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터져 죽는 꿈을 꾸었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예비군으로 끌려갔고, 총을 들고 무슨무슨 싸움터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맞은편 나라에서 쏜 중성자폭탄을 맞고 모두들 흐느적흐느적거리다가 피를 뱉고 몸이 퉁퉁 부어오르며 숨이 막혀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고 쑤셔넣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병균이 옮지 않도록 하려고. 전쟁이 터지니 이제까지 해 온 모든 일이 부질없고 맙니다. 헌책방을 다니며 애써 갈무리해 둔 애틋한 책이며, 헌책방을 드나들며 힘껏 찍은 사진이며, 헌책방 삶자락을 끄적인 글이며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됩니다.
저는 죽은 몸이 되어 사라졌는데 용케 넋이 옆지기한테 옮아갔는지 제 자취는 없어졌으나, 옆지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이런 옆지기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얼마 못 갑니다. 옆지기도 방사능이 옮아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우리 형이 나타나 옆지기가 죽기 앞서 당신 식구들 마지막 삶을 적바림해 놓은 종이쪽지 꾸러미를 가방에 고이고이 담아서 들고 갑니다.
형도 예비군으로 끌려간 몸이지만 이 종이쪽지 꾸러미를 잘 간수해 주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형 또한 몸이 차츰차츰 시들시들합니다. 고단한 행군을 마치고 잠깐 쉬는 결에 옆지기가 남긴 종이쪽지를 읽으려고 하는데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못 읽습니다. 종이쪽지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며 '나도 죽어서 사라지면 이 모두는 어떻게 되지?' 하고 걱정할 무렵 형마저 스르르 목숨을 잃고 온통 깜깜해진 채 꿈에서 깹니다.
꿈에서 깨어 눈을 뜨니 딸아이가 데굴데굴 굴러서 제 오른팔을 배에 깐 채 잠들어 있습니다. 꿈속에서 꼼짝을 하지 못하고 죽은 탓이 딸아이가 제 오른팔을 깔고 잠들었기 때문? 어이없어 피식 웃다가 곧 하나도 어이없는 일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 왜 전쟁이 무섭고 끔찍한지를 못 느끼고 있으며, 전쟁이 터지는 밑바탕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평화를 어떻게 찾고 평등을 어떻게 누리며 자유를 어떻게 지키고 민주를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생태와 환경을 말할 때에 나란히 어우러져야 하는 아름다운 삶을 찾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제가 헌책방이라는 곳을 알지 못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지나온 발자국을 더듬어 봅니다. 그동안 헌책방을 다니며 숱한 책을 만나고 사귀고 가까이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는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인 1992년 7월 27일에 독일말 문제집을 사려고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거리를 찾아가서 가게마다 이잡듯 뒤지며 딱 한 책방에서 문제집을 찾아냈습니다. 두 권이나 찾았습니다. 함께 대입 논술 시험 공부를 하던 벗한테 한 권을 선물해 줍니다. 이날 독일말 문제집 두 권을 사서 책값을 셈하고 나오려는데 뒷통수가 간질거려 책방 문간에서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더니 '참고서 아닌 책'들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흠칫 놀라며 한동안 마주보았고, '너희들이 이렇게 있었구나. 미안해. 오늘은 늦어서 돌아가야 하거든. 다음에 꼭 다시 찾아올게' 하는 인사말를 남기며 꾸벅 절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이듬달 8월 28일 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간 날,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없이 끝난 하루라 동무들은 하나같이 당구장에 가느니 어디 놀러가느니 하고 시끌벅적합니다. 저는 조용히 동무들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와 학교부터 동인천까지 걸어갑니다. 지난달에 찾아갔던 헌책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때에 마주보았던 '참고서 아닌 책'들이 가득한 자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학교옷을 입은 채 다섯 시간 남짓 책을 읽습니다. 다섯 시간이 넘은 줄은 책방을 나서며 알았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가 "이제 문닫을 시간인데요?" 하고 부르는 소리에 넋을 차리고는 이날 읽지 못한 책 다섯 가지를 사들고 나왔습니다. 안수길 소설책과 박은식 님 <한국통사>와 다른 한국현대소설 세 권을 묶어 8000원.
이때부터 한 주에 두 차례씩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몰래 빼먹고, 때로는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한테 "헌책방에 책을 보러 가야 해서 자율학습 안 하고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헌책방 나들이를 합니다. 학교 선생들은 '보충 자율 빼먹고 헌책방에 가겠다고 하는' 녀석이 우스꽝스럽다며 킬킬거렸습니다. 그래도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전교 15∼16등 하는 녀석이 이런 말을 하니 '어디 놀러다니는 땡땡이'는 아니라고 생각해 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꾸리는 헌책방 <아벨서점>에서는 오래도록 조용히 앉아 책에 빠져들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책방 구석에서 책에 빠져 있는 철부지 학생을 지켜봐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꾸리는 헌책방 <삼성서림>에서는 날마다 술잔을 기울이는 할배가 "자네도 책만 보지 말고 술도 한잔 하지?" 하며 불렀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고 손사래를 치면 헌책방 할배와 함게 술잔을 기울이는 이웃 할배가 "교복 입은 걸 보니 학생인데, 학생한테 술을 마시라고 하면 어떡해?" 하고 나무랐고, 이런 나무람을 들으면서도 "우리도 학생 때 술 다 마셨는데 어때. 그러지 말고 한잔 마셔?" 하며 말을 이었고, 저는 "아니요. 괜찮아요.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마실게요" 하며 겨우 물리쳤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며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간 1994년부터는 서울에 있는 헌책방을 한 곳 두 곳 찾아다닙니다. 지난 여섯 해 중고등학생 나날을 바친 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대학교라는 곳이 조금도 '큰 배움터' 구실을 못한다고 느끼며 가슴이 무너져내렸기 때문입니다. 교수도 선배도 동기도 …… 이듬해에 맞이한 후배도 하나같이 학문에 그다지 뜻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자신문사에서도 학보사에서도 교지편집부에서도 학문하는 사람이 모이는, 그러니까 고개숙여 배우는 사람이 모이는 이 큰 배움터에 크디큰 배움을 받아들이며 크디큰 배움나눔을 하겠다는 사람을 찾거나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첫 학기는 모든 수업을 빠짐없이 들으며 낮밥 때하고 저녁나절에는 도서관에서 '이때까지 헌책방을 다니며 만날 수 없던 책'을 하나하나 읽고 훑으며 보냈습니다. 도서관 문을 닫을 무렵에는 대학교 앞 인문사회과학책방과 헌책방을 찾아가서 책방 문을 닫을 때까지 책을 읽었습니다. 선배나 동기들은 날마다 술을 마시자고 했고 저는 이들을 따라 날마다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술자리에 곧바로 안 갔습니다. 늘 도서관과 헌책방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술자리에 끼었고, 술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헌책방을 찾아간 다음 마음을 쉬곤 했습니다.
배움판 없이 술판만 넘치는 대학교에는 마음이 붙지 않아 2학기에는 수업을 안 듣고 헌책방에 갑니다. 1995년 봄부터는 술을 끊고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신문배달 일을 합니다. 짐자전거를 타고 이문동에서 이웃 고려대학교 앞에 있는 헌책방이나 미아리 헌책방이나 청계천 헌책방 들을 찾아갑니다.
처음에는 길바닥장사로 헌책을 팔았다는 외대 앞 <신고서점> 아저씨는 "우리는 여태껏 휴가라고는 없었어요. 명절날에도 문을 열었어요" 하는 이야기를 어느 결엔가 들려줍니다. 용산 <뿌리서점> 아저씨는 가난하면서 배움에 고픈 어린 책손을 주마다 두어 번씩 만날 때 으레 "어이 최 선생, 밥 안 먹었지? 책만 보면 배고프니까 나하고 함께 밥을 먹자" 하면서 짜장면이니 국수니 밥이니 사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책값마저 반토막으로 잘라 아주 싸게 파셨습니다.
홍대 앞에 있는 <글벗헌책가게(온고당)> 아저씨는 "우리는 책값을 깎아 주지 않아. 왜냐고? 교보문고에도 없는 책을 파는데 왜 깎아 줘. 진짜로 책을 보는 사람들은 고마워서 웃돈을 줘야 한다고. 경주에서도 제주에서도 책을 사러 우리 가게에 오는데"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저한테는 책값을 에누리해 주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책값을 에누리해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노량진 <진호서적(책방진호)> 아저씨는 오래오래 책을 구경하고 있으면, "자네, 이런 책 본 적 있나?" 하면서 슬그머니 웃음 띤 얼굴로 '이름만 들었던 책'을 건네며 구경해 보라고 했습니다. 독립문 <골목책방> 아저씨는 "한 권도 천 원이요 두 권도 천 원에 줄 테니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다 사 가세요" 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 서울에는 좋은 헌책방이 참 많구나.
헌책방에만 가면 마음이 넉넉하고 푸근해져서 동기나 선배나 후배 팔짱을 끼고 "헌책방에 한번 같이 가요" 하고 꼬드겼습니다. 모두들 "무슨 헌책방? 책을 보려면 도서관에 가면 되지. 도서관에 가면 공짜로 보는데" 하면서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쩌다 꼬드김에 넘어가 헌책방에 같이 가고 나면 "헌책방에 와 보니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책이 진짜 많다!" 하면서 놀라 했으나 두 번 다시 헌책방 나들이를 함께해 주지 않습니다.
도무지 큰 배움터에는 있을 수 없다고 느껴 군대에 입영신청을 하고 가을날 학교를 떠납니다. 학교를 떠나기 앞서 외대 앞 <최교수네 헌책방>에 들릅니다. 지난날 서라벌예대 교수였던 책방 아저씨는 달력에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해서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니라. 노동은 生命이요 思想이요 光明이니라" 하고 적어 놓았습니다. 대학교에 절망을 느껴 곧 군대에 간다는 저한테 톨스토이 <인생독본> 한 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보름쯤 앞서 수유리 <신일서점>에 들러 책을 가방 가득 채우도록 장만하고는 헌책방 사장님한테 꾸벅 절을 하고 나오는 길에 곰곰이 돌아보니, 이제까지 헌책방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당신 아들뻘 되는 책손한테 낮춤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스스로를 다소곳하게 가누어 책을 아끼는 곳이 헌책방이요, 책에 깃든 넋을 섬기는 곳이 헌책방이기 때문일까요. 1997년 12월 31일에 군대를 마치고 대학교로 돌아오지만 몇 해 만에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빛줄기를 못 느껴 1998년 12월에 끝내 휴학계를 내고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저한테 큰 배움터는 헌책방이라고 여기며 앞으로 언제까지나 내 마음 살찌우는 큰 배움터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한 해 등록금이 삼백만 원이던 그무렵 삼백만 원을 고스란히 헌책방에 바쳤고, 한 해 등록금이 천만 원인 오늘날 천만 원 가까운 돈을 곱다시 헌책방에 쏟아 책을 장만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한살림'에서 펴내는 잡지 <살림 이야기> 2010년 봄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