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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26일), 청소시간이 되어 교실을 향해 바삐 걸어가고 있는 저에게 한 아이가 이렇게 말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정말 감동이었어요."
"응? 뭐가?"
"칠판에 써놓으신 거요."
"응 그거."

제 반응이 신통치 않았던지 옆에 있던 아이들이 또 이렇게 한 마디씩 거들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멋졌어요."
"맞아요. 우리 반 애들 다 감동 먹었어요." 
"전 눈물이 날 뻔했어요." 
"그래? 고맙구나."

저는 아이들의 반응에 적이 놀라고 있었습니다. 제가 칠판에 적어놓은 것은 일종의 사과문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랬습니다. 현재완료 구문을 가지고 한참 열을 올리며 수업을 하고 있는데 바로 코앞에서 장난질을 하는 아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떠드는 아이들 때문에 수업이 잘 되지 않아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조금 언성을 높여 앞으로 나오라고 하자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입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앞으로 나오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이를 그냥 다시 자리에 앉히고 수업을 진행합니다. 아주 산만한 아이가 아니라면 그 정도의 제지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지요. 떠들거나 장난질을 하는 아이들로 인해 자꾸만 수업이 끊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수업기술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는 것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마음의 고삐를 풀고 있어도 순식간에 분노의 화신이 되어 아이들에 저주 섞인 말을 퍼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날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움이 채 여과되지 않는 거친 말들이 제 입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그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야. 잘못을 했으면 나오랄 때 순순히 나오면 될 거 아니야. 잘못했다고 말하면 용서해줄려고 그랬어. 그런데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그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란 말이야."

아이의 반응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아이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채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지우개를 계속 던졌고 자신은 거기에 반응했을 뿐인데 왜 자기만 가지고 그러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더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럼 날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내가 신이야? 내 눈에는 너만 보여서 그런 건데 어차피 너도 잘못한 거니까 잘못했다고 말하면 쉽게 끝날 일 아니야. 그런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고? 그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야."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저는 이미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도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물러설 태세가 아니었습니다. 교실에서 상황이 수습되지 않자 교무실까지 불려온 아이는 억울한지 눈물까지 흘리며 미움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순간 저에게 이성이 찾아왔습니다. 미움이 미움으로 돌아온 것을 뒤늦게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만약 아이의 말대로 누군가 지우개를 던져서 일이 그리된 것이라면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라는 아이의 말은 너무도 당연한 항변인 셈입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던 것도 억울함의 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과 개인적인 취향을 내세워 아이를 몰아세웠으니 교사로서 참 미숙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뒤늦게 후회감이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물론 아이의 잘못도 지적해주었습니다. 제가 먼저 사과하자 아이도 고분고분 말을 듣는 눈치였습니다. 서로 화해의 악수를 하고 아이는 교실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앞에서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면 반장을 통해서라도 아이들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실에서 막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당번 아이 말로는 특별실에서 수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아이들이 다 나가고 당번 아이도 열쇠를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에서 잠시 서 있다가 칠판에 다음과 같이 적은 뒤에 교실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오늘 수업시간에 너무 화를 많이 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교실을 나오자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주말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아이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제 마음이 편하고자 그런 사과문을 적고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그 별거 아닌 사과문을 통해 한 순간이나마 진한 감동을 느낀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마음의 쓰레기 밭에서 '사과' 꽃 한 송이를 후끈 피운 것만 같습니다.

요즘 아이들을 만나기가 조금씩 쉬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제 인간적인 허물과 미숙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칭찬과 사과에 인색하지 않으면서부터 생긴 일입니다.


#순천효산고#시와 아이들#칭찬과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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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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