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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세암 중 한 장면. 외할머니가 계시던 문수사에 꼭 이와 같은 인상의 큰스님이 계셨더랬다.
영화 오세암 중 한 장면. 외할머니가 계시던 문수사에 꼭 이와 같은 인상의 큰스님이 계셨더랬다. ⓒ 김수복

1990년판 영화 <오세암>을 비디오로 보았다. 두 번, 세 번을 거푸 보았다. 어머니가 원하셨다. 한 번 더 보자고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영화가 끝났을 때 다만 한 마디 "어매, 어디 가버렸네" 하셨을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짧은 한 마디를 다시 보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렇다. 어머니는 영화든 텔레비전 연속극이든 끝났을 때 끝났다고 하지 않고 "어매, 어디 가버렸네" 하신다.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뭔가 파문이 일었다는 증거다. 영화든 연속극이든 감동이 없을 경우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 감동이 있을 때는 끝나버린 것이 아쉬워서 '가 버렸다'고 섭섭해 하신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머니는 영화 <오세암>을 보면서도 영화 <오세암>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치매 선고를 받은 이후 어머니에게 이야기란 전체의 내용이 아니라 한 장의 그림, 한 사람의 얼굴, 한순간의 풍경이 중요했다. 거기에서 어머니는 당신의 오래 전 기억을 불현듯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실은 '못된' 아들의 못된 의도이기도 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란 반쪽의 삶에 불과하다는, 그래서 어떻게든 어머니의 삭제된(?) 과거를 복원해보고자 하는 그런 못된 의도 말이다.

 

영화 <오세암>이 보여주는 풍경은 다양하지만, 어머니의 기억을 재생시켜주는 소품으로 쓸 만한 것은 세 가지가 있었다. 후덕한 인상의 스님(조상건분)과 헐벗은 관목들, 그리고 커다란 저수지. 이 세 가지 중에 후덕한 인상의 스님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큰스님 한 분과 어쩌면 그리도 눈매며 턱선이며 목소리와 걸음걸이가 닮아 보이는지.

 

"나쁜 사람들."

 

어머니는 후덕한 인상의 스님이 화면에 비칠 때마다 한 마디씩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그 짧은 한 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외할머니와 일가친척들이 어머니에게는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왜? 누가? 왜 나쁜데? 등등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머니의 반응은 다양했다. 아예 못 들었다는 듯 무응답이기도 하고, 누가 옆에서 뭐라고 지껄이냐는 투로 힐끗 쳐다보기도 하고, "아이 나쁜 사람들이제"하고 설명 아닌 설명을 간단하게 붙이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못된 아들인 나는 어머니의 영화 관람을 본격적으로 방해하고 나서는 것이다.

 

"엄마는 몇 살 때부터 문수사에 따라가기 시작했어?"

"몰라.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학교에서 히라가나 배우기 싫어서?"

"아 그랬다니께, 글자도 오살허게 꼬부랑꼬부랑 옹삭스럽게 생긴 것을."

 

오래 전부터 들어온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분명하게 있었던 일이라고 믿어도 될 것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70여 년 전쯤. 외할머니가 장성에서 고창에 있는 문수사를 다녔고, 그때마다 어머니가 따라 나섰다. 장성에는 백양사라는 커다란 절이 있는데도 굳이 솔재라는 험준한 고개를 넘어 고창의 작은 문수사를 찾은 이유는 첫째 거기에 '그 스님'이 계셨기 때문이고, 둘째 사람이 적어 '절간다웠기' 때문이었다고 게 어머니의 오래 전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그 스님을 "아버지보다도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는 왜 당신의 딸을 학교에 보내고 있으면서도 결석을 밥 먹듯이 하는 꼴을 그대로 봐주고 있었던 것일까. 일본말 공부가 싫다고 하는 딸의 의사를 존중해서? 아니면 학교 공부라는 것 자체에 별다른 신뢰가 없어서? 그것도 아니면 그저 '딸년'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문제의 답을 내기는 쉽지 않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신 지도 벌써 사십 년이 넘었고, 어머니는 학교에 안 가고 산중의 절을 찾아가는 게 학교에 있는 것보다 나았다는 기억만을 갖고 계시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외할머니는 그때 당신의 딸을 불교에 입문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하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딸과 함께 출가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학교를 보내면서도 다니기 싫다고 하는 딸의 의사를 그렇게까지 착실하게 존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머니의 오래 전 말씀에 따르면 외할머니는 일본인을 아주 싫어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일본인을 좋아해서 많은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었고 집으로 자주 초대하기도 했지만 외할머니는 전혀 달랐다. 일본인이 집에 손님으로 다녀간 다음 날이면 외할머니는 으레 집을 나와 문수사를 찾았다. 마치 몸에 밴 어떤 냄새를 향불에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약속처럼 습관적으로 절을 찾아가곤 했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의 그런 태도에서 영향을 받았음인지 어머니 또한 일본인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있어 일본인은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 사람'도 아닌 그저 '일본놈'일 뿐이었다. 가끔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셨다. 어머니의 그러한 말투에는 일제를 거친 대다수 어른들이 갖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감정과는 성격이 다른 독특한 증오심이 배어 있었다.

 

이 독특한 증오심의 기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는 일찍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유별나다는 생각이나 어렴풋이 가끔 해보았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만일 치매라고 하는 몹쓸 것에게 기억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어머니와 둘이 아주 가깝게 지내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이 문제를 다른 각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보는 계기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대체로 봐서 아마 6개월여 전, 그러니까 작년 가을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 무렵의 언제인가부터 어머니는 특정한 단어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 무렵에는 증세가 그야말로 중증이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당신이 무엇을 보는지 전혀 의식이 없던 때였다. 시시각각 바뀌는 그림이나 그저 무연하게 쳐다볼 뿐 웃지도 않았고 찡그리지도 않았고 말도 한 마디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뉴스에서 강간이라든가 성폭력 같은 단어가 나오면 금방 알아듣고 진저리를 치면서 한 마디 중얼거리시는 것이었다.

 

"저런 찢어죽일 놈들."

 

어머니의 그런 격렬한 반응을 접하면서도 나는 그저 여성으로서의 어떤 동질감을 막연하게나마 느끼시나보다, 여겼을 뿐 일본인에 대한 어머니의 증오심과 결부시켜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 <오세암>을 보면서 불현듯 "나쁜 사람들"하시는 어머니의 그 말 한 마디가 순식간에 여러 가지 지난 일들을 한 묶음으로 엮어주고 있었다.

 

물론 구체적인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이 되면서 머릿속에 한 장의 추상화가 그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추상은 강렬했다. 그것은 마치 방금 전에 날아가 버린 나비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제3자에게 실증해 보일 수는 없어도 나 자신은 칼 맞은 자국처럼 선연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의 그것 같았다.

 

그랬다. 영화 <오세암>에서 불현듯 "나쁜 사람들"을 떠올린 어머니는 분명 당신의 소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이내 결혼을 하고 온갖 소문에 시달리던 젊은 아줌마의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었다. 열두 살 나이에 큰댁에 맡겨졌다가 이듬해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어머니는 아마 불교든 뭐든 종교와는 그리 큰 인연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외할머니께서 어린 딸을 큰댁에 맡기고 혼자 산으로 들어갔을 까닭이 없다.

 

사실로 나는 어머니가 무슨 신이라든가 우상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절에 계시는 까닭에 가끔 찾아가기는 해도,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큰스님에게 예를 갖추기는 해도 다른 아줌마들처럼 부처님 앞에서 열성적으로 절을 하는 법은 없었다. 마을에 무당이 찾아와서 굿을 할 때도 다른 엄마들은 두 손을 싹싹 비벼가며 열심히 무엇인가를 빌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저 꼿꼿하게 선 채로 구경이나 할 뿐이었고, 새마을 운동 이후 마을에 교회 바람이 불었을 때도 어머니는 구경으로나마 길을 나서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출가를 결심한 외할머니는 열두 살 어린 딸아이를 큰댁에 맡겼다. 적당한 혼처가 있거든 처분하라는 권한도 아마 주었을 터이었다. 딸을 맡기고 홀로 문수사에 공양주 보살로 들어가신 외할머니의 이러한 결정은 그 뒤로 외할머니 당신에게 아주 커다란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중놈에게 눈이 멀어 어린 딸년을 내버린 여자."

 

그 즈음 외할머니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을 한 마디로 짧게 정리하자면 아마 이쯤 될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한참인 스무 살이 넘어서야 겨우 외할머니에게 이런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전에는 다만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나 어렴풋이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술이 몹시 취하면 어머니에게 으레 던지는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의 뜻을 나로서는 도저히 해독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조금이라도 다른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외할머니가 더 이상 공양주 보살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집으로 모셔다가 임종까지 지켜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 당신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떠도는 소문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주위를 떠도는 그 소문 자체가 고통스러울 때 어머니를 상대로 푸닥거리를 하듯이 한 마디 툭툭 던지곤 했던 것일 터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일방적인 푸닥거리를 정면으로 맞받아친 적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빠져 나가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먼 데를 응시하고 있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일어서곤 할 뿐이었다. 마치 입이 있어도 그 입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듯이,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절대로 안 되는 어떤 영역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듯이 그렇게.

 

여자의 열두 살이라는 것은, 어른들의 눈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시기일 수도 있겠지만, 천지만물을 주관하는 그 어떤 존재가 있어 그 눈으로 본다면 가장 순수하게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 나이일 것이다. 그러니까 열두 살 소녀의 눈으로 본 어머니 당신의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바람기 비슷한 이유로 자신을 버렸다는 기미가 보였다면 평생을 두고 그 어머니를 저주하거나 최소한 외면했을 거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러나,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오시면 저 멀리 아마도 육칠백 미터는 떨어진 논둑길에서도 알아보고 아들들에게 "어매. 외할머니 오신다, 얼른 가봐라, 잉?"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 <오세암>에서 어머니가 본 "나쁜 사람들"이란 사건의 내용도 모르면서 바람난 여자라는 식의 소문을 내고 다닌 얼굴 없는 무수한 이웃과 일가친척들을 말함이었던 셈이다.

 

강간이나 성폭력 같은 단어를 접하면 치를 떨며 "찢어죽일 놈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일본인을 '일본인'도 '일본 사람'도 아닌 '일본놈'이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열두 살 어린 딸을 버리듯이 친척에게 맡기고 도망치듯이 깊은 산속의 절간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외할머니, 이 세 종류의 서사를 한데 섞어 그 핵을 빼내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이야기가 완성되겠지만, 거기까지는 아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다만 치매라는 이름 저편에서 일상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진실의 일단이나마 내게 전해주시는 어머니에게 마음 깊은 감사를 드리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일본놈#기억#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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