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청빈의 사상- 글 : 나카노 고지- 옮긴이 : 서석연- 펴낸곳 : 자유문학사 (1993.5.15.)- 판이 끊어짐 (1) 좋은 삶을 찾는 길엊저녁 날씨가 차츰 쌀쌀해지더니 그예 얼음비가 내렸고, 밤에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개나리며 봄꽃이며 가득가득 피어나겠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 온 동네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사월에도 눈이 내렸고, 강원도 양구에서 군대살이를 할 적에는 부처님오신날까지 눈이 내렸습니다. 남녘땅에서는 삼월에 찾아오는 눈이란 드물지 않은 손님이요, 북녘땅에서는 더 늦게까지 눈손님이 찾아올 테지요.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집에만 둘 수 없기에 바깥마실을 나왔으나 얼음비나 눈이 내리기 때문에 걸리지는 못합니다. 우산을 받고 아이를 안으며 걷습니다. 아이는 비나 눈이 올 때에는 걸리지 않는 줄 아는지 찰싹 안긴 채 우산대를 한손으로 잡으면서 놉니다. 어스름이 깔리는 골목을 함께 거닐며 사진 몇 장 찍어 보고자 하는데, 날도 저물고 한손에는 아이를 안고 있으니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볍지 않은 사진기를 들고 숨을 참으며 아이가 가만히 있는 때를 살펴 찍기란 참 팔 떨어질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어스름 골목은 어스름 골목대로 멋이 있고, 눈발 흩날리는 어스름 골목은 눈발 흩날리는 어스름 골목대로 삶이 있습니다. 누구나 달콤한 삶과 함께 쓰디쓴 삶이 찾아올 터이며, 고단한 삶과 맞물려 홀가분한 삶을 마주할 터이고, 얄궂은 삶에 뒤잇는 반가운 삶을 즐길 테지요.
골목마실을 하노라면 골목동네에서도 온갖 갈래 집을 만납니다. 넓은 마당이나 뜰을 마련한 부잣집을 만납니다. 손바닥만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꽃밭이나 텃밭을 일구고 감나무나 대추나무나 고욤나무나 포도나무나 오동나무 들을 심은 조금은 넉넉한 살림집을 만납니다. 옛 기와를 고스란히 살린 살림집이나 개량 기와를 얹은 살림집을 만납니다. 골목 담벼락을 따라 꽃그릇을 주욱 마련한 집을 만나고, 담벼락 한켠에 시멘트를 섞어 삼십 센티미터나 오십 센티미터 너비로 죽 만들어 놓은 텃밭이나 꽃밭이 딸린 집을 만납니다. 꽃그릇 하나 놓을 수 없도록 비좁은 샛골목으로 이어진 데에서 다닥다닥 붙은 채 살아가는 한칸집을 만납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한칸집이라 할지라도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골목을 따라 빨랫줄을 드리우기 마련입니다. 전봇대와 전봇대를 잇고, 옥상 작은 틈에 어떻게든 빨랫대를 세워 서로 조금씩 자리를 나누어 해바라기 빨래를 넣어 놓습니다. 겨우 한 사람 올라갈 만한 구멍을 뚫고 사다리를 놓아 옥상으로 올라가고, 지붕 한 끝과 다른 끝에 장대를 박아 놓습니다. 더욱이 이런 좁은 옥상에 꽃그릇 한둘쯤은 으레 올려놓습니다.
하루이틀 사흘나흘 동네를 돌고 다시 돌고 거듭 도는 동안, 지난번에 보거나 마주한 모습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지난번에는 보지 못한 새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며 뭉클함을 느낍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모습에 반가움을 느낍니다. 동네마다 고추말리기를 하느라 빠알갛게 물들던 2008년 팔월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창 찍을 모습이 많을 때에 아이와 옆지기 곁에 붙어 지내느라 사진찍기 좋은 때를 가슴으로 삭이며 보냈습니다. 이듬해에도 아이 돌보는 데에 바빠 고추말리기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했습니다. 아마 올해 여름에도 고추말리기 사진을 담기란 퍽 어려운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나 혼자 좋다고 나 혼자 좋을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내 일을 챙긴다면서 식구들 일을 뒷전으로 미룰 수 없으니까요. 함께 살아가는 살붙이라 한다면 함께 웃고 울 만한 일거리와 놀거리를 찾아야 알맞고, 함께 느끼고 함께 보고 함께 헤아리며 함께 부대끼는 삶이어야 조촐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혼인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에는 혼자서 신나게 골목마실을 하고 책방마실을 했겠지요. 사진은 더 많이 찍고 책은 훨씬 많이 읽으며 살아가겠지요. 훌륭하다 싶은 사진을 대단히 많이 일구어 놓았을 테고, 아름답다 싶은 책을 꽤나 많이 머리속에 담고 있었을 테지요. 틀림없이 이와 같이 꾸리는 삶은 이와 같이 꾸리는 삶대로 뜻이 있고 값이 있습니다. 내 꿈을 한껏 펼치면서 내 마음을 그지없이 드높일 수 있으니 알차고 빛나는 삶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알차고 빛나는 삶은 누구와 함께 알차거나 빛날 삶이 될는지요. 내 이웃과 동무 앞에서 어떻게 알차거나 빛날 삶으로 아로새길 수 있을는지요.
아름다운 사진은 참말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멋진 사진은 더없이 멋진 사진입니다. 훌륭한 사진은 그지없이 훌륭한 사진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멋이란 무엇이며 훌륭함이란 무엇인가요. 한 사람이 사랑할 삶에서 우리가 곱다시 껴안으면서 즐기고 나눌 아름다움과 멋과 훌륭함이란 무엇인가요.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우리 바깥에 있을는지요. 멋이란 노상 머나먼 곳에 닿아 있을는지요. 훌륭함이란 홀로 거룩하게 이루어 내는 일인지요.
요사이 우리 옆지기가 뜨개질을 익히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는 바느질로 아이 인형을 셋이나 만들더니, 이제는 뜨개질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옆지기가 바느질을 하든 뜨개질을 하든, 한 번 손에 붙잡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이 일에 꼬박 매달립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 밥때이든 무엇이든 하나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밥차림이나 다른 집살림은 아빠 몫이었지만, 아주 깊이 빠져들며 바느질을 하고 뜨개질을 합니다. 처음에는 엄마한테 막 달라붙던 아이도 이제는 어느새 받아들였는지, 엄마가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면 옆에서 꽤 오랫동안 혼자서 책을 보고 쌓기놀이 들을 합니다. 어제는 새벽 세 시 반까지 뜨개질을 하던데, 한창 뜨개질 맛을 들이고 익힐 때이니 늦도록 마음이 끌리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또한 글쓰기에 폭 빠지는 때라면 새벽 세 시이든 네 시이든 오래오래 글 하나를 붙잡으며 갈고 다듬고 깎고 여미곤 합니다. 누가 읽어 주건 말건 저 스스로 마음에 들 때까지 손질하고 손보고 고쳐씁니다. 한 사람이 읽어 주든 백 사람이 읽어 주든 그다지 마음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흐뭇할 만한 글이어야 하고, 저 스스로 열 해 뒤에도 스스럼없이 사람들 앞에 내보일 만한 글일 뿐 아니라, 제가 읽어서 참 좋다고 느낄 글이 될 때까지 내처 붙잡습니다.
지난 1998년부터 사진을 찍어 오면서, 제 사진감 몇 가지를 놓고 새로 찍고 거듭 찍고 또다시 찍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사진책 몇 권을 묶을 만큼 꽤 대단하거나 멋진 사진은 수두룩하게 있으리라고. 그러나 저로서는 사진책 몇 권을 묶을 만한 대단하거나 멋진 사진을 찍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철철 흘러넘쳐서 마구잡이로 찍지는 않습니다. 제가 찾아다니는 헌책방이 좋고, 제가 살고 있는 골목길이 좋으며, 제가 타고다니는 자전거가 좋은 한편, 옆지기와 함께 키우는 아이가 좋으니까 사진을 찍습니다. 그저 또 찍고 거듭 찍고 새로 찍습니다. 좋기 때문입니다. 늘 마주하면서 좋은 느낌이기에 '오늘은 이런 좋은 느낌이 있네' 하면서 새삼 찍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언제나 곁에 있는 이웃인 헌책방이고 골목길이고 자전거인 까닭에 '이날은 이날대로 이런 느낌이 반갑네' 하면서 신나게 찍습니다. 웃는 아이이든 자는 아이이든 땡깡 부리는 아이이든 밥 먹는 아이이든 조용히 책읽는 아이이든, 어느 모습이든 좋은 우리 아이 삶이기에 줄기차게 사진을 찍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참으로 좋은 책이라고 느끼니까 오래오래 읽습니다. 나와 옆지기한테 좋고, 나중에는 아이한테도 좋으리라는 느낌을 받으니 차곡차곡 갈무리를 해 놓습니다. 서른여섯 해 삶에서 열여덟 해 삶을 책사랑으로 걸어온 길이었기에 저한테 참 좋은 이 책을 혼자 간직하기에 아쉬워 동네 도서관을 열어 놓습니다.
좋은 느낌을 담아 좋은 말을 나누고, 좋은 말을 나누며 좋은 뜻을 북돋웁니다. 좋은 뜻은 좋은 길로 이어지며, 좋은 길은 좋은 삶으로 마무리됩니다.
(2) 좋은 책 하나란<청빈의 사상>이라는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판이 끊어진 지 꽤 오래된 책이라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해 만에 겨우 다시 한 권 만났을 때에 기쁘게 장만한 다음 이웃집에 선물해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헌책방마실에서 이 책이 다시 눈에 뜨이면 기쁜 마음으로 장만해서 제 둘레 고운 이웃한테 선물해 줄 생각입니다.
이웃이나 동무한테 선물해 주는 책이란, 저 스스로 대단히 좋은 책이라고 느끼는 책이어야 합니다. 아니, 저 스스로 대단히 좋은 책이라고 느끼지 않고서는 책 선물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맛을 보거나 맛을 어느 만큼 알지 않고서는 술이든 떡이든 밥이든 선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기쁘게 읽거나 줄거리를 어느 만큼 알지 않고서는 책을 선물할 수 없습니다.
<청빈의 사상>은 일본사람 나카노 코지 님이 쓴 책입니다. 일본 문화와 역사와 철학에 눈길을 두는 외국사람한테 '일본이라는 나라는 예부터 이러한 넋과 얼을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레 지키고 보듬으면서 이어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마련했던 강연을 갈무리해서 엮은 책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하면서 맑고 아름다운 일본사람 넋'을 다루는 책 <청빈의 사상>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는 역사를 억지로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는 자그마한 아름다움 하나를 고맙게 건사하면서 알뜰히 빛내는 나라'라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일본과 이웃한 한국이라는 나라는 '싸움을 벌여 땅뺏기를 해 온 발자취가 역사인 줄 잘못 알고 가르치며 이야기하는' 어설픈 나라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적을 돌아보면, 또 이 나라 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쓰는 교재를 살피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임금님 이름이나 무슨무슨 굵직한 사건사고를 가르칠 뿐입니다. 궁중음식 역사는 있어도 서민음식 역사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궁궐 안쪽에서 오가던 이야기를 놓고는 숱한 연속극을 찍지만, 궁궐 바깥쪽에서 살아가던 이야기를 놓고는 아무런 연속극이 없습니다. 지난날 이 나라에 농사꾼이 95%가 넘었고 고작 5%가 안 되는 이들이 양반이요 신하요 뭐요 하고 했다지만, 우리들은 95%가 넘는 여느 사람들 발자취란 아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95%가 넘는 농사꾼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고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를 아우르는 역사책 가운데 임금과 신하와 궁궐 둘레 이야기 아닌 이야기를 몇 가지나 적바림해 놓았습니까.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아무런 역사가 없다 여기고, 아무런 역사가 없다 여기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무 배울거리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음고리는 2010년에 돌아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문이며 방송이며 책이며 온통 '있는 사람' 이야기일 뿐입니다. '없는 사람'이나 '앗긴 사람'이나 '눌린 사람'이나 '밀린 사람'들, 그러니까, 이 나라를 맨 밑바닥에서 받치면서 꾸려 나가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끝없는 경쟁과 싸움과 순위와 등수와 서열과 연고와 학연과 씨줄과 학벌과 재산과 주식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만 있는 듯 시끄럽습니다. 여느 사람 여느 살림과 여느 골목동네 여느 웃음꽃 눈물꽃에는 아예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청빈의 사상>을 쓴 나카노 고지 님은 일본 옛사람 입을 빌어 이야기합니다. "죽은 뒤에 누구에게 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살아 생전에 주는 것이 좋다(33쪽)." 누구보다도 당신 스스로 일본사람들이 너무 바보스레 살아가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들한테 일본 옛사람 손을 빌어 글을 적바림합니다. "저축하고 착취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나누어 갖는 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린다(204쪽)."
자가용을 몰지 않는 사람들만이 서민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차가 아닌 작은차를 몰고 있다 해서 서민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서민, 곧 '낮은자리에 있는 가난한 사람'은 자가용이 아닌 두 다리를 믿습니다. 기계가 아닌 두 손을 믿습니다. 컴퓨터나 책이나 신문 같은 매체가 아닌 내 머리를 믿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이나 종교나 체육이 아닌 내 가슴을 믿습니다.
일본 옛사람들만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오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한국 옛사람들 또한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왔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 옛사람 가운데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무슨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오고 있었는지를 읽어낼 만한 눈길과 눈썰미와 눈결과 눈매와 눈높이를 추스르는 오늘날 한국사람은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똑똑하고 엄청난 생각이라고 나쁘지 않습니다. 잘나고 멋스러운 생각이라고 못마땅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로서는 똑똑한 생각보다는 티없는 생각이 반갑습니다. 잘난 생각보다는 어여쁜 생각이 반갑습니다. 돈 잘 버는 생각보다는 착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잘 알려진 이름값 높은 생각보다는 수수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진보와 개혁과 보수라는 금을 긋는 생각보다는 맑은 생각이 반갑습니다. 부자 생각보다는 가난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가난한 생각을 고이 섬기며 내 삶으로 삭이면서 즐기고자, 우리 집 살림은 늘 가난뱅이 살림입니다.
(3) 책상맡에 놓고 늘 들추는 책이란책상맡에 놓고 늘 들추는 책이라 한다면 <청빈의 사상>쯤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수선할 때에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벗님으로 삼을 만한 책이라 한다면 <청빈의 사상> 눈높이는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책이 목숨을 얼마 잇지 못하고 판이 끊어진 대목이 몹시 안타깝습니다만, 찬찬히 헤아리면 우리 나라에서 이 같은 맑고 아름다운 책이 널리 잘 팔리기란 아주 힘들구나 싶습니다. 한국땅에서 이 책은 아주 마땅하게도 판이 끊어질 만한 책입니다. 한국땅에서 이 책은 매우 마땅하게도 쉽게 잊혀지고 제대로 안 읽히며 깊이 돌아보고자 하는 사람조차 나오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래도 <즐거운 불편>이나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기도 하는 한국땅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사람 손으로는 아직 <청빈의 사상>이나 <즐거운 불편>이나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을 써내지 못합니다. 우리한테는 아직까지 맑고 아름다운 생각이란 멀디먼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물을 삼키고 콧물을 훌쩍이면서 <청빈의 사상>을 되읽고 곱씹습니다.
[25, 26, 32, 33쪽]
묘슈는 간탐하여 부귀한 자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다. 간탐을 미워한 나머지, 그녀는 부귀한 자는 반드시 어딘가 간탐한 점이 있지 않는가를 의심하고, 가난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바귀하다는 그 자체를 죄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 묘슈는 빈곤 때문에 생기는 불행보다도 부귀가 사람의 마음에 끼치는 해독을 중시하고, 사이비 인간이 되어 부귀한 것보다는 가난하지만 인간다운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 마음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저택을 지니면 그 유지ㆍ관리에 많은 사람을 쓰게 되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종일 마음을 괴롭혀야 한다 … 사람은 소유가 많을수록 마음을 빼앗기고, 그리하여 그 마음은 재물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37, 42, 43, 84쪽] 중요한 것은 돈벌이가 아니다. 칼의 감정에 관한 한 자기들이야말로 으뜸가는 권위자라는 긍지와 자부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으며, 돈에 눈이 멀어서 그 긍지와 자부를 손상시키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내재하는 규율이다 … 일본인은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들도 남들 앞에서 금전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주 멸시하고, 무엇보다도 명예를 존중하며, 고결하게 행동하는 것을 존중했다 …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야 할 것은, 이 나라가 경제 대국이 되었다거나 수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것, 즉 '무형의 인격'에 관한 사항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 료칸은 남들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마음쓰지 않았다. 바로 그 안에 삶의 충족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선경이었는지도 모른다.[59, 176쪽] 먹을 것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포식의 시대에는 먹을 게 있다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굶어죽기 직전의 상태, 즉 끼니를 거르기 일쑤일 때 쌀 석 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 그저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것뿐이라면 아무도 그 사람에게 마음이 쏠리지는 않는다 … 일단 소유욕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소유의 증대에만 관심을 빼앗기고 금전의 노예가 되어, 그밖의 인간의 중요한 일들에 마음이 미치지 못한다.[75, 83, 88∼89쪽] 고독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며,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자기 혼자만의 삶을 보낸 것이다 … 료칸에게는 시와 와카를 짓고 좌선을 하고 불경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속세를 떠난 세계에서 노는 방도였다 …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료칸)는, 지나치게 자신을 책망하는 이에게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입을 다물며, 알려고 하는 이에게는 '공을 쳐 보려 무나'라고 다정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 료칸은 결코 설교 따위를 하지 않고, '오로지 도의로 중생을 감화시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92, 102, 105, 108쪽] 요즘 쏟아져나오는 하찮은 소설을 읽기보다는 옛날의 그러한 일화집을 읽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 문인화는 정신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교가 제아무리 능한 자일지라도 속된 마음이 있으면 그림에 그것이 나타났다 … 예술에 정진하는 자에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마음이 있는 한, 참된 예술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 결국 시기, 즉 장삿속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다른 높은 경지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스스로 미(美)라고 믿는 바를 추구해서 그것을 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요즘 그림은 옛것에 미치지 못한다 … 옛 학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고, 요즘 학자는 남을 위해서 한다.[119, 132, 145쪽] 단순히 글귀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마음가짐에 이어지는 것이다 … 아케미는 이러한 참된 즐거움은 벼슬살이하면서는 이루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아무도 의지하지 않는 가난한 독립독보 생활에만 있음을 익히 터득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풍아는 그런 곳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진실의 인식에는 시대가 없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 것이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다 … 그러나 좌절한 체험이 없는 자는 평생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137, 139, 142, 224쪽] 죽음을 미워한다면 그 기쁨을 하루하루 확인하고 살아 있음을 즐겨야만 한다 …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살아 있는 지금이 즐겁지 않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세상일에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일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솢우한 것을 망각한 점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 평균 수명이 얼마라는 식으로 자랑스럽게 늘어놓고는 하는데, 그것이 다만 육체적 생명의 연장만을 의미한다면 도대체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 사이교도, 바쇼도,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언어를 통해 생에 대한 감각을 잘 표현하였지만, 단순히 언어를 구사하는 기술에 능숙했던 것만은 아니다. 언어 이전에 이 세상에는 자기 및 타인, 다른 생물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평소부터 가슴깊이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로, 그 깨달음의 깊이가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147, 148, 152, 156쪽]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그 길을 걸어다닐 때 느낀 그의 행복감은, 이것이 마지막 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문예 작품은 대부분 생애의 마지막을 보는 눈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고 있다 … 자못 바쇼다운 말이며, 그는 평상시 한 작품 한 작품에 모든 힘을 기울여서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지어 왔다는 사실의 표명이었으리라 … 마음의 빛깔이 아름답지 않으므로 표현으로 잔재주를 부리려 한다 … 나중에 반복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ㄷ르을 때와 단 한 번뿐이라는 각오로 들을 때는 듣는 사람의 주의력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163, 189, 215, 226쪽]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새로 돋은 푸른 잎 어린 잎 등은 모든 사람이 감탄하며 바라보는 바이지만, 그것을 '고귀하게 느꼈다'는 말로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시가를 읊조리기 위해 여기저기 명승을 찾아다니는 어설픈 풍류인의 마음가짐으로는 도저히 이런 식으로 순수하게 조화된 마음을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 이제는 오히려 '자연 보호'라든가 '환경 보존'이라는 것을 부르짖게 되었는데, 자연을 친구로 대해 왔던 선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애당초 근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 이야기는 작은 새들에게의 설교라고 하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성 프란체스코가 평소에도 언제나 그와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 아마추어는 노래나 시구가 '말을 꾸며 내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시가란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풍류를 간직하고 있는' 그 마음 상태야말로 시가의 전부이다, 라고 사이교나 바쇼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236, 238∼239쪽] 지금도 서민이 모여 사는 도쿄의 어느 지역에 가 보면 뜰이 없는 집에도 화분이나 재배판에 작은 나무와 꽃을 심어 처마 끝에 놓아 두고 조석으로 물을 주는 광경을 볼 수 있다 … 환경보호라든가 사회 생태학 운동마저도 어머니들에게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솔선하여 그것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 청빈이란 단순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을 같이하고 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240, 249, 256, 264쪽]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하늘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단순히 금전으로 살 수 있는 상품으로만 간주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 아닐까 … 그렇게 터무니없이 쓰다 버리는 낭비 사회가 출현하고 있어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풍요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라는 실감이 거의 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지금 일본은 웬일인지 도처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규정이 만들어져 있어 생활, 교제, 복장, 행동에 틀이 형성되어 있는 것같이 보인다. 결혼식에서 사회자가 재촉하는 대로 손뼉도 치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고, 사진찍는 것이 법으로 정해진 것도 명령하는 것도 아닌데, 그에 따르지 않으면 소외당한다는 규정이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다 … 자동차 따위를 제아무리 많이 수출한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조금도 일본의 자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