 크게 느끼고 있어요. 우리 사는 빌라 바로 뒤에 래미안 2000세대 단지가 들어왔는데, 안에 수영장이 있는 거예요. 보나마나 아파트 주민들만 이용할 텐데, 괜히 우리 아이가 거기서 수영하자고 할까봐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아파트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만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집을 가지고 싶지 않을 때 들어와서 그렇지. 그런걸 보면 절대적 빈곤감은 나라도 100% 구제 못한다고 하는데 상대적 빈곤감은 가치관만으로 어느 정도 극복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윤경: "포털에 '2000만 원 갖고 20억 만들기' 같은 글들은 사행성을 조장하는 유해성 정보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치관이 나약한 대부분 사람들이 거기에 휩쓸려서 무리해서 재테크 하게 만들죠."
이경재: "재무상담 받고나면 갑자기 마음이 놓여요. 적자 인생에서 흑자 인생 되겠다 싶으니까 마음이 편해져요. 그런데 아직 제대로 실천 못하고 있으니까 약발 떨어지면 '한 방' 얘기 나오면 귀에 쏙 들어와요. 요즘 '보험 로또' 얘기 많아요. 암 한 방이면 인생 역전이라나."
배일영: "교육도 그래요. 미래 불안감 때문에 아이들을 더 보채게 돼요. 대안학교를 보내고 있지만 동료들과 얘기 나눌 때는 '약발' 받다가도 초창기에는 요즘 대학 잘 간 주변 아이들 보면 부러움이 들기도 해요. 어학연수를 보낼까 잠깐 흔들리다가도, 우리 아이들은 달리 살지 모른다, 88만원 세대로 살 수 있다는 걸 차라리 받아들이고 아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집 털고 나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졌어요"에듀머니 재무상담사들은 개별적으로 소모임 회원들의 가계 건전성 상태를 점검해 과도한 부채와 불필요한 소비 지출을 줄이도록 하고 있다. 어린이집 교사인 유성희(41)씨는 재무상담 뒤 '내집마련' 부담을 털어버렸다.
유성희: "저도 재무상담 전엔 불안했어요. 수입 지출이 불안하고 전세 옮겨 다니며 집살까 고민했죠. 그런데 집은 당분간 안 사겠다고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내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아지더라고요. 학자금도 막연히 불안했는데 적금을 들어 정리하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지면서 돈도 쓰고 싶어져요."
이경재: "저도 집 팔고 나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더라고요. 취미 활동도 맘대로 하게 되고 노후도 과도하게 걱정 안 하게 됐어요."
유성희: "정말 놀라운 변화예요. '내 인생에서 집이 없을 수도 있다'고 집을 털고 나니까 소소하게 쓰고 싶은 게 많아졌어요. 화장품도 많이 사고 이렇게 명절 선물도 돌리고."
이경재: "그래서 얼굴이 예뻐졌구나." (웃음)
삶의 질까지 포기한 '내 집 마련'의 함정김종숙:
"제가 아는 친구는 중학생 둘에 초등학생 늦둥이까지 있는데 상계동에 방 2개짜리 20평 아파트에 살아요. 아파트 값이 올라 2억 간다니까 집 담보로 생활비 대출도 1억이나 받아 썼어요. 아파트 앞에 뭐가 생긴다더라. 아파트값 더 오른단 얘기가 벌써 10년째예요. 공간 협소함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세금 낼 거 다 내고 집에 메여 사는 게 안쓰러워 집 팔고 외곽에 전세 얻어 쾌적하게 살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부채 없이 집을 소유하더라도 가족이 살 생각이 아닌 투자수단으로 생각하면 삶의 질 떨어지는 거 같아요."
제윤경: "그게 바로 신용의 함정이에요. 실거래가도 잘 모르면서 집값으로 대출 받을 수 있다니 빌려 쓰는 거예요. 가끔 방송에서 소개해주는 사람들 보면 아찔할 때도 많아요. 남편이 실직하고 원금 상환 시기가 도래한 빚이 1억 2천인데 많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마음 속에서 빚을 집값으로 상쇄시켜버린 거죠. 어떤 분은 3억짜리 집에 1억이 빚인데 또 빚져서 5억짜리 집 사려고 해요. 건설사 무이자 대출을 혜택으로 생각하고 잔금 전에 전매하겠다는 생각인데 그게 팔리나요. 자기 '프레임'에 갇혀 사는 거죠."
김종숙: "제 친구도 친정 부모나 주변에서 '무슨 일 있어도 집 팔지 마라'고 그래요."
제윤경: "빚은 소도 잡아먹는다는 신념을 가진 부모들이 자식들 2~3억 빚에는 너무 관대한 거 아닌가요."
김종숙: "그만큼 우리 부모님들의 '부동산 불패신화'가 강한 거겠죠."
미래 불안과 사회적 관계 해체가 '재테크 부담' 키워이들은 이런 여러가지 문제들의 해법을 지금까지 읽은 책에서 찾곤 한다. 이날도 마찬가지여서 행복을 긍정 심리학 관점에서 다룬 책 <HOW TO be HAPPY-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가 이날 지침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김종숙: "이번에 읽은 책에도 '사회적 보험' 얘기가 나오잖아요. 인간관계나 네트워크를 말하는 건데 그게 악화된 걸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상조회사인 것 같아요. 예전엔 결혼식엔 안 가도 장례식엔 꼭 가는 미덕이 있었잖아요. 그런 게 해체되면서 더 불안해진 것 같아요."
제윤경: "과도한 공포심 유발 마케팅이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어요. 다른 소모임에서도 신용카드 안 쓰기 등을 통해 돈을 안 쓰니까 행복해졌다고들 많이 말해요. 더 벌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중요해요."
이경재: "내가 상황을 장악하고 있으면 불안감도 없어져요. 옛날엔 불안감이 있더라도 이웃끼리 서로 얘기하면서 편해졌는데 요즘 옆집이랑 잘 얘기 안 하잖아요."
제윤경: "중산층이 월 300만 원 정도는 써야 한다는 의식부터 깨야 해요. 소비가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아니니까요. 우리 아이와 1주일 돈 안 쓰고 살아보기 해 본 적이 있는데 아이 반응도 괜찮았어요. 적은 돈으로 행복할 수 있는 법을 배운다면 극단적으로 불행해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김종숙: "아이에게 예산 세우게 하고 교통비까지 포함해 한 달 용돈 7만 원 정도를 줬더니 네이버 블로그에 답변 달고 100원씩 모아 아이티 등에 기부까지 하더라고요. 또 광고 노출이 얼마나 청소년 소비를 조장하는지 실감해요. 우린 TV 없이 7~8년 살았는데 아이가 소비에 관심도 없어요. 지금 몇 년째 탄 마티즈도 잘 타서 자기 물려달라고 해요. 요즘 아이들과 가치 기준이 다른 거죠".
제윤경: "책에도 행복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하잖아요. 막연한 미래를 위해 오늘 행복을 빼앗기지 말라는 얘기예요. 오늘 행복한 적 없는 사람이 미래에 행복할 수 없는 거죠."
배일영: "돈 가진 게 행복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됐는데 가려운 곳을 긁어줬어요.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도 네트워크가 해체되며 고립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윤경: "책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사회적 관계에 투자하라, 사회적 안전망이 저축이라는 거죠. 돈을 절대적으로 적게 쓰라는 게 아니라 통제력을 갖는 게 중요해요. 살 가치 있는 거에는 쓰자, 이렇게 가치 지향이 될 때 몰입하기도 훨씬 쉬워요."
에듀머니에서 운영하는 '착한 가계부 소모임'은 고양자유학교 소모임 외에도 고양한살림 모임, 가정재무관리사 모임, 덕양햇살생협 모임, 마포희망통장 모임 등 중산층 대상 소모임과 각 지역 자활센터를 통한 서민층 소모임으로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그렇지만 억대 대출 낀 내 집 마련이 미덕이고 오히려 '적금 들어 1억 모으기'가 비정상 취급을 받는 사회에서 이들은 여전히 소수일 뿐이다. 이 모임 외에도 취미 활동이 많은 이경재씨가 나름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거꾸로 이 세계가 전부는 아니겠지, 대다수는 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다른 모임에 나가면서 느껴요. 그래야 방송이나 언론에서 나온 상황이 저래서 그렇게 다르구나, 괴리가 줄어 스트레스 안 받게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