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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사건 원인 발표가 있기 하루 전인 지난 5월 19일 오후 8시경 우리집 앞 바다 부근에서 조명탄이 발사되고 공포탄이 난사되었다.
 천안함 침몰 사건 원인 발표가 있기 하루 전인 지난 5월 19일 오후 8시경 우리집 앞 바다 부근에서 조명탄이 발사되고 공포탄이 난사되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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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따다당! 따따당! 따따당!"

2010년 5월 26일 오후 8시 5분 무렵, 산 너머 해변 어딘가에서 공포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소총 소리가 아닌 듯싶었다. 대공포에 가까운 기관총 난사하는 소리, 최소한 소총보다 화력이 강한 M60을 자동으로 튕겨대는 소리였다. 몇 초의 간격을 두고 연달아 갈겨댔다.

우리 식구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전남 고흥 해변가로 이사 온 지 4개월째로 접어들면서 두 번째, 며칠 전 밤에도 익히 들었던 공포탄 소리였기 때문이다.

'천안함 침몰사건' 조사결과 발표 전날인 5월 19일 오후 8시 15분 무렵에는 더 많은 총소리가 들려 왔었다. 그날은 수없이 많은 조명탄까지 쏘아 올렸다. 처음에 우리 식구는 그것이 조명탄인 줄 알지 못했다. 창문 밖으로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그 불명확한 불빛의 정체를 목격한 아내가 현관문 밖으로 뛰어 나가며 소리쳤다.

"야! 일루 줌 나와 봐봐! 어디서 불꽃 놀이하는가봐, 저기 하늘 좀 봐봐! 엄청 밝네."

조명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아내는 흥분된 목소리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밤하늘에 불꽃이 번지면서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동시에 축포보다 강렬한 소리가 연달아 사방팔방을 향해 무지막지하게 때려댔다.

"따따 다 당 따따당 따따다 땅!"
"가만 있어봐 저거 불꽃 놀이하는 소리가 아닌디."
"오늘 녹동에서 축제가 열린다는데 그거 같은데."
"녹동 방향이 아녀, 바로 요 앞에서 나는 소린디, 저거 총소리여 공포탄 소리."

분명 축포 소리는 아니었다. 자동으로 갈겨대는 기관총 소리가 분명했다. 조명탄이 하늘에 퍼지는 동시에 또다시 총소리가 난사되었다. 금방이라도 해변 어딘가에서 총알이 날아 들 것처럼 귀청을 때렸다. 나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집에서 직선거리로 1km 정도 떨어진 해안초소에서 발사되는 공포탄 소리가 분명했다.

공포탄 소리에 놀라 방안으로 뛰어들어온 곰순이

공포탄 소리에 겁에 질려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곰순이. 강아지는 곰순이 품으로 파고 들었다.
 공포탄 소리에 겁에 질려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곰순이. 강아지는 곰순이 품으로 파고 들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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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논에서 시끄럽게 개굴 대던 개구리 합창 소리가 뚝 끊겼고 우리집 개 곰순이와 새끼 강아지는 총소리에 놀라 거실로 뛰어들었다. 녀석들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듣는 끔직한 공포의 소리였을 것이다.

차를 몰아 마을 앞 해수욕장으로 내달렸다. 공포탄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집에서 빠져 나와 바다를 끼고 달리는 내내 조명탄과 총소리가 교차하면서 바다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다. 차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마을 앞 바다 한가운데에 조명탄이 낙하됨과 동시에 공포탄을 갈겨댔다.
 마을 앞 바다 한가운데에 조명탄이 낙하됨과 동시에 공포탄을 갈겨댔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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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해수욕장 앞에 도착 했을 때까지 내내 공포탄 소리가 이어졌다. 마을 해변 앞에는 용 섬이 있는데 그 주변을 중심으로 조명탄을 발사하고 있었고 거기를 향해 공포탄이 난사되고 있었다. 짐작대로 마을 해변 가에 자리한 해안초소에서 갈겨대는 공포탄 소리였다. 용섬 앞부분 해상에 가상의 적선 출몰을 염두에 두고 조준 사격 연습을 하는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뒤늦게 도착한 큰 아이 인효 녀석에게 조명탄과 공포탄 얘기를 해줬더니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이러다가 진짜 전쟁 일어나는 거 아녀, 아빠 처음에는 전쟁 난 줄 알고 겁났지?"
"아녀 인마, 내가 곰순이냐 그깟 공포탄에 겁을 먹게. 겁이 났다면 어떻게 그 근처로 갔건냐?"

26년 전 군대에서 겪은 실체 없는 공포감

조명탄으로 마치 보름달이 뜬 것처럼 마을 앞 해수욕장이 환해졌다. 동시에 해안초소 부근에서 공포탄이 발사되었다.
 조명탄으로 마치 보름달이 뜬 것처럼 마을 앞 해수욕장이 환해졌다. 동시에 해안초소 부근에서 공포탄이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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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없는 공포감. 나는 아주 오래 전, 그 실체가 없는 공포감에 치를 떨어야 했던 군 생활을 떠올렸다. 1984년 봄, 우리 부대원들은 사라지지도 않은 실탄을 찾아내야 했다. 그 실체가 없는 공포감으로 소대장들로부터 온갖 폭행과 기합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당시 나는 외무부장관을 비롯한 광주학살의 주역인 정호영(5·18 당시 특전사령관) 참모총장, 연합사 부사령관 등의 별 네 개짜리 군인들의 생활공간인 한남동 공관에서 헌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남동 공관으로 차출되기 이전에는 경기도 포천의 6군단 헌병대에 근무했었다. 포천에서 근무할 당시 우리나라에 단 두 군데의 한미 합동 검문소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축석검문소에 근무하다가 미군 헌병에게 45구경 권총을 들이댄 사건으로 부대에서 골칫거리로 낙인이 찍혔고(당시 그 소설과 같은 사건을 '누가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2003년 4월 19일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그해 겨울 한남동 공관으로 차출 되었던 것이다.

12.12 사태(1979년 12월 12일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당시 총격전이 벌여졌던 한남동 공관은 본래 해병대가 경호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1983년 겨울, 헌병들로 전격 교체 되었던 것이었다.

교체 원인을 두고 많은 말들이 떠돌았다. 일설에 의하면 '1983년 12월 부산 다대포 간첩 침투사건 당시 생포 간첩의 침투 목적은 요인암살. 그 무렵 별 네 개짜리들이 모여 있는 한남동 공관에 한 사내가 침입해 들어왔고 그를 잡지 못해 공관이 발칵 뒤집혀 공관을 경호 경비했던 해병대에 책임을 물어해체 시켰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 격투기 유단자를 비롯해 각종 운동주특기가 있는 헌병들을 차출해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군 간부들이 사라진 실탄을 찾으라고 한 이유

한남동 공관에 차출된 헌병들은 나처럼 신원이 깨끗한 반면에 대부분 전에 있던 부대에서의 골칫거리, 사고뭉치들이었다. 이른바 창설부대가 그렇듯이 부대를 이끄는 간부들로서는 먼저 군기를 잡는 것이 최우선이었을 것이었기에 우리는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가혹한 군기에 사로잡혀야 했다.

외출 외박은 물론이고 수개월 동안 부대 밖으로 서신 한통 전할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집합을 당해 몽둥이 찜질을 받아야 했다. 거기다가 1시간 근무하고 1시간 쉬는 막 교대 근무로 취침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욱 가혹한 것은 그 나마의 취침 시간을 쪼개 목봉 체조를 시켰고 거기다가 한 겨울에 알몸으로 얼음을 깨고 연못에 들어가 치를 떨어야 했다. 

또 전부대원들을 대상으로 비상을 걸어 사라진 실탄을 찾아내라 요구했다. 관물대는 물론이고 부대 곳곳을 이 잡듯이 헤집어 놓았지만 사라진 실탄은 나오지 않았다. 거기에 따라 구타와 고문에 가까운 온갖 기합을 받아야 했지만 끝내 사라진 실탄은 찾지 못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깨어 있는 고참병들이 상급 부대에 탄원서를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놈이 그 놈이었다. 깨어 있는 고참병들은 마지막 수단을 강구했다. 그것은 소리 없는 반란이었다.

"간부들이 뭔가를 요구하면 '예. 아니오'로 대답해라. 어차피 맞게 될 것, 때리면 맞아라. 기합을 주면 받아라. 무조건 '예. 아니오'로 대답하라."

부대원들의 갑작스런 단체 행동에 소대장들이 눈에 불을 켜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부대원들의 무표정이 달라지지 않자 급수습에 나섰다. 간부들은 부대원들에게 회식자리를 마련해주며 회유책을 썼다. 하지만 깨어있는 고참병들의 지시로 모든 부대원들이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부대장을 비롯한 간부들 모두가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결국 그들은 깨어 있는 고참병들과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참병들은 병사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소대원들의 기합과 구타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한 달도 채 안 돼 '소리 없는 반란'을 주도했던 깨어 있는 고참병 두 명이 어느 날 갑자기 전방으로 전출되었다.   

'안보 회식자리' 걷어치우고 말없이 '투표'하자

제대하던 날 회식자리에서 소대장들에게 물었다. 당시 정말로 실탄이 분실되었었는가 물었지만 대답을 회피했다. 깨어있는 고참병들은 알고 있었다. 분실된 실탄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대에서 군기를 잡기 위해 부러 실탄을 감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공포감에 휩싸이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었다. 다만 분노했을 뿐이다.   

1984년 봄. 그 정체가 없는 실탄 분실 사건으로 공포감에 떨어야 했던 한남동 공관 경비대의 우리 부대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26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국민들이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정체가 없는 '전쟁'이라는 공포감에 사로 잡혀 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을 책임져야 할 인간들이 뻔뻔하게도 국민들을 대상으로 전쟁이라는 공포탄을 난사해 군기를 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깨어있는 고참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실체가 없는 공포에 대항할 '소리 없는 반란'이 필요할 때다. 그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투표다. 그들이 차려놓은 '안보의 회식자리'를 걷어치우고 말없이 투표를 하는 일이다.

그날 밤. 공포탄 소리가 멈추자 집 앞 논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개굴 거리던 개구리들의 합창소리가 다시 요란해 졌다. 공포탄이 사라지자 평화로운 밤이 다시 찾아들었던 것이다.


태그:#공포탄과 축포, #실체 없는 공포, #천안함 침몰, #사라진 실탄, #소리없는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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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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