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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다비 장면을 녹화해 놓고 몇 차례 반복해서 보았다. 볼 때마다 어머니의 반응이 다르고, 그 다름이 나로서는 신선해서 자꾸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무엇이 나올까. 나날이 기억이 소진되어 가는 어머니가 이번에는 또 무슨 깜짝 놀랄 만한 촌평을 하실까 하는 그런 깊은 관심이 내게 있었다.

 

"아이고, 으쩌까, 스님이 돌아가셨나비네."

 

활활 타는 불꽃을 보는 어머니의 첫 반응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무슨 생각이 났던 것인지 "중들이 참 불쌍혀, 산속에서..."하고 말끝을 줄이더니 한참이나 지난 뒤에는 갑자기 "아이그 찌긋찌끗해. 중놈들이나 도독놈들이나."하고 진저리를 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불교에 대한 입장은 요새 흔히 쓰는 말로 경계인이라 할 만했다. 적극적으로 환영하지도 않지만 그리 크게 의심하지도 않고, 대놓고 욕을 해대지도 않지만 가끔은 '중놈'이라고 아주 과감한 표현을 쓰시기도 한다. 중놈이란 표현은 사실 외할머니가 생존시에 자주 쓰시던 단어였다.

 

오랜 세월 깊은 산속의 절간에서 몸과 마음이 두루 단련된 외할머니는 뭐랄까, 작은 체격에 일단 길을 나섰다 하면 도토리가 언덕을 굴러 내려가듯이 아주 빠른 걸음으로 금방 이쯤에서 보였는데 벌써 저쯤으로 가물가물 사라져 버리곤 하시는 만큼이나 결연하고 단호한 면이 있으셨던 것으로 내게는 기억된다.

 

"돈냥이나 탐내는 것을 어찌 중놈이라 할 것인가. 중놈도 아니고 동냥치놈도 아니고 그저 악귀라고나 해야 맞지."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의 어느 날 외할머니는 승복 차림의 깡패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얻어맞고 피가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훑어내며 비단천이라도 찢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대처승을 산문에서 모조리 몰아내라는 이승만의 유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폭력행위가 이십 년도 넘게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돌아보면 그날의 그 일이 나로 하여금 머리 깎고 입산하는 일을 포기하게 했을 것이다.

 

외할머니 덕택으로 유년기부터 절에서 살다시피 해온 내게 스님들은 자주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었다. "너는 아무래도 머리를 깎아야겠다." 지금도 가끔 안면 있는 스님을 만나게 되면 "너 아직도 이러고 다니느냐" 투의 그런 말을 듣지만, 어려서는 참 별스럽다 싶을 정도로 나를 보는 거의 모든 스님들이 그런 말을 했었다. 너는 중이 될 팔자라고.

 

치매라는 몹쓸 것에게 기억을 빼앗겨 버리기 전의 어머니가 전하는 말씀에 따르면 나는 실제로도 불제자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서너 살 즈음에 백팔배를 드리는 이웃 아주머니를 따라서 두 팔을 크게 벌리고 합장하는 절을 열심히 하기도 했고, 반야심경을 곧잘 독송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끔 특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법당 앞에 걸어놓은 감을 보며 감바라, 감바라,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대체로 봐서 놀라울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 아이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유년기의 어느 날 문수사에서 잠을 자다가 그 일을 당했다. 한밤중에 우당탕쿵탕 소리가 요란하고 희미한 달빛에 몽둥이가 휙휙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협영화나 깡패영화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객단'의 기습공격에 잠들어 있었던 여러 스님들이며 공양주 보살이셨던 외할머니, 신도들, 그리고 어린 꼬맹이에 불과한 나, 우리는 그렇게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채로 쫓겨나고 말았다.

 

대처승이라는 오직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삼십 년 가까이 쓸고 닦고 정성을 쏟아온 절간에서 쫓겨난 외할머니는 그 뒤로 거의 유랑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음 편하게 정주할 절간 하나 찾지 못한 채로 동가식서가숙으로 삶을 연명하시던 외할머니는 끝내 우리집으로 오셔서 운명하셨다. 운명하시기 직전 외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다비였지만, 현행법상 민간에서의 다비는 불법이라 결국 뒷산에 매장되시고 말았다.

 

그날의 끔찍하고도 소름 끼치는 장면들이 아마도 나로 하여금 오랜 기간 불교를 부처님이 아닌 사천왕상 정도로 인식하게 했을 것이다. 사천왕도 마귀를 방어하는 그런 본래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불교 자체가 사천왕상의 그것처럼 눈알이 부리부리하고 가시몽둥이를 치켜든 험악한 악당들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나중에 한국 불교사를 공부하면서 그 사건은 한국 현대 불교계의 거목이라 할 선승 청담스님과 그 당시 정치계의 최고 실력자 이승만이 이뤄낸, 요샛말로 치자면 빅딜의 결과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신분이 무엇이든 조직화되면 끝내 권력을 추구하고 휘두르게 된다는 씁쓸한 인식을 갖게도 되었다. 그렇다 해도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했던 것일까 하는, 조직폭력단을 동원해서라도 대처승을 몰아내는 것이 불교정화라고 믿었던 청담스님의 사상은 그 이름이 갖는 유명세만큼이나 내게는 두고두고 짙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나는 그렇게라도 해서 불교에 대한 유소년기의 감정적인 선입견을 버리고 다소나마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 가고 있었지만, 당신의 친정 어머니를 유랑인으로 만들어 버린 불교에 대한 어머니의 입장은 나와 같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느 날이었던가. 험악한 시절 80년대 중후반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머니께서 서울 외가댁을 오셨다가 몹쓸 장면을 보시고 말았다.

 

그날 나는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오신 어머니를 모시고 인사동을 거쳐 조계사 구경을 나섰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총무원장 자리를 놓고 불자들 간의 싸움이 격심해 있었다. 조계사를 중심으로 전경들이 멀리로 진을 치고 있었고, 골목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스님들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조계사 경내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몹시 뒤숭숭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조계사 경내로 들어갔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우연히 마주치는 낯선 사람에게 목례를 보내기도 하며 십여 분이나 돌았을까. 갑자기 어디서 와아,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꽉 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우리는 보았다.

 

커다란 자루를 스님들이 네다섯 명씩 달려들어 붙잡고 몇 개나 들고 오는데 그 안에 돼지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우리는 자루 안에 사람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 중에서도 스님이 그 안에서 그렇게 꿈틀거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도대체 스님들이 산 것을 왜 저렇게 자루에 담아서 질질 끌고 가는 것인가.

 

그런데 스님들은 그것을 조계사 앞 식당 주방에 던져넣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식당 주방에서 주문한 요리거리인가? 원 세상에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는가. 출가 스님들이 어떻게 세속의 식당 주방을 관리할 것인가 말이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사람이라고는 차마 생각해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돼지나 무슨 염소 같은 잡을 것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해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고, 그래서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아이고 저것이 중들이다냐. 저것이 중놈들이여? 가자, 얼른 가자."

 

어머니는 턱을 덜덜 떨며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말 듯이 걸음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면서도 얼른 가자, 얼른 가자, 재촉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내가 아는 한 두 번 다시 절간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것이 아마 불가에서 말하는 '중생'의 마음일 것이다. 스님을 보고 절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법을 해봐도 중생의 마음에서 스님과 부처를 분리해낼 수는 없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그 어떤 절대자가 있어서 시험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큰스님 법정의 열반과 거의 같은 시간에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한다는 발표를 해서 커다란 반발을 사고 있다 한다. 경험만을 놓고 예측하자면 또 한 차례의 거대한 폭력사태가 벌어질 것이고, 자극적인 그림을 좋아하는 텔레비전은 열심히 중계방송을 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또 한 번 "저런 중놈들, 저런 중놈들"하시게 될 것이다. 치매 아니라 별것이 온다 해도 영혼을 할퀸 '그날'의 손톱자국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불교계의 폭력#중생의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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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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