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나는 퇴근하자마자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일행인 김호부 선생님 댁으로 서둘러 차를 몰았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라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창원 백월산(428m, 경남 창원시 북면) 산행을 나섰다.
북면공설운동장(경남 창원시 북면 마산리)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오후 3시 10분께 마산마을 어귀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사실 산행을 시작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게다가 비가 흩뿌리기 시작해 나는 준비한 우산까지 받쳐 들고 걸어갔다. 산이 뭐가 그리 좋다고, 내가 생각해도 참 못 말리는 여자이다.
소나무, 떡갈나무, 아카시아 등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흙길의 감촉이 푹신푹신했다. 무엇보다 오솔길 같은 정겨운 길이 이어져 좋았다. 군데군데 안개가 자욱이 낀 풍경도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세 개의 봉우리가 있어 삼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백월산은 <삼국유사>에 그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중국 당나라 황제가 연못을 하나 팠는데, 달빛이 휘영청 밝은 보름쯤이면 달마다 이 연못 속에 산 그림자가 비치면서 꽃 사이로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은은히 보였다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황제가 화공으로 하여금 똑같이 그리게 한 후 사자(使者)를 보내 그림 속의 산을 찾아오라고 명했다.
자기 나라 안을 샅샅이 다 뒤져도 찾지 못한 사자가 신라까지 와서 우연히 백월산을 바라보니 그것과 똑같았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신발 한 짝을 벗어 사자바위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갔는데, 또다시 보름쯤이 되자 신기하게도 연못 속에 어리는 산 그림자에도 신발 한 짝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는 거다.
황제가 놀라워하며 이 산에 백월산(白月山)이란 이름을 내리자 그 뒤로는 산 그림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세숫물에 비친 여덟 봉우리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보고 중국 위왕이 감탄하여 산을 찾으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전해지는 전남 고흥군 팔영산(八影山, 608.6m)의 전설과 비슷하다.
백월산은 마금산 온천과 철새 도래지인 주남저수지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더더욱 산객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는 것 같다. 산행 길에 산남, 주남(용산), 동판의 3개 저수지로 이루어진 주남저수지를 조망하고 싶으면 화양고개를 들머리로 삼는 코스를 택하는 것이 더 좋다. 범골봉 정자에서 바라보는 주남저수지의 풍경이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뿐만 아니라 봉림산, 천주산, 불모산도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늦은 산행 탓으로 걸음을 재촉했더니 오후 4시 10분께 백월산 정상에 도착했다. 고요가 내려앉은 그곳에 서자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와 미륵불과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의 설화가 떠올랐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들은 신라 승려로 수행에만 전념하기 위해 이 산으로 같이 들어오게 된다.
달달박박은 산 북쪽 고개의 사자바위 위에 판잣집을 짓고 들어앉았고, 노힐부득은 동쪽 고갯마루로 가서 물이 흐르는 바위 틈에 집을 지어 기거했다. 노힐부득은 자신의 암자에 머물면서 미륵불을 열심히 구하고 달달박박은 종일 아미타불을 염송했다 한다.
그렇게 3년이 흘러 어느덧 성덕왕 8년(709) 사월 초파일이 되었다. 해질 무렵에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인 어여쁜 여인이 그들의 암자를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갈 것을 청했다. 달달박박은 절의 근본은 깨끗함을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에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하지만 노힐부득은 난처해 하면서도 중생의 뜻을 따르는 것 또한 수행하는 자의 임무라고 여겨 암자 한 쪽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여인에게 산기가 보이더니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아이를 낳자마자 이제는 그에게 목욕을 하고 싶다고 졸라 댔다. 피와 땀이 뒤범벅된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거절하지 못하고 물을 따뜻하게 끓여 그녀를 목욕시키자 놀랍게도 목욕통 속의 물이 점점 금빛으로 변하면서 향내를 풍겼다.
그때에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놓지 않으며 함께 목욕할 것을 권했다. 그가 마지못해 목욕통 속으로 들어가 몸을 담그는 순간 정신이 맑아지면서 살갗이 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스스로 마음을 묶어 관음을 만나는 행운을 얻고도 놓쳐 버린 달달박박은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온몸이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미륵불이 되어 연화대에 앉아 있는 노힐부득이 일러 주는 대로 목욕통에 남아 있는 물로 목욕하자 달달박박 또한 아미타불이 되었다.
백월산 자락에 달달박박이란 예쁜 찻집이 있다. 거기에서 천궁, 당귀, 지황, 방풍 등 열 가지 한약재를 달여 만든 달박차를 마시면서 문득 노힐부득이란 이름도 있는데 왜 찻집 이름이 달달박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에게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달달박박이란 이름이 발음하기에 더 재미가 있고 기억하기도 쉬워서 인 것 같다.
우리는 주남저수지 가까이에 있는 주남돌다리(경남문화재자료 제225호, 경남 창원시 대산면 가술리)를 보러 가기 위해 왔던 길로 하산을 서둘렀다. 창원시 동읍과 대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주천강(注川江)에 놓여 있는 주남돌다리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 40분께. 동읍의 판신마을과 대산면의 고등포마을을 이어 주는 다리로 지난 1967년 큰비로 인해 대부분이 붕괴되어 있던 것을 1996년에 창원시에서 복원했다.
800여 년 전 강 양편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봉림산 봉우리에서 길이 4m가 넘는 자웅석(雌雄石)을 옮겨 와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뿐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괜스레 왔다 갔다 하며 걷고 싶을 만큼 정감 있고 아름다운 돌다리이다. 얼마 전 MBC 창사 49주년 특별기획드라마인 '동이' 첫 회에 이곳서 촬영한 장면들이 나와 매우 반가웠다.
배가 출출해서 우리는 마산 만날공원 입구에 있는 '만날재 옛날손짜장' 집으로 가서 소문난 짬뽕을 사 먹었다. 그 집 짬뽕은 홍합, 새우, 주꾸미, 조개 등 신선한 해물을 듬뿍 넣어 국물이 개운하고 면도 쫀득쫀득해 정말이지, 맛이 환상적이다. 더욱이 면 위로 그득히 얹어 놓은 해산물은 먹기에 앞서 눈부터 즐겁게 한다.
창원 백월산 산행을 한 후 마금산 온천에 들러 산행의 피로를 푸는 것도 좋다. 그리고 나서 북면 손두부를 먹으며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켠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느긋한 걸음으로 주남저수지와 멋스런 주남돌다리를 구경해 보는 것은 또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 내서 JC→ 남해고속도로 동마산 IC→ 창원역 방향→ 북면 마산리 북면공설운동장 또는 북면 화양고개→ 백월산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일연 지음, 배성우 편역)>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