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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이는 고속도로 휴게소 중에서도 일반 이용자들은 잘 모르는, 트럭운전기사들이 잠깐 들러 졸음을 달래고 가는 후미진 곳에 자리를 빌려 판매대를 설치해 놓고 음료와 빵을 판다.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면 전화기에서 불이 난다. 때문에 늘 엄마한테 가고 싶어도 엄두를 못 낸다. 토요일 저녁에는 물류 운송이 거의 없는 편이라서 자리를 비워도 되기는 하지만, 밤샘을 하고 아침에 퇴근하다 보니 낮에 늘 비실비실하게 되고, 그래서 늘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실행을 하기가 어렵다.

 

 누이의 설명에 따르면 화물트럭 운전기사들의 노동 강도는 어떤 경우 상상을 불허한단다. 대기업 공장 화물일 경우는 지게차가 있어서 비교적 간단하지만 일반화물이나 영세 하청업체의 경우는 운전기사가 손수 화물을 실어야 한다. 오후 늦게 상차를 시작해서 밤도 늦게야 적재를 끝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바로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때문에 반드시 한 번은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눈을 붙이기 전에 햄버거나 토스트 몇 쪽으로 우선 배를 채운다. 차를 세워놓고 내려서는 운전자들은 대부분 눈에 잠이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빵 한쪽 줘요"해놓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대로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운전기사들에게 한 잔의 음료를, 한 입의 빵을 팔며 고생이 많다고 위로를 하고, 가끔은 웃으라고 농담도 건네는 것이 누이의 직업이다.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찍어내는지 몰라. 그 사람들 보면 그냥 눈물이 나와."

 

 누이는 말했다. 애가 타서 그냥은 그 모습을 못 본다고, 그래서 어떤 때는 돈을 받는 것도 미안스럽다고 했다. 그 미안스러움 때문이었던 것인지 작년에는 고창의 특산품으로 널리 알려진 복분자를 100킬로그램이나 즙을 내서 가져갔다. 누이의 부탁을 받고 오라비인 내가 택배로 보냈다. 그것을 운전기사들에게 서비스로 한 봉씩 준다는 것이었다. "복분자가 1킬로에 8천 원이 넘는데 장사 그렇게 하다가 없는 자갈논 팔아먹겠다"고 했더니 누이는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지 뭐" 하고 있었다.

 

 누이의 근무시간은 저녁 9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이지만, 시작과 마무리에 각각 한 시간씩이 따로 필요하고,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이 30분씩이다. 거기에다 성별이 여자이다 보니 화장도 해야 하고 옷차림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총 13시간여를 일에 바친다. 그리고 낮에는 거의 종일토록 잠을 잔다. 은행이나 건강보험 공단에 일이 있어서 나가면 거기서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사람은 역시 해가 있을 때 일을 하고 해가 없는 밤에는 잠을 자야 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이는 2년 전에 큰 수술을 받았다. 자궁경부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초기라서 즉시 수술을 하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다. 누이는 그런 진단을 받고도 두 달이 넘도록 고민을 하다가 오라비인 내게 전화를 했다.

 

 알코올 중독인 시아버지에게 사흘이 멀다고 머리채를 뜯기고 남편에게도 얻어맞는 결혼생활 11년, 누이는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았다. 그래서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할 보호자가 없었다. 그 일을 오라비가 가서 하고, 그리고 병간호도 했다. 주치의는 퇴원 뒤에도 삼 개월 정도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누이는 20여 일 만에 장사를 재개했다. 그동안 다른 사람이 봐주었던 장사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장사는 단골손님을 기다리는 재미로 하고, 단골손님은 주인을 보고 오는데 다른 사람 손에 맡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누이는 생각했다.

 

 누이가 여자이고, 오라비인 내가 남자라서 세세한 것은 물어보지를 못했지만, 수술 뒤의 노동에서 오는 신체적 고통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누이의 직업은 시작부터 끝까지 서 있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이 종일토록 잠을 자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한데 누이는 자기가 어머니를 모셔가겠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열흘이 멀다고 전화를 해서 그런 얘기를 하더니 겨울에는 다짜고짜 어머니의 옷을 죄다 꾸려서 가져가 버렸다.

 

        식탁에서 어머니와 누이
식탁에서 어머니와 누이 ⓒ 김수복

 그렇게 하면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겠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내가 딸이 아니라서 그 마음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방문을 잘못 열어도 짜증이 나지만, 딸은 어머니가 밥상 앞에서 똥을 싼다 해도 짜증보다는 안타까움에 눈시울이 젖어든다는 것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때문에 뚝 잘라서 안 된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다시 전화통화가 시작되었다. 겨울 지나고 날씨 풀리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는 말로 누이를 달래기 몇 번이었던가. 누이는 결국 어머니의 옷을 다시 가져왔다. 그 뒤로 한 달, 두 달, 얼음은 녹고 꽃들이 피었다. 누이는 잊지 않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전화가 왔고, 나는 12시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읍내로 나가 누이를 태우고 왔다.

 

 버스 터미널에서 집까지 23킬로미터, 평상시라면 20여 분 거리였다. 20분이면 충분한 이 길을 나는 한 시간 동안 천천히 달렸다. 그 사이에 말을 끝내야 했다. 어머니가 아무리 온전한 의식이 없다 해도 그 앞에서 남매가 옥신각신 목소리를 높여서 싸우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누이는 80년대에 지어진 허름한 5층 아파트에 월세를 살고 있었다. 집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흙집은 오래 되면 구수한 냄새가 나지만 시멘트 건물은 오래 되면 뭔가 썩는 듯한 냄새가 난다. 게다가 누이가 사는 데는 맨 꼭대기층이었다. 23센티 높이의 계단이 층마다 16개씩 64계단을 올라야 했다.

 

 "생각해봐라. 엄마는 마당에서도 한 걸음 옮기려면 한참을 걸려야 해. 그런데 계단을, 예순네 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가자면 몇 시간이 걸릴까. 한 번 계산해봐라. 그렇다고 네가 등에 업고 올라갈 수 있을까? 등에 업고 내려갈 수 있을까?"

 "한 층 올라가서 쉬고, 또 한 층 올라가서 쉬고, 그렇게 하면 되지 뭘."

 "좋아,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렇게 하자면 내려가는 데 한 시간, 올라가는 데 한 시간, 이렇게 해서 한 번 외출에 계단에서만 두 시간을 써야 한다. 너는 장사하는 데만 열세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데, 잠도 자야 하고, 그렇지? 그런 사람이 계단에서만 두 시간을 써 버린다면, 이게 말이 되겠냐? 그렇다고 어머니를 날마다 냄새 푹푹 풍기는 골방 안에 하루 종일 가둬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니냐. 내 말이 맞지?"

 "뭐여, 왜 자꾸 그런 쪽으로만 생각을 해?"

 "네가 자꾸 감상적으로만 생각을 하니까, 그래서 이성적으로, 현실적으로 생각을 좀 해보자, 이런 얘기야."

 

 누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 맥이 빠진 소리로 "에이 씨이"하고 중얼거리더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을 무연히 응시하고 있는 누이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다는 것을, 점차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숨소리만 거칠게 내고 있던 누이가 어느 순간 뺨이라도 한 대 때리듯이 소리를 꽥 질렀다.

 

 "오빤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거야?"

 "뭐? 그건 또 뭔 느닷없는 소리다냐. 너도 혼자 살고 있잖아."

 "난 여자고."

 "여자는 혼자 살아도 되고 남자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다냐?"

 "불법이 될 수도 있어."

 "뭐라, 불법? 불법이라니?"

 "어디서 무슨 사건이 생기면, 성범죄 같은 것이라도, 그런 사건이 생기면, 그래서 범인이 안 잡히면, 나라도 일단 혼자 사는 남자를 의심하게 될 거야."

 "얘가 근데, 너 지금 뭐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손톱을 깎고
손톱을 깎고 ⓒ 김수복

 자다가 벼락 맞은 꼴이었다. 누이와의 대화가 한참을 진행된 뒤에까지도 나는 누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처 몰랐다. 그 뜻을 온전히 파악한 뒤에도 가벼운 농담쯤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누이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하고, 인근 어디에서 며칠 전에 실제로 성범죄 같은 것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엄숙하기조차 했다. 얘가 비유를 들어도 왜 하필 그런,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지만, 무슨 족쇄 같은 것이라도 채워진 듯 턱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오빠는 너무 태평하고, 불행해 보이지가 않으니까, 하나도 태평해서는 안 될 사람이, 불행을 얼굴에 붙이고 다녀야 할 사람이, 그렇게 안 하니까, 누구라도 의심할 수 있지 뭐. 아 저 남자에게 뭔가 있나보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지."

 "아니, 야, 야, 잠깐만, 도대체 너는 왜, 응? 왜 생각을 그런 황당한 쪽으로 몰아가는 건데? 응? 뭐냐?"

 

 묻고 있는 나 자신도 지금 내가 무엇을 묻고 있는 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이는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미안스럽기도 했는지 "아니 그러니까 내 얘기는,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 얘기는..."그렇게 중언부언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이의 얘기인즉 내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한 재혼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자기가 어머니를 모셔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을 바꿀 이유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재혼이 필요한 이유가 하필 성범죄자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이를 온전히 제대로 설득했다고 속으로 의기양양해 있었던 나로서는 완전히 9회말 역전패를 당한 꼴이었다. 꿈에서도 본 적이 없는 뭔가 엄청난 것을 발견한 기분이기도 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한적한 오솔길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걷던 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괴한들에게 얻어맞은 듯 멍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더 이상은 뭐라고 입도 뻥긋 못하고 집에 도착한 뒤에서야 아 그래, 이것이 현실이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는 했지만 뭔가 참을 수 없다는 마음을 씻어내기는 어려웠다.

 

 7,80년대 대학을 다니는 자식들에게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은 절대로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어른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훈계는 노무현 대통령의 어머니께서만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아아, 인간이 자신의 피붙이를 지키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분위기가 2,3십 년 전의 그것처럼 다시 경직되어 있다는 증거인 것인가.

 

 딸을 보고서도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하고 누구시오? 누구시오? 하시던 어머니가 알아본 뒤에는 어디 사냐? 어디 사냐? 같은 질문을 스무 번도 넘게 되풀이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다는 듯 텔레비전이나 무연히 응시하는 동안 누이와 나는 다시 맞붙었다.

 

 누이는 아마도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라진 어머니의 태도에 은근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같이 자자고 딸을 잡고 보채시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불청객이라도 대하듯이 냉담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어머니의 심리상태를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 누이는 아마도 그것을 어머니의 증세가 악화된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어머니와 나를 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던 누이가 느닷없이 꽥 소리를 질렀다.

 

        발톱도 깎고
발톱도 깎고 ⓒ 김수복

 "오빠가 집에서 이러고 있는 거, 나는 꼴 보기 싫어. 내가 이런데 어떤 여자가 이런 집에 와서 산다고 하겠어."

 "너 보라고 이렇게 사는 게 아니야. 다른 어떤 여자 보라고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지."

 "이런 걸 좋아하는 남자가 어딨어요?"

 "왜 없어. 여기 있지. 너도 공부를 좀 해봐. 그러면 이런 삶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될 테니까."

 "아유 답답해. 도대체 무슨 말이 안 돼."

 "나는 나를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네가 답답하다. 답답해서 미치겠어."

 

 두 개의 레일이 수평으로 달리는 형국이었다. 이성은 너무 작고 감성은 너무 컸다.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그런 균형 잃은 대화가 텔레비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 누이는 잠도 아예 포기했던 것인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아침 7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본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너 뉴스 보지 마라. 그런 엉터리 뉴스를 보니까 네 머릿속에서 엉뚱한 생각이 자꾸 일어나는 거야. 그래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도 하게 되는 거고."

 

 누이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는 듯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누이의 성폭력 운운한 대목에서 내가 충격을 아주 많이 받은 것 같았다. 그것은 누이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이미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었다. 일단 그런 의심을 받게 되면 빠져나갈 길이 없겠다는 두려운 계산도 사실은 하고 있었다. 자기검열, 자기검열, 문자로만 접해 왔던 그놈의 자기검열을 내가 이제 실천하고 있는 셈이었다. 오, 시대가 언제 이렇게 변했는가. 생각하면 참혹했다. 그러나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누이와 어머니의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아침을 짓는 동안 물을 끓이고, 밥을 먹은 뒤에는 목욕탕에 물을 채웠다. 전날에는 오누이가 싸우느라 손도 대지 못한 수박을 원두막에서 쪼개 먹고, 누이의 손에 손톱깎이와 귀후비개를 쥐어주었다. 전날에는 딸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던 어머니는 이제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수박을 잘라 먹는
수박을 잘라 먹는 ⓒ 김수복

 아들이 목욕을 시킬 때는 거의 말이 없던 어머니의 입에서 딸과의 목욕은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그야말로 끊임없이 말이 쏟아지고 있었다.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머니가 아주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고, 내 입에서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톱을 깎을 때도, 발톱을 깎을 때도, 귀를 후빌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그 일을 할 때는 일 분에 한 마디씩 나오던 말이, 딸이 그 일을 할 때는 일 초에 한마디씩 나온다는 느낌이었다. 아들과의 시간은 일 초를 일 분처럼 쓴다면, 딸과의 시간은 일 분을 일 초처럼 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나절이 순식간에 지나 버리고, 이제 누이는 가야 할 시간이 되었지만, 오누이의 관계는 아직 껄끄러웠고,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고사리를 가져가라, 취나물도 가져가라, 이것저것 챙겨 내놓으면서도 내 말투는 부드럽지 못했고, 그런 것을 왜 자꾸 주려고 하느냐고, 필요 없다고 퉁퉁거리면서도 이내 가방이 작다고 혼잣말을 하는 누이는 계기만 적절히 주어진다면 금방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잣대와 저울로 계량할 수 없는 무한의 어떤 것이 누이와 나 사이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안도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누이를 보냈고, 누이는 그렇게 돌아갔다. 다른 때는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못다한 말을 하던 누이가 이번에는 전례를 따르지 않았다. 간단하게 그냥 "나 지금 도착했어"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 뒤로 사흘, 일주일, 열흘이 지나도 누이에게서 다른 말은 없었다. 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는 나로서는 살얼음판이라도 걷는 듯이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고,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라기나 할 뿐 아직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옳은지 가닥은 못 잡고 있다.

 

 성범죄자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 재혼을 해야 한다는 누이의 충고는, 이것은 어쩌면 내 생애 가장 큰 문제를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긴 자기검열이란 원래가 그렇게 엄중하고 비통한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 게다. 의식이 경직된 사회를 사람으로 산다는 것 속에 슬픔 말고 무엇이 또 있으랴.


#치매#어머니#누이#자기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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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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