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느라 새벽에 들어온 것이지만 자신에게 수모를 안겼으니 박봉사가 찾아와도 응어리진 마음을 풀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듯했다. 구겨진 옷을 툭툭 털고 큰 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새신랑이 들어오는 걸 포기하고 물러나자 박봉사는 아랫것들을 데리고 신방으로 향했다. 거칠게 문짝을 거덜 내고 신방에 있는 사내의 멱살부터 잡아끌었다.
"그 놈을 뒷마당으로 끌어내라! 내 오늘 사람 죽는 걸 보아야겠다."맹구의 우악스러운 손끝이 젊은이를 짐승처럼 끌어내 뒷마당에 패대기치자 우레처럼 박봉사의 호통이 쏟아졌다.
"이놈! 네 죄를 알렷다!""무슨 일인지 모르나 잘못이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지난밤 일은 몇 번을 거듭 생각 해도 시생의 죄라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길 가던 나를 이 댁 하인이 다짜고짜 방에 집어넣었으니 술 취한 나로선 과수댁이나 기생방이라고 생각할밖에 없었습니다."
"어허, 저저저 놈의 주둥일 봤나! 네 이놈, 그걸 말이라 하느냐! 신방엔 합환주가 있고 족두리 쓴 신부도 있었다. 처자가 있었다면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데 내 딸 아이가 있는 걸 얼씨구나 생각하고 처녀의 몸을 건드려 내 딸 신세를 망쳤겠다! 네 놈의 죄를 물어 그 잘난 양경(陽頸)을 작두로 잘라 개 먹이로 삼을 것이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 보거라!"참으로 황당한 일이어서 사내로선 망연자실이었다. 안채에선 이댁 마누라가 달려 나와 남편의 진노를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박봉사는 오히려 당당하게 일을 끌고 나갔다.
"그 놈과 하룻밤 잤기로 대수로운 건 아니다. 한강물에 나룻배 떠가는 격이니 아랫것들 입단속하면 누가 아리! 못난 놈은 새신랑인지 술에 미친 작자일 것이다. 제놈이 처신을 잘못해 헌 계집과 사는 걸 누굴 원망해! 제 스스로의 불찰로 생긴 것이니 너는 입 다물고 가만있으면 된다."
"하오나 아버님."
"정신 빠진 작자가 술 마시러 가지 않았다면 이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 저놈의 목을 뒷마당에 묻고 신랑을 불러 다시 날을 잡아 신방을 치르시오. 부인은 딸아이의 신방맞이에 신경 쓰시고 바깥일은 내게 맡겨요."당장 거덜이 날 소란은 정오를 넘기면서 잠잠해졌다. 소문이 담을 넘어 나갈 리도 없는데 제중당 한약방의 이주부가 찾아들었다.
"어인 일인가, 내게 볼 일 있는 것도 아닐 터이고?"
"지난밤 도깨비가 장난친 탓에 상삿골의 말들이 밤새 울었다는 소문이 있어 길을 나섰습니다만···, 박봉사께선 큰일 치르느라 정신없었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 사람 이주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렇듯 안갯속을 헤엄치듯 말 하니 알아들을 수 있나?"
"말씀 드리지요. 간밤에 귀한 약초를 들고 한양에 나타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약초를 사려는 분의 집을 가르쳐 달라기에 약초꾼들이 술 한 잔 뺏어먹고 반농담 삼아 이 골목 어딜 가르쳐 준 모양입니다. 아침에 약초꾼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 젊은이가 간 곳을 찾았더니 박봉사 님 댁이지 뭡니까.""그 젊은이가 이곳에 있을 거라 그 말인가?"
"찾으러 온 건 맞습니다만 시생이 필요한 건 그 젊은이가 아니라 봇짐에 든 약초지요. 시생이 일찌감치 일을 보러 나섰는데 이 댁 새신랑이 색주집에서 고주망태가 돼 봉사님 댁 문간에 서 있는 걸 봤습니다. 신방에 있어야 할 새신랑이 나룻배마냥 떠다닌 걸 보고 짐작되는 바 있어 모른 척하고 기다렸지요. 잠시 후 큰길 쪽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새신랑은 종운가(鍾雲街) 큰길가에 있는데 집이 있는 보문동 쪽으로 터벅터벅 가지 뭡니까. 그제야 시생은 간밤에 신랑이 바뀐 걸 알았습니다.""고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고변이라니 그 무슨 말씀을···. 시생은 우주 자연과 협상하는 의원이니 중간 역할에 이골이 났습니다. 몸이 아픈 자에게 치료약을 주고 기력이 약한 자에게 강정을 도와주는 게 시생의 천직이지요. 이유야 어떻든 봉사님께선 집안을 들쑤신 사내처리에 여러 생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박봉사의 노기어린 시선이 쏘아오는 걸 이주부는 딴청을 부리듯 피하며 뒷말을 이었다.
"봉사어른, 시생은 이 댁 소란은 관심없습니다. 조금 전 말씀 드린 것처럼 시생의 관심은 사내 봇짐 속에 든 약촙니다. 그것을 시생에게 줄 수 있다면 나으리 집안의 고민은 쉬이 풀릴 수 있습니다."이주부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생각을 은밀히 속삭였다. 무덤덤히 상대의 말에 귀를 열던 박봉사는 짧고 단호하게 결정했다.
"자네 말을 따르겠네만 분명한 건 그 자를 살려둬선 안 되네. 그 놈 처리까지 맡는다면 이주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그 놈은 잠시 후 서편에 있는 광으로 옮겨질 것이네. 흐음!"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그날 오후 박봉사는 왜가리 매파에게 혼서를 쥐어 윤참봉 댁으로 경고의 말과 함께 보냈다.
<아무리 주도(酒道)가 그 나이 또래 젊은이에게 운치있는 일이긴 하나 혼인은 인륜지 대사니 나름대로 법과 질서가 있는 법입니다. 신랑이 벌인 행동으로 봐선 이번 혼사를 파해야 옳으나 주위 이목이 있으니 한 번쯤 참는 수밖에 없는 듯 합니다. 이번에도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추행이 있을 때엔 딸아이 혼사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혼례는 내일 하루를 건너 뛰어 모래 정오에 치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윤참봉 입장에서도 드러내놓고 따질 순 없는 일이어서 입맛을 다시며 박봉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혼례는 두 번이나 치른 것이 돼 정오에 식을 올렸다.
진눈개비가 하늘거리는 참이라 오후 늦게야 신방을 차렸다. 박봉사의 엄명으로 신방 근처엔 어느 누구도 인접치 못하게 돼 무사히 밤을 새운 것이다.
닭은 두 번 운다. 첫 번째 우는 닭은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계명축시다.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다. 두 번째 우는 닭은 밤사이 사냥 나간 호랑이가 단잠을 자려고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가는 호명인시다. 사내의 힘은 이 시각에 용솟음치므로 대개 남녀간의 새벽유희는 이때쯤이다.
은옥이가 코끝에 어리는 비릿한 내음에 눈을 떴을 때는 두 번째 닭울음이 목청껏 새벽을 깨울 무렵이었다. 무의식중에 한 손을 새신랑 가슴 쪽에 옮기던 은옥이는 섬찟한 불안감에 눈을 떴다. 손끝에 묻은 건 물보다 진한 끈끈한 피였다.
"아악!"새신랑은 뾰족한 날붙이에 내막(內膜)이 뚫려 즉사했다. 닭이 깨운 어둑새벽에 비명을 내지르며 은옥은 혼절해 버렸다.
사헌부에서 나온 정약용은 살해 현장에서 포교들을 지휘했다. 혼절한 은옥을 안방으로 옮겨 치료하고 신방엔 사람 출입을 막는 금줄을 치고 사체의 정황부터 살폈다.
대부분 신방은 외방객들이 신방맞일 구경하느라 여기 저기 구멍이 뚫리기 마련이다. 그래선지 그곳에도 여섯 개 정도 구멍이 나 있었다. 문 아래쪽 세 치 어림에 뚫린 구멍 아래쪽으로 타다 남은 재가 눈에 띄었고 뚫린 구멍은 어린아이 손가락 굵기였다. 안으로 들어간 정약용이 물었다.
"죽은 자는 누군가?""내의원의 윤참봉 자제라 했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미목이 수려해 인물났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인물 됨됨이가 술과 도박을 좋아해 난봉꾼으로 장안에 알려졌습니다. 그런 자가 제 아비의 후광으로 장가들었는데 신방맞이 첫 날에 이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박봉사로선 품계가 윗전이라 좋은 혼처로 여겼겠지. 감지덕지 했을 지도 모르고. 한데 죽임을 당했다, 우발적으로 보기엔 사체의 상흔이 평범하질 않아."날붙이가 관통했으니 단순한 자상(刺傷)으로 보이지만 초야를 노리고 들이밀었다면 이건 치정에 얽힌 살인이다. 더군다나 목숨이 끊긴 신랑의 팔엔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등엔 칼끝으로 새긴 우(又)란 흔적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었다.
"장안엔 오래 전부터 칼계란 패거리가 있다. 포청을 비롯해 사헌부에서도 그 일에 종사한 자들을 몇 번이나 취조한 경험이 있다. 사람 죽이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인 데다 손속이 악랄해 그 동안 포청에선 잡기만 하면 거칠게 고문한 후 망나니 칼날에 목을 떨궜습니다.""흐음."
정약용이 곤혹스러운 낯으로 손에 든 불자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사체 등에 나타난 글자가 우(又)로 보아 어김없는 칼계 흔적입니다."
"신방을 찾아와 글자를 남겼다?""윤참봉 아들이 평소 난잡스런 행위가 많았고 보니 그에 대한 보복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신방에 들어온 건 어찌 보나?"
"문지방 아래 타다 남은 재의 흔적으로 보아 들어오기 전 수면향(睡眠香)을 피워 방안에 연기를 넣은 것 같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한차례 정을 나눈 후였을 것이니 그들이 수면향에 취했다면 세상 모르게 떨어졌을 것입니다."
"흐음, 조선의 조직폭력배란 칼계는 몸에 특별한 흔적 대신 칼자국만 남기는 것으로 알고 있네. 그런데 죽은 자는 몸에 새 한 마리가 그려졌질 않는가. 이건 무슨 뜻이야? 칼계에서 그런 방법을 썼다면 특별하다고 봐야겠지."그 말에 누군가 답을 하고 나섰다. 사헌부에서 파송된 다모 서과였다. 그녀는 하속배 차림으로 방에 들어와 사체의 등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 일은 칼계에서 손 쓴 게 아니라 왈자들입니다. 칼끝으로 우(又) 자를 새겨 칼계 흉낼냈지만 이것은 차(叉) 자에요. 하루 전 수표교 물웅덩이에서 표씨 성을 쓰는 사내가 죽어 있는 걸 발견했는데 그 자의 등에 쓰인 것도 차(叉)잡니다."
정약용이 불자로 반대쪽 손바닥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섰다. 왜 하필이면 혼례를 올린 신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간추린 모양이나 생각나는 건 없었다. 사회혼란을 일으키는 칼계 도당이라지만 혼인과 상가를 습격해 살인을 저지르는 일은 없었다.
칼계는 본시 향도계(香徒契)에서 출발했다. 이 계는 장례를 치르기 위한 모임으로 부모형제가 죽어 장례를 치를 때엔 돈이 많이 들어 얼마간의 돈을 염출해 구성원 중에 상을 당한 사람을 거들어주는 계였다. 문제는 향도계의 도가(都家)다.
도가는 어떤 곳인가. 이곳은 향도계 안에 마련된 비밀조직으로 죄를 지어 법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자를 숨겨줘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포청에서는 도가 내부에 스며있는 칼계 조직에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주]
∎불자(拂子) ; 지휘계통에 있는 자가 들고 다니는 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