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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연인 (1∼7)

- 글ㆍ그림 : 하라 히데노리

- 옮긴이 : 격주간 <극화광장> 편집부

- 펴낸곳 : 도서출판 만우(1993∼1994)

- 판이 끊어짐 (1999∼2000년에 <내 집으로 와요>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으나, 이 또한 판이 끊어짐.)

 

 

 (1) 한 장 한 사람 한 권 한 삶

 

삼월을 맞이했으니 봄입니다만, 올 봄인 5월부터 사진 잔치를 하나 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 달 반쯤 남겨 놓고 있으니 요모조모 바쁘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데, 이제까지 사진잔치를 숱하게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한 장 추리기'가 그지없이 힘듭니다.

 

'한 장 추리기'란 다름아닌 포스터나 도록에 들어갈 겉그림 사진 하나를 뽑는 일입니다. 사진잔치를 알리는 자리에 쓸 얼굴이 될 사진 한 장을 추릴 때가 가장 힘듭니다. 지난 2009년에 찍은 골목길 사진 2만 장 남짓에서 어찌저찌 추려서 이러저러한 사진 삼백 장쯤을 잔치마당에 펼쳐 보이거나 도록에 담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 사진들을 아우르면서 골목길 삶자락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만한 한 장을 추리기란 참 까다롭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 장 추리기가 어려운 만큼 한 장 추리기에 뜻이 있습니다. 한 장 추리기가 어려운 만큼, 처음부터 사진을 찍을 때에 한 장을 일구어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한 장 추리기와 한 장 찍기인 만큼, 사진찍기를 하던 그 자리 그때에 '그래, 나는 이런 모습을 담고 싶어서 사진기를 쥐고 있지.' 하고 느낍니다. 따로 어느 한 장을 앞에 내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이 골목에서는 이런 모습이 좋고 저 골목에서는 저런 모습이 좋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한 장만 고르자니 참으로 버겁습니다.

 

 한 장을 뽑으라고 하면 한 장을 뽑기가 참 어려운 사진들입니다.
한 장을 뽑으라고 하면 한 장을 뽑기가 참 어려운 사진들입니다. ⓒ 최종규

 

다시금 생각한다면, 한 장을 추릴 수 없을 때에는 여러 장을 죽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지난 2008년에 사진 공모전에 한번 사진을 보낸 적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 사진이 1등으로 뽑혔고, 제 사진은 한 장이 아닌 넉 장이 나란히 뽑혔습니다. 제 사진은 한 장짜리 '멋진 한 장'을 담는 얼거리가 아니라 '여러 장이 어우러지는 이야기 사진'임을 심사위원 분들이 읽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괜히 한 장으로 추리기보다는 넉 장으로 모두어도 괜찮으리라 봅니다. 가로사진 넉 장이든 세로사진 넉 장이든, 또는 가로사진과 세로사진을 두 장씩 묶은 넉 장이든 추리면 될 노릇입니다. 얽매이는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숫자에 얽매일 까닭이 없습니다. 제 사진을 즐길 사람들을 어떤 틀로 얽어맬 뜻이 아니라 한다면, 저부터 숫자에서 홀가분할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꼭 어느 사진을 보아야 제 사진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 않으며, 반드시 몇 가지 사진을 보지 않고서는 제 사진감을 헤아릴 수 없다는 굴레에서 벗어날 노릇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그저 책이 좋아서 읽습니다. 책은 한 권도 읽고 열 권도 읽으며 백 권이나 천 권이나 만 권도 읽습니다. 십만 권이나 백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읽고 싶은 사람한테는 읽고 또 읽어도 끝이 없는 책읽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한두 해에 수십만 장을 찍지 않습니다. 짧으면 열 해에 십만 장이든 이삼십만 장이요, 으레 스무 해에 삼사십만 장이고 서른 해에 오십만 장쯤이며, 마흔 해에 백만 장이 넘을 테지요.

 

 두 장씩 묶어서 넉 장을 뽑을까 하고도 생각해 보는 제 사진들입니다.
두 장씩 묶어서 넉 장을 뽑을까 하고도 생각해 보는 제 사진들입니다. ⓒ 최종규

 

책으로 백만 권이나 사진으로 백만 장은 어찌 보면 아찔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숫자를 살피지 않고 내 마음에 깃드는 좋은 사진을 살폈기 때문에 한 해 두 해 늘어나는 사진 숫자란 아무것이 아닙니다. 내 가슴에 아로새기는 좋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열 해 스무 해 늘어나는 책 숫자란 모두 똑같은 책일 뿐입니다. 이제까지 찍은 사진에서 딱 한 장을 추릴 수 없고, 여태껏 읽은 책에서 꼭 한 권만 뽑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 테두리에서 이제까지 찍은 사진에서 다문 한 장을 선물할 수 있고, 여태껏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을 뽑아서 선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 사람을 만나서 짝을 짓고 살림을 꾸리고 오순도순 지낸다고 합니다만, 우리 삶터에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오직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삶터에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무척 많고, 아름다운 사람이 대단히 많으며, 훌륭한 사람이 몹시 많습니다. 제 사진감인 헌책방과 골목길을 놓고 본다면, 수많은 헌책방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한 곳을 뽑을 수 없고, 가장 사랑스러운 골목길 한 자리를 추릴 수 없습니다.

 

이 헌책방에서는 이 헌책방대로 아름다움과 사랑과 멋이 있습니다. 저 골목길에서는 저 골목길대로 아름다움과 사랑과 멋이 있어요. 게다가 이 헌책방 한 곳에서도 지난해에 찍은 사진과 올해에 찍은 사진과 열두 해 앞서 찍은 사진 모두 다 다른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어느 사진이 더 마음에 들거나 사랑스럽다고 가릴 수 없습니다.

 

오늘 걷던 골목과 어제 걷던 골목과 지난해에 걷던 골목을 견주며 어느 때에 찍은 사진이 더 어여쁘거나 멋스럽거나 살갑다고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딱 한 장 가장 괜찮은 사진을 가려뽑을 수 없는 한편, 모든 사진은 저마다 이 한 장으로서 괜찮은 멋과 맛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까지 읽은 책들은 저마다 뜻과 값이 있으며, 이 책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책이란 따로 없지만, 이 책들은 저마다 가장 훌륭하고 알찬 뜻과 값을 건사하고 있다고 하겠어요.

 

 가로사진으로 넉 장을 모두어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가로사진으로 넉 장을 모두어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 최종규

 

 (2) 사랑과 사진을 말하는 만화책

 

만화책 <연인>을 읽습니다. 우리 살림집에서 고작 이삼백 미터 거리에 새롭게 문을 연 헌책방 <더불어숲> 나들이를 하다가 뜻밖에 만난 녀석입니다. 하라 히데유키 님이 그린 만화책 <연인>은 1993년에 해적판으로 처음 나왔고, 1999년에 정식번역으로 나오며 책이름이 <내 집으로 와요>로 바뀝니다. 그리 옛날 만화라 하기는 어려우나 고작 1993년과 1999년에 나온 만화임에도 하라 히데노리 님 만화는 새책방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라 히데노리 님 다른 만화까지 판이 끊어져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나라 만화쟁이들 1990년대 작품들을 2010년대에 찾아볼 길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나라 도서관은 만화책을 알뜰히 갖추지 않는 만큼, 제아무리 이름난 작품이라 하여도 책이름만 겨우 알아낼 수 있을 뿐,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책장을 넘길 책쉼터는 없다 하겠습니다. 하늘이 돕는다면 헌책방에서 뜻밖에 만날 수 있겠지요. <연인>이든 <내 집으로 와요>이든 1993년과 1999년에 이 만화를 알아보고 장만했던 사람이 스스럼없이 헌책방에 내놓아 주기를 기다리고 꿈꾸고 비손을 하면서 애타께 손가락을 빼물밖에 없습니다.

 

 <연인> 4권 겉그림.
<연인> 4권 겉그림. ⓒ 최종규

.. "네가 찍었냐?" "서, 선배님 그건. 예. 저……." "이것도 사진이라고 찍었어? 필름만 낭비한 꼴이군! 너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냐?" "도, 도와드릴게요." "손대지 마! 그런 엉터리 사진 찍는 녀석에게 내 소중한 필름을 손대게 할 것 같냐?" ..  (1권 187∼189쪽)

 

하라 히데노리 님 만화 <연인> 또는 <내 집으로 와요>는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책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 '연인'이란 사랑하는 짝꿍입니다. 만화 줄거리를 살피면, 피아노를 치면서 혼자 사는 스물다섯 아가씨하고 사진찍기를 하는 갓 대학 1학년이 된 스무 살 사내가 만나서 맺고 이어지다가는 그예 헤어지고 마는 사랑이야기입니다.

 

맑고 고운 사랑과 꿈을 찾는 스물다섯 아가씨는 '스물다섯을 아주 젊거나 어린 나이'로 여기는 분들한테는 일찌감치 세상 삶과 사람 삶에 눈을 뜨고 속깊이 꿰뚫어보는 사람입니다. 맑고 고운 사랑은커녕 제 꿈마저 무엇인지를 제대로 갈피 잡지 못하는 스무 살 사내는 '스물을 철부지 나이'로 여기는 분들한테이든 '스물이란 이제 알 만큼 아는 나이'로 여기는 분들한테든 참으로 철이 없고 생각이 짧은 사람입니다.

 

좋은 짝꿍을 만났으면서도 이이가 왜 좋은 짝꿍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제 꿈이라고 하는 사진찍기를 옳게 붙잡을 생각조차 제대로 못하면서 늘 핀잔을 받고, 핀잔을 하는 사람들이 애먼 꾸지람이 아니라 이 젊은 사내한테 깃든 '숨은 힘'을 꽃피워 주려는 조용한 가르침이요 따스한 사랑임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스무 살 풋내기 사진쟁이가 제 사진길을 걷도록 일깨우고 이끈 사람이란 다름아닌 스물다섯 피아노 아가씨이지만, 이 젊은 사내는 끝까지 '참사랑'을 읽지 못합니다. 젊은 사내가 '내 사진이란 무엇이고 내가 찍을 사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 둘레에서 알게 모르게 들려준 도움말이란, 바로 '사진찍기에서만 배우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너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제발 제대로 깨달으라고 하는 소리'임을 알아차리지 못해요.

 

그래도 젊은 사내는 사진찍기에서 꿈을 이루어 나갑니다. 꿈을 이루어 나가며 퍽 괜찮은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다만 괜찮은 사진은 찍을 줄을 알지만 아름다운 사진을 찍지는 못합니다. '아름다운 풍경 사진'은 찍을 수 있으나 '아름다운 풍경에 삶과 재미와 웃음과 눈물과 즐거움과 기쁨과 슬픔과 아픔을 고루 담아내는 사진'으로는 뻗어가지 못합니다.

 

 <연인> 5권.
<연인> 5권. ⓒ 최종규

.. "음, 괜찮긴 괜찮은데. 이 사진 색상은 참 좋군. 이쪽의 명암도 좋은 앵글이고, 버스도 제대로 찍었어. 그러나 재미있는 사진은 아닌 것 같군. 솔직히 얘기해서 전혀 재미있지가 않아. 이 사진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일 뿐이야. 게다가 전에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고." … "선배도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라고만 생각하시나요?" "주제파악은 잘하는군." "앗, 그렇게 심한 말을. 그렇지 않아도 울적해 죽겠는데." "건방진 소리하지 마! 이제부터 시작이야, 시작! 이제부터라고 해도 막다른 길이라든가 밑바닥이라느니 이제 어떤 방법 없다든지,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그렇게까지 말하지 말아요." "은수에겐 은수만의 사진밖엔 찍을 수 없는 거야. 그저 차분히 하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한가롭게 있을 수는 없다구요!" "근데 왜 그렇게 초조해 하는 거냐?" "아, 아니에요. 단지 자꾸 자신이 없어져서, 무엇을 찍으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뭘 찍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역시, 이런 놈이 찍은 사진이 재미있을 리 없지!" ..  (2권 169∼170, 179∼181쪽)

 

만화책을 펼치고 덮으면서 히유 히유 히유우우 하고 한숨이 절로 터져나옵니다. 그렇지만 만화책을 모두 덮고 나서는 '이봐, 너도 네 모습을 알아야지. 네가 스무 살 나이일 때에 참사랑을 알았어? 알았느냐구?' 하고 되묻고 되물으면서 '그래, 이 만화는 이처럼 아프게 끝맺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스물다섯 아가씨는 스무 살 사내보다 훨씬 그윽하고 웅숭깊은 마음그릇이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뻗어나가 한결 따사롭고 아리따운 마음밭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니까요. 서로서로 아픔과 생채기를 한몸 가득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넋이요, 너나없이 울음과 괴로움을 온마음 가득 부대끼면서 섧디섧게 일어서는 얼입니다. 만화쟁이 하라 히데노리 님은 '사랑'과 '사진'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를 요리 재고 조리 따지고 이리 부딪히게 하고 저리 설레게 하면서 슬기롭게 엮어 나갔다고 하겠습니다.

 

"뭘 찍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는 스무 살 풋내기한테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셈이며, "내가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꼬락서니이고, "내가 함께할 사랑이 무엇인지마저 모르겠다"고 하는 주제입니다.

 

.. "아, 아, 또 유나의 사진이군." "당연하지. 우리가 봐도 좋은 사진이잖아! 뭐라고 설명이 필요없는 사진이야. 역시 재능인가?" "재능 같은 건 아냐! 유나의 사진은 단지 꾸밈없이 소박할 뿐이야. 찍는 사람의 마음이 전해지는 거지." "아, 과연 그렇군." "그러나 이런 마음이 모두가 깜박하고 잊고 사는 함정이야." "함정?" "앵글이라든지 노출이라든지 그런 테크닉에만 치우쳐서, 망쳐 버리기 일쑤니까." … "스포츠는 물론이고 대입 입시생이라든지 하다못해 도박이라도 그런 건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거야! 이 사진들은 뭔가에 몰두해 있는 얼굴인 거야! 뭔가에 집중해 있는 얼굴들은 순간이지! 그러니까 나도 그 순간을 찍기 위해 집중을 한다! 그렇게 해서 피사체의 느낌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이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그래도 그 느낌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면 ……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이 아니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거야!" ..  (3권 39∼40, 114쪽)

 

만화 <연인> 또는 <내 집으로 와요>는 1권에서는 거의 사랑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러다 꼭 한 대목에서 사진을 다루어 줍니다. 2권에서도 거의 사랑이야기입니다만 사진 다루는 대목이 늘어납니다. 3권부터는 거의 사진을 다루는 만화처럼 보입니다. 만화를 그린 사람이 남자이기에 남자 눈길에 따라 만화가 흐르도록 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주인공 스무 살 사내는 당신 사진이 더욱 사진답도록 하며 당신 사진에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도록 하는 빛그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한테 맡겨진 일만큼은 말끔하게 해냅니다. 그래요. 주어진 일이나 맡겨진 일만큼은 말끔하게 해냅니다. 다만, 스스로 제 일거리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스스로 제 사진감을 붙잡지 못합니다. 잡지를 아름답게 꾸미는 사진은 대단하다 할 터이나, 스스로 잡지에 어떤 사진과 어떤 이야기와 어떤 목소리와 어떤 눈썰미와 어떤 손자국으로 어떤 삶을 나누고자 하는지는 읽지 못한다고 하겠어요.

 

아무래도 아직 철없는 사람한테 이 모두를 바라기는 어려운 노릇입니다. 아직 철없는 사람이니까 사진 재주를 키우고 사진 눈썰미를 높이는 데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더 빼어난 사진'으로 '내 이름값을 더 높이는 사진' 한 장보다는, 나한테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울 사람한테 다가서는 사진 한 장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제가 찍은 사진 한 장이 천만 원으로 팔리거나 백만 원을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찍은 사진을 제 돈을 들여 만든 다음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선물을 할 때만큼 기쁠 때가 없습니다. 제 사진을 좋게 바라보면서 꽤 두둑한 값을 치르고 사들이는 분한테는 제 가난한 살림을 걱정해 주는 손길까지 느끼면서 고맙고 반갑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 사진을 돈 주고 사들이는 분한테 덤으로 다른 사진을 여럿 안겨 드립니다. 작품이기에 앞서 삶이고자 하는 사진이고, 생계수단이기에 앞서 즐거움이고자 하는 사진이며, 전시나 도록이기에 앞서 내 눈물과 굳은살이고자 하는 사진이거든요.

 

 <연인> 다섯 권을 바닥에 깔아 놓고.
<연인> 다섯 권을 바닥에 깔아 놓고. ⓒ 최종규

 

.. "은수야, 한마디 해 두겠는데." "예?" "이번 촬영은 실패다! 네가 찍은 사진 덕분에 잡지는 많이 팔렸어. 이것은 네 실력이니까 자신을 가져도 좋아. 하지만 이 사진은 다시 찍은 거야. 다시 찍었다는 것은 실패했다는 거야. 카메라맨에게 다시 찍는다는 것은 제일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만은 기억해 둬라. 알겠지? 은수!" "예." ..  (4권 176∼177쪽)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만화 <연인>임을 헤아려 본다면, 잡지사 편집장이 "다시 찍었다는 것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 주인공 사내가 무언가 깨달았어야 합니다. 주인공 사내는 '주인공 사내가 잘못해서 당신 짝꿍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 다음에 다시 찾아가서 예전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실패한 매무새임을 읽었어야 합니다.

 

주인공 사내가 당신 짝꿍한테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고, 당신이 잘못한 그 일 때문에, 또 그 일이 있은 뒤부터 당신 짝꿍이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고 힘겨워 했는가를 살폈어야 합니다. 그저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옛날과는 다른 느낌'이라고 여기며 당신한테 고운 짝꿍을 떠나 버리는 그런 못난 짓을 다시금 되풀이해서는 안 될 노릇이에요.

 

아마, 주인공 사내가 스물다섯 나이를 거치고 서른과 서른다섯과 마흔을 지나는 나이가 되면, 이러는 동안 숱한 사람을 마주하고 숱한 일을 겪다 보면, 저절로 지난날 당신이 낯부끄럽게 했던 온갖 일을 떠올리며 뉘우칠 수 있겠지요. 뉘우칠 수 있는 넋이라 한다면 주인공 사내는 사진쟁이로 크게 뜻을 이룰 수 있고, 뉘우칠 없거나 뉘우치지 못하는 넋이라 한다면 주인공 사내는 '이름은 널리 팔릴지 모르나 아름다운 사진 하나 이루지 못하는 그저 그런 상업 작가'로 그치고 말리라 봅니다.

 

 

 (3) 사진이 사진으로 되는 길

 

사진이 사진으로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이 사진이 되지 못하는 길이 있습니다. 만화책 <연인> 또는 <내 집으로 와요>는 주인공이 나누는 이야기가 아닌, 어느 한 단락에 붙인 이름으로 이 길을 이야기해 줍니다. 바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찍습니까?"라는 이름 하나로.

 

.. "이건 비판하는 게 아냐. 아니, 오히려 칭찬하고 있는 거지. 사진가란 말야, 자신의 스타일이나 개성을 너무 내세워서 찍어대는 나머지, 주인공은 피사체의 개성을 죽여 버리는 경우가 많아. 그러나, 그는 달라. 자신을 없애고 피사체의 개성을 눈 가득히 끌어내는 거야. 달리 말하자면 그게, 아주 독특한 그의 개성이라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나는, 내 사진을 찍으면 되는 거야. 그것뿐이야.' … "딸이든 애인이든 모델이든 그것은 같은 거야. 과거도 미래도 관계가 없어. 어떻게 현재를 찍을 수 있을까. 머리속에는 그것밖에 없거든." … "훨씬 화려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성격 아주 못됐구나, 뭐 그런 것 생각한 거겠죠?" "아, 저기, 아닌데." "신경 안 써요.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단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볼 때는 그런 선입견은 버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  (5권 20, 28, 195, 203쪽)

 

 저로서는 이 사진 저 사진 모두 깃든 이야기가 달라서 선뜻 한 장만 추리기란 어렵습니다. 그래도, 어떠한 사진이든 즐겁게 읽어내 줄 분들이 있으면 고맙고 반갑습니다.
저로서는 이 사진 저 사진 모두 깃든 이야기가 달라서 선뜻 한 장만 추리기란 어렵습니다. 그래도, 어떠한 사진이든 즐겁게 읽어내 줄 분들이 있으면 고맙고 반갑습니다. ⓒ 최종규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이이를 바라보는 내 눈길에 '거짓'이 없습니다. '들보가 앉은 눈'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선입견이 없는' 눈입니다.

 

사진을 참다이 찍을 줄 아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찍더라도 그 사람한테 가장 아름다울 모습을 잡아채어 찍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기를 제 한쪽 눈에 처박고 그이를 바라볼 때에는 그이 넋을 들여다보지 그이 겉차림새를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참다운 사진쟁이는 사진만 잘 찍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사진쟁이입니다. 참다운 사진쟁이는 사진을 잘 찍을 뿐 아니라 세상을 올바르게 읽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다운 사진쟁이는 참다운 사랑을 찾고 참다운 삶을 꾸리며 참다운 길을 걷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러지 않고서야 설악산을 찍든 제주섬을 찍든 골목길을 찍든 모델을 찍든 뭐를 찍든, 참다운 사진쟁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사진쟁이한테든 "가장 소중한 사람을 찍습니까?"를 밑바탕에 단단하게 깔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가장 소중한 사람을 찍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스스로 사진쟁이라 내세울 수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 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스스로 글쟁이, 그러니까 한자말로는 작가라고 밝힐 수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그리는 사람이 그림쟁이, 곧 화가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꾼, 곧 가수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사람이 비로소 제대로 된 정치꾼입니다. 오늘날 정치꾼들은 누구를 지킨다고 떠벌이고들 있습니까? 이런저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네들이 걷는 길을 또렷이 알아챌 수 있습니다.

 

 눈 덮인 골목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써 보라 말씀하는 분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도 저한테는 이러한 사진도 참 좋습니다.
눈 덮인 골목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써 보라 말씀하는 분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도 저한테는 이러한 사진도 참 좋습니다. ⓒ 최종규

 

사진쟁이는 사진기 하나를 들고 우리 삶터를 아름답게 가꾸고자 몸부림치는 사람일 수밖에 없고, '가정주부'라 하는 살림꾼들은 부엌칼과 빨래비누과 걸레장으로 우리 삶터를 아름답게 일구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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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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