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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을 들어서는 길에 만난 비석과 부도밭

 

 대흥사 부도밭
대흥사 부도밭 ⓒ 이상기

 

녹우당에서 두륜산 대흥사 가는 길은 삼산면 소재지를 지나 장춘리로 이어진다. 대흥사천을 따라 이어진 장춘리 가로수 길은 정말로 명품 숲이다. 봄에는 신록이 좋고, 여름에는 초록이 좋으며, 가을에는 단풍이 좋다. 제5장춘교를 지나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오른쪽 길이 차도로 사용되고 왼쪽 길이 인도로 사용된다.

 

우리는 차로 왔으니 오른쪽 길로 해 일주문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마침 이날 490주년 서산대제가 봉행되어서인지 주차장이 만원이다. 서산대제란 서산대사 휴정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로, 대사가 출생한 음력 3월에 거행된다. 일주문을 지나 절쪽으로 가니, 길 오른쪽으로 비석과 부도밭이 나타난다. 다른 절에서는 비석과 부도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는데, 이곳 대흥사에서는 비석과 부도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월저대종사 비석
월저대종사 비석 ⓒ 이상기

 

부도밭에는 풍담(風潭)선사로부터 초의(草衣)선사에 이르기까지 13종사(宗師)와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강사(講師)의 부도와 비석이 있다. 그 중에서도 3대 월저(月渚)대종사의 비문은 아직도 선명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법명이 도안(道安)으로 1638년에 기성(箕城)에서 태어났다. 초대대종사인 풍담 의심(楓潭 義諶)의 제자로 화엄학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그는 강학과 불경 간행에 힘을 쏟았고, 1715년에 입적했다. 이 비문은 홍문관 대제학인 이덕수(李德壽)가 지었다.

 

그 외에도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지은 9대 상월(霜月)대종사 비명도 눈에 띈다. 그 내용 중 인상적인 것은 깨달음과 계율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처음 공부하는 자는 깨달음의 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고, 재주가 뛰어난 자라도 계율을 간략히 해서는 안 된다.(不以初學而忽覺路 不以高才而略戒律)"

 

서산대사 이야기

 

 서산대사 부도
서산대사 부도 ⓒ 이상기

 

그런데 이들 13종사와 13강사의 뿌리가 서산대사이다. 그러면 서산대사는 대흥사와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평안도 안주의 완산최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과거에 뜻을 두고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리산을 유람하다 숭인(崇仁) 장로를 만나 머리를 깎고, 도솔암 삼소굴 (三笑窟)에 들어가 안거하였다.

 

6년간의 수도를 마친 후 그는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지었다.

 

머리카락이 희다고 해서 마음까진 흰 건 아니라고, 髮白心未白

옛 사람들이 일찍이 말했다지.                            古人曾漏洩

이제 닭 우는 소리를 들으니,                              今聞一聲鷄

장부의 할 일을 능히 알겠도다.                           丈夫能事畢

문득 내 집의 뿌리를 알고 나니,                          忽得自家底

낱낱의 일들이 그렇고 그렇구나.                         頭頭只此爾

만천의 보배라는 대장경조차도                           萬千金寶藏

본래는 하나의 종이쪽지였다지.                          元是一空紙

 

대사는 1550년 승과에 합격, 선교양종 판사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출가의 본뜻이 벼슬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두류산,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찾아 수도와 가르침을 병행한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하기 위해 승군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때 대사의 직책은 8도16종 선교도총섭이었다.

 

 서산대사 영정
서산대사 영정 ⓒ 이상기

 

전쟁이 끝나자 대사는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내다 1604년 그곳 원적암에서 입적하였다. 대사의 입적 후 행장을 사명대사 유정이 썼는데, 그곳에 서산대사와 대흥사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죽은 뒤 의발을 호남도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로 옮긴 다음 기일(忌日)에 제사지내도록 해라. 두륜은 바닷가 멀리 떨어져 있어 명산은 아니지만 세 가지 뛰어난 것이 있어 중히 여겨야 한다.

첫째는 […] 영구불멸하고 영원히 (법맥을) 이어갈 지역이다. 또 바다와 산이 서로 호위하므로 마을과 골짜기가 깊고 그윽해 만세동안 헐어 깨뜨릴 수 없는 땅이다. 둘째는 서울까지 천리나 되는 먼 거리지만 표수풍성(表樹風聲)하여 우매하고 미혹한 습속을 물리칠 수 있다. 셋째는 처영(處英)과 모든 제자들이 남쪽 지방에 있고, 나 또한 두류(頭流: 지리산)에서 불법을 들었으니 이곳을 종통으로 삼아야 한다."

 

 서산대사 비석: 가운데 왼쪽 귀부가 있는 비석
서산대사 비석: 가운데 왼쪽 귀부가 있는 비석 ⓒ 이상기

 

이 행장을 근거로 월사 이정구와 계곡 장유(張維: 1587-1638)가 서산대사 비문을 지었다. 이중 월사의 것은 금강산 백화암에 세워졌고, 계곡의 것은 두륜산 대흥사에 세워졌다. 그래서 대흥사 부도밭에는 서산대사의 부도와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곳의 '청허당 보제선사비'에 따르면, 휴정은 "한평생 바보같이 살지언정 문자 가르치는 선생 노릇 안 하리라"고 마음먹는다. 비문에는 임진왜란시 의승군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대사의 위대성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죽이고 살리는 일에 자유로웠고  殺活自由

숨고 나오는 일 장애가 없었으니 隱見無累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 일을       世出世間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도다.        兩盡能事

 

서산대제 덕에 점심공양까지

 

 해탈문을 통해 바라 본 대흥사와 두륜산
해탈문을 통해 바라 본 대흥사와 두륜산 ⓒ 이상기

 

이들 비석과 부도를 보고 해탈문으로 들어서니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인자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해탈문에 문수와 보현보살을 안치하는 방식은 월출산과 두륜산의 절에서 종종 확인된다. 해탈문을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니, 가련봉에서 두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흥사는 두륜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천혜의 명당이다.

 

시간을 보니 벌써 12시가 넘었다. 서산대제가 끝났는지 표충사로부터 신도들이 천불전 앞길을 지나 북원의 대웅보전 쪽으로 간다. 그들에게 물으니 청운당에서 점심공양이 있다고 한다. 아내와 나도 아직 점심 전이라 그들을 따라간다. 대흥사는 금당천을 경계로 북원과 남원으로 나눠진다. 금당천을 건너 침계루를 지나면 대웅보전 앞마당에 이르게 된다. 평상시 같으면 대웅전으로 바로 올라가겠지만, 지금은 점심공양이 먼저니 오른쪽에 있는 청운당으로 향한다. 청운당은 응진당과 삼층석탑을 지나 북원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점심공양 비빔밥
점심공양 비빔밥 ⓒ 이상기

 

그곳에 가니 벌써 점심공양이 한창이다. 우리도 비빔밥을 하나 들고 앉을 만한 곳을 찾는다.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비빔밥을 식탁 위에 차려 놓고 각자 가져가도록 하고 있다. 서산대제를 위해 이곳 식당에서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비빔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는 빈그릇을 설거지하는 곳에 갖다 준다.

 

대흥사 북원에서 다시 만난 원교와 추사의 글씨

 

 대흥사 3층석탑
대흥사 3층석탑 ⓒ 이상기

 

점심을 먹고 나서 아내와 나는 천천히 북원에 있는 문화재와 건물을 둘러본다. 먼저 3층석탑(보물 제320호)이 눈에 들어온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백제계인 월남사지 3층석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붕돌의 처마가 경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상륜부의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등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 탑은 북미륵암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또 하나 북원에서 눈에 띄는 것이 윤장대다. 윤장대는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으로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일종의 장경각이다. 그런데 이런 윤장대가 건물 안이 아닌 땅위에 독자적으로 세워진 것은 처음 본다. 그러다 보니 일반 신도들이 부담 없이 돌릴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일반적으로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지 않아도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윤장대에 자신의 희망과 소원을 담은 발원문을 넣고 돌리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도 한다.

 

 대흥사 북원 대웅보전
대흥사 북원 대웅보전 ⓒ 이상기

 

윤장대 옆에는 북원의 중심전각인 대웅보전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보전은 1667년 세워졌고, 1899년 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건물에는 이행종서로 '대웅보전' 편액이 걸려있다. 이것은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글씨로 한 때 추사에 의해 떼어지는 운명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침계루: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침계루: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 이상기

 

 백설당에 걸려있는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
백설당에 걸려있는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 ⓒ 이상기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침계루가 있고, 서쪽에는 백설당이 있다. 침계루는 금당천(金塘川)에 면한 2층 누각 건물로 북원의 출입문이다. 금당천에 놓인 다리인 심진교(尋眞橋)에서 바라보면 침계루(枕溪樓)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이것 역시 원교의 글씨다. 대웅보전 서쪽의 백설당은 절 안의 스님들이 모여 공양과 정진수행을 하는 대중법요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설당에는 제주도 유배 중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그러므로 대흥사 북원에서는 추사와 원교의 글씨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두륜산#대흥사#서산대사#13종사#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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