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내려와 빈 집 한 채를 빌리기로 했을 때 주인이 말했다. '내'집으로 알고 잘 고쳐서 잘 살아보시라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래서 없는 돈은 생각 안 하고 있는 돈만 박박 긁어 자재를 사다가 장장 두 달여에 걸쳐 낮밤 가리지 않고 수리를 했다.
돈이 모자라서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개조하지도 못하고 푸세식 상태 그대로 두었지만, 실내에 목욕 시설을 갖추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그만하면 훌륭하다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말했다. 그 돈이면 시골집 한 채 사고도 남는데 무슨 '개지랄'한다고 금쪽같은 돈을 처발라 가며 남의 집 수리를 하느냐고.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남의 집을 내 집처럼 쓸 수 있다면 그게 훨씬 이익이 많은 일 아니겠느냐고, 집이 없는 사람은 저승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면이나 모를까 그게 아닌 바에야 굳이 내 집이어야 할 까닭은 없는 거 아니냐고 큰소리 땅땅 쳤다.
그게 12년 전의 일이었다. 2~3년쯤 뒤에 서해안 고속도로 공사가 마무리단계에 이르면서 마을 뒤편으로 휴게소가 들어선다는 발표가 나오고, 인근 고인돌 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등 발표가 잇따르면서 땅값이 들썩거렸다. 내가 땅이 없는 까닭에 실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런 이야기가 자주 들렸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사는 집이 팔렸다는 폭탄 같은 이야기가 귓속을 뚫었다. 마을의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집을 샀다고, 한 달 내에 비워달라고 했다.
이게 뭔 정신나간 소리냐? '내' 집으로 알고 잘 쓰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러나 그는 옛 주인이 아니었다. 옛 주인은 만나볼 수도 없었다. 어디에 사는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긴 그를 만나서 내가 뭘 어떻게 해볼 수 있으랴. 그는 '내' 집으로 알고 잘 사시라는 말을 했을 뿐 돈을 들여서 집을 수리한 뒤에 살라고 한 적이 없었다.
빌어먹을. 무슨 이런 '지랄'같은 일이 다 있는 거냐 이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나도 모르게 샀다고 하는 새 주인에게 말했다. 한 달 내에 비워줄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비워주기는 비워주겠다. 그러나 한 달은 터무니없다. 생각해 보라. 내가 명색이 사람인데, 사람이 하늘을 그냥 지붕으로 삼고 이삿짐을 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몇 달이 걸릴 지 몇 년이 걸릴 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집을 비워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
사정을 하지는 않았다. 애원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통보하는 식으로 말했다. 그가 내게 통보하는 식의 말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통하면 통하고 안 통하면 말겠다는 뭐 그런 막가파식 심사였을 것이다. 뜻밖에도 그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집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집이 필요해서 한 달 내에 비워달라는 그런 잔인한 통보를 한 것이 아니었다. 철거할 예정이었다.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관행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으레 하는 그런 방식의 통보를 내게 했던 것일 뿐이었다.
아무튼 2년 반, 3년 가까이 걸렸다. 집을 비워주기까지는. 처음에는 고창을 아예 떠나 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뭐냐 이게. 기껏 고향이라고 찾아왔더니 겨우 요런 정도란 말이냐, 하는 뭐 그런 단순무식한 감정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 단순무식이 내부에서 핵분열을 일으켰다. 아니지, 내가 왜 떠나?
그리하여 부산으로, 울산으로, 대전, 광주, 여수 등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쫓아다녔다.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가기 어려운 도시에 있을 때도 해보지 못한 어이없는 각오와 비장미 같은 것이 내게 생겨 있었다. 오직 하나 집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야말로 혈안이 되어 공사현장을 쫓아다녔다. 야간작업이든 철야든 건수만 있으면 무조건 참여했고, 잠자리는 사용주가 여관 같은 데를 마련해주면 그것을 이용하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을 찾았다.
헌책방에서 오백 원이나 천 원을 주고 구입한 구닥다리 문고판 책 한 권을 주머니에 넣고 가서 책장을 몇 번 넘기다가 졸리면 사르르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몇 번 하면 아침이었다. 물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좇기도 하고, 만나서 반갑다고 얼싸안고 동동거리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엉엉 소리내어 우는 사람들을 오랜 시간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게 진짜 노숙이다, 자기를 잃어버리고자 하는 노숙은 노숙도 아니다 어쩌고 하는 싸구려 철학을 완성(?)하기도 했으니, 손해는 하나도 없고 오직 이익만 있는 노숙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3년을 하루같이 그런 서정적인 노숙만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의도하지 않은 피비린내와 욕지거리가 새로운 취미처럼 내게 붙어 버렸다. 담배 한 갑만 사 달라는 '진짜 노숙인'에게 걸려 담배를 사 주고, 밥도 사 달라 해서 밥을 사 주고, 기왕이면 술도 한 잔 사 달라 해서 술까지 사 주었지만, 그런 내가 '호구'로 보였던지 녀석은 아예 제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벗겨먹으려 하고 있었다. 시비가 붙었고, 숫자에서 이미 열세인 나는 선방불패라고 눈에 띄는 자전거를 두 손으로 치켜들고 타잔처럼 소리소리 질러가며 휘둘러대다가 결국 자전거 값을 물어주고 말았다.
또 있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이었다. 할머니가 서빙을 하시는 식당이었다. 옆 자리에서 한 남자가 할머니를 놀리고 있었다. 그 나이에 이런 일을 하려고 세상에 태어났느냐는 둥, 아직도 이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으냐는 둥,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이 사내의 입에서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그때 사내를 노려보았던가 어쨌던가, 그는 분명 나보다도 한참 젊어 보였고, 할머니는 분명 내 어머니의 연배로 보였다. 어쨌든 사내가 나를 노려보며 지껄이고 있었다. "뭘 봐." 그 소리에 내가 말했다. "너는 왜 날 보냐."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서며 또 한 소리를 날렸다. "뭐? 이런 겁대가리를 상실한", 어쩌고 하는 소리에 나도 벌떡 일어섰고, 그리고 한 소리를 날렸다. "너 아주 쓰레기구나. 쓰레기가 사람 행세를 하면 안 되지." 소리와 동시에 나는 아마 그가 마시던 중인 소주병을 나꿔채 들고 휘둘렀을 것이다.
객지를 떠도는 자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철학이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법이다. 떠돌면서 가진 것도 없다면 그 철학은 더욱 공고해지는 법이다.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은 행복이지만, 행복하다고 해서 무릎까지 꿇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무릎을 꿇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먼저 쳐야 하는 것이 손자의 병법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선방불패라고 한다. 선방불패, 이런 막가파식 철학을 내게 심어준 것은 대한민국 형법 가운데 명예훼손 관련 조항이었다.
도둑을 도둑이라고 소리쳤다가 도둑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둥으로 고소를 당해 곤욕을 치른 내게 그것이 생겨 있었다. 선방불패, 어쭙잖게 예의 차린다고 도둑이다 뭐다 소리칠 일이 아니라 일단 '멱'을 따라. 그러면 도둑이 감히 명예 운운할 틈이 없어 무릎을 꿇게 된다. 물론 내가 이런 식의 이론까지 세세하게 정립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날 무엇을 생각하고 어쩔 틈도 없이 그냥 그 사내의 탁자에 놓인 소주병을 치켜들고 있었고, 그리고 휘둘렀다.
그는 이 세 개가 부러졌고, 턱밑이 찢어졌다. 내 죄가 크다면, 수갑을 차고 재판을 받을 생각을 나는 이미 하고 있었다. 피해자를 자임하는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이 부러진 거, 턱주가리 찢어진 거, 그것은 내가 원상복귀 해준다. 그러나 위자료니 뭐니 그따위 찌질한 타협조건을 내건다면 응하지 않을 거다. 네가 반사회적인 짓을 한 것은 분명하고, 따라서 네 신체를 훼손한 죄값으로 내가 치러야 할 것은 잘해야 3개월, 그것도 집행유예일 거다." 단호했달까, 결연했달까, 그는 아마 그것을 읽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경찰관들도 피해자인 그를 전혀 동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결국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서에 사인을 했고, 나는 위자료나 피해보상비가 아닌 술값 그리고 고깃값 명목으로 그의 주머니를 살짝 채워주었다. 그 바람에 내가 집을 구하는 일은 적어도 두 달 정도 연장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저렇게,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내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빈 집 하나를 발견하고 계약금을 치르던 날, 나는 당연하게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집 주인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집이라 해서 정이 떨어졌다고, 그래서 10년도 넘게 비워두었고, 때문에 집값은 따로 셈하지 않고 땅값만 받는다고 하는, 한 마디로 말해서 횡재도 그런 횡재가 없다 싶은 집이었다. 대지가 무려 오백여섯 평이나 되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대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기도 했다.
서울에 있을 때 사업을 한답시고 빌린 사무실 면적이 20평을 조금 넘었을 뿐이고, 스무 번도 넘게 이사를 하는 동안 5평이 넘는 개인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였다. 시골에 와서 맨 처음 빌린 집도 대지와 건평 합해서 50평 남짓이었다. 그런 내가 빌린 것도 아니고 온전하게 '내 것'으로 506평이나 되는 거대한 땅을 갖게 된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는 그런 기쁨은 그러나 아주 짧았다. 덜컥 겁이 나고 있었다. 이 많은 땅을 어떻게 관리하지? 걱정은 관념이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그동안 새빠지게 벌어놓은 돈으로 집값 잔금을 치르고 나니 손에 남는 게 한푼도 없는 것이었다. 10년도 넘게 비워둔 집이라서 방은 방이 아니었고, 마당을 넘어 토방에까지 대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것을 정비해서 집다운 집으로 만들려면 집값을 훨씬 넘는 자금이 따로 필요했다.
무식하게도 코앞에 집값만 생각했지 그 너머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나, 다시 공사현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석 달 정도 공사장에서 보내고, 그 돈으로 석 달 정도 집에서 이것저것 뜯어내거나 붙이거나 땅을 파거나 잡목을 뽑아내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공사장으로, 얼마간의 돈이 들어오면 다시 집으로, 이렇게 오락가락 주먹구구식으로 화장실을 만들고 목욕탕을 만들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고 꽃씨를 뿌리기 3년, 그리고 또 1년, 이제 됐다, 한숨 돌려도 되겠다 하는 생각으로 취미생활을 좀 해보자고 광주에서 돌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있을 즈음 어머니가 중증치매 선고를 받았다.
내가 만일 이런 집이나마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어찌 되었을까. 이즈음 가만히 돌아보면 어머니와 함께 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동안 그렇게도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감쪽같이 흘러간 십 년이었다. 무엇인가 크게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큰 것을 얻은 까닭에 아직 그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6평이나 되는 땅이 내 관리 하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철철이 다른 꽃을 피우고, 철철이 다른 향기를 뿜어내는, 그 많은 식물들을 심고 뽑고 가꾸는 손은 다른 그 누구의 손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의 손이니까.
덧붙이는 글 |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