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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 달여 전 고추모종을 할 때만 해도 보이던 할머니가 요 며칠 안 보인다 싶더니 마당에서 콩이 자라고 있다. 걸레나 수건 혹은 양말짝들이 늘 널려 있던 빨랫줄은 어디로 갔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고 마당 입구에는 커다란 각목이 길게 누워 있다. 이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들어오지 마세요 하는 듯이 그렇게 가로질러진 각목을 우두커니 서서 보고 있자니 어디서 문득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집도 절도 없이 부부가 늘 서로를 불러대며 여행만 다니는 뻐꾸기, 새끼를 낳아서 기르는 시간조차도 아깝다는 듯이 남에게 몰래 맡겨놓고 아침이면 뻐꾹, 뻐꾹, 뻐뻐꾹, 뻐꾹, 부부가 서로 다른 소리로 노래를 하고 저녁 무렵이면 연못에서 교대로 하나는 망을 보고 하나는 목욕을 하는 뻐꾸기, 그들의 삶이 새삼스레 부러워지는 날이다.

 

오랜만에 나선 산책길이었다. 비도 안 오면서 구름은 잔뜩 끼여 있었다. 하늘이 마치 크게 한 번 뜀뛰기를 하면 머리에 닿을 것 같았다. 이런 날에 부지런한 사람은 일하기 좋다고 열심히 일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반동분자'인가 보다. 일은커녕 걷기에 좋다고 아무 할 일도 없이 걷는 연습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걷는 연습'이란 오래 전에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이었다. 서울에 주소를 두고 있던 시절의 여름에 이를테면 휴가를 왔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버지는 벌써 들에 나가고 안 계셨다. 어머니는 텃밭에서 호미로 풀을 메고 계셨다. 아들이 일어났는데도 밥 줄 생각은 안 하고 일만 하시는 어머니가 나는 아마 은근히 야속했을 것이다.

 

부모님에게는 그 시간이 일하기에 딱 좋은 때이겠지만 어쨌든 내게는 이제 겨우 아침인 것이다. 토방에 쭈그리고 앉아 어머니의 일하는 모습을 잠깐 보다가 일어섰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여유도 만만하게 집을 서너 바퀴쯤 돌고 있는데 어머니가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는 듯 한 말씀 하셨다.

 

 "믓허냐?"

 "나요? 산책해요."

 "오살허네. 네가 시 살 먹은 애기냐. 걷는 연습을 하게."

 

 분명 웃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웃지도 않고 너무도 진지하게 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잠이나 처자고 있는 아들이 미웠을 것이다. 늦게나마 일어났으면 '에미년' 일하는 데 와서 거들 생각은 안 하고 산책이라는 것이나 하고 자빠졌으니 칵 때려주고도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걷는 연습'이라는 표현에 나는 혼자서 배가 터지도록 웃고 말았다. 어머니도 결국은 죽는다고 웃어주었다.

 

 그때의 그 어머니가 지금은 아들을 오빠라고 하신다. 치매가 무서운 것이라고는 해도 이럴 수가 있는가 싶은 순간들이 너무도 많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제 지팡이가 없으면 두 발로 서지도 못하신다. 한 걸음을 떼자면 한참이나 걸려야 한다. 그것조차도 온전하지가 않다. 발을 들었다 하면 벌벌 떨린다. 떨리는 발을 내려놓고 다른 쪽 발을 들면 그 발이 또 벌벌 떤다. 벌벌 떨다가 기어이 주저앉기도 한다. 어머니는 그렇게 아이가 되어 버렸다.

 

 오래지 않아 어머니는 그런 걸음조차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월이라는 두 음절이 목구멍에서 컥컥 소리를 낸다. 새삼스런 감정도 아니련만 뭔가 참을 수 없다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오랜만이었다. 가끔 개들이나 짖어댈 뿐 마을에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여기저기 빈 집을 기웃거리며 건들건들 걷고 있는 나를 멀리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하이고, 저 사람 팔자 좀 보라지."

 

 따지고 보면 내 팔자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돈이라는 이름의 토끼장 같은 감옥으로부터 나 자신을 탈출시키느라 드린 공력이 얼마였는가를 안다면 누구도 함부로 팔자를 언급하지는 못할 터이었다.

 

 적게 벌어서 적게 쓰기, 가능한 한 아예 안 벌어서 안 쓰기. 이런 개똥철학을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마음껏 실천하며 살기로 할 것 같으면 아마도 깊은 산중으로나 들어가야 할 것이다. 삶의 방식이 이미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마을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미친놈 되는 것 하루아침이다.

 

 다행이라고나 할까. 나는 아직 마을에서 미친놈까지는 안 되었다. 그저 팔자가 좋아서 일도 안하고 사는 그런 사람쯤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내 팔자가 얼마나 좋은 것으로 소문나 있었던가를 말해주는 아주 좋은 사례가 있었다.

 

 이사 온 이듬해의 초여름 어느 흐린 날 마당에서 봉선화 모종을 하고 있는데 웬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누가 왔는지도 몰랐다. 그때는 개가 없어서 신호를 보내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암튼 혼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릿느릿 모종을 하고 물을 주려고 일어서는데 다섯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 웬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

 

 "오매 깜짝이야."

 

 내 습관 중에 하나가 뭔가 낯선 것을 발견하면 과장된 몸짓을 한다는 점이다. 그날도 나는 금방 넘어지기라도 할 듯이 과장스런 몸짓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귀엽다는 듯이 나를 보며 헤, 웃고 있었다. 그랬다. 정말이지 그 아주머니의 그날 그 웃음은 헤, 하고 웃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느긋하고 다분히 장난기마저 있어 보였다. 뭐랄까, 귀여워서 금방이라도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줄 것 같은 그런 웃음 말이다.

 

 "아따 뭔 남자가 꽃을 겁나게 좋아하는 게비요 잉?"

 "네? 아 예 뭐, 하는 일이 없으니까 그걸로 일을 삼는 거죠 뭐."

 "돈은 많이 갖고 왔소, 오?"

 "네?"

 "아 서울서 살다가 왔담서요. 서울 집 한 채가 여그 집 이백 채도 넘은게."

 "아이고 아니에요. 저는 밥 한 공기에 반찬 한 가지면 되는데요 뭘."

 "아따 누구는 뭐 한 끼에 밥 두 공기 먹고 산다요."

 "허허, 아 예, 뭐 그렇군요."

 

동문서답이라고나 할까. 그런 질의응답 시간이 아마 삼십 분도 넘게 이어졌을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방에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봉선화 모종을 중단하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와락, 와락 겁이 나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자꾸 내 옆으로 붙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아마 들어간다는 말도 안 하고 그냥 방으로 도망을 했던 것일 게다.

 

그랬다. 거짓말 하나도 없이 정말로 도망을 했었다. 가슴은 확확 뛰고, 얼굴은 뜨겁고 도무지 정신이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정신으로 한참을 방에서 오락가락하다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안 보였다. 아, 돌아갔나보다, 겨우 안심을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방에서 믓 하시오?"

 

뭐냐 이거, 이 아줌마가 왜 이러냐. 미쳤냐.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그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말은 아니었다. 소리였다.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미치광이처럼 꽥꽥 소리를 질러댔을 터이다. 어쨌든 아주머니는 바로 돌아가 주었다.

 

그 뒤로도 그와 유사한 사례는 몇 번 더 있었다. 내가 아무리 내 수중에 돈 같은 것은 없다고 그런 암시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나는 외관상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마당에서 꽃이나 가꾸며 사는 '팔자 좋은' 남자인 것이었다. 당신들이 일 년에 세 벌의 옷을 산다면 나는 삼 년에 한 벌의 옷도 살까말까 하답니다, 양말도 기워 신고, 운동화를 수선하는 기술도 대단하지요, 등등 이런 말을 해도 농담으로나 여길 것이 너무도 뻔했다.

 

 하루는 아랫집 할아버지가 넌지시 귀띔을 해주기도 했다. "마누라 필요하믄 나한테 말만 혀, 잉? 아직 젊은 사나이가 혼자 있어서야 되겠는가,"

 

 글쎄, 그런 친절 앞에서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할 말이 잘 생각 안 나서 그저 웃고 말았다. 품팔이 거리가 있는 한 놀지 않고 일을 나가는 그녀들의 삶을 내가 따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일을 나가는데 나는 집에서 놀기나 하는 삶의 방식을 취할 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었다. 나는 뭐라고나 할까, 놀면놀면 그렇게 천천히 살고자 서울을 등지고 내려온 것이지 날마다 뼈빠지게 일하며 살려고 시골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을, 그녀들의 삶을 나처럼 게으른 쪽으로 바꾸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미친놈'이 되고 말 터이었다.

 

한때는 백삼십 가구 육백여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마을이었단다. 내가 올 당시에는 열다섯 가구밖에 안 남아 있었다. 한 집 건너 네다섯 집이 비어 있거나 이미 철거를 해서 텃밭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 혼자 사는 집이 많았다. 마을 전체 열다섯 가구 중에 할머니 혼자서만 사시는 집이 다섯이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렇게 두 식구인 집이 셋이나 되었다.

 

그것도 한두 해 그렇게 산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칠팔 년이 넘어 있었다. 탄광촌도 아니고 어촌도 아닌데 웬 과부들이 이렇게도 많을까, 역시 결혼이란 남자가 연하인 것이 적절한가보다, 어쩌고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마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 한 분이 유독 내 시선을 끌었다. 그 할머니는 뭐라고나 할까, 어머니와 닮은 데가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아마 보고 또 보고 했을 것이다. 볼 때마다 뭔가를 하고 계셨다. 일 없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연로해서 손이 느린 까닭에 남들 다하는 품앗이도 못하고 항상 혼자서 일을 하셨다. 갈림길 같은 데서 쪼그리고 앉아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들 중에 그 할머니가 끼어 있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른 봄에 복분자 가지 치기를 할 때도 혼자였고 그 열매를 수확할 때도 혼자였다. 폭염이 들들 끓는 고추 밭에서도 혼자였고 가끔 한 번씩 시장을 갈 때도 혼자서 아스팔트길을 땀박땀박 걸었다. 복분자를 따거나 고추를 딸 때도 남들은 모두 파라솔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며 그늘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했지만 그 할머니는 마치 태양과 대결이라도 하듯이 머리에 수건 하나만 달랑 두른 채로 밭고랑을 기다시피 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리면 그 할머니는 "예." 하고 아주 짧게 잠깐 고개를 들어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흐르기는 했지만 표정은 항상 굳어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이내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가곤 했다. 다른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은 옆에서 말을 붙이면 반가워서 하던 일을 멈추고 멍석이라도 깔 듯이 자리부터 잡지만 그 할머니는 달랐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살가운 척하며 끼어들 틈이 전혀 없는 할머니였다.

 

 만나보고 싶은 할머니였다. 한 달이면 평균 다섯 번도 넘게 보면서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늘 간절하게 드는 할머니였다. 어느 하루 밤에 막걸리나 음료수나 뭐 그런 것을 사 들고 가서 조용히, 도란도란,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게으름에도 어느 정도가 있어야 할 텐데 늘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실천은 한 번도 못한 채로 해가 가고 또 가고 그렇게 5년을 보내고 말았다.

 

앞에 3년은 집수리를 한다 어쩐다 이것저것 신경쓸 일이 많아서 그랬다지만, 뒤에 2년은 어머니의 치매상태를 관찰하느라 그랬다고 하기에는 뭔가 어눌한 핑계인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아무튼 오늘, 그 할머니가 늘 빨래를 널던 빨랫줄이 사라졌다. 가끔 내려오는 아들이 하얀색 차를 세워두던 마당에는 언제 그새 콩을 심었던 것인지 콩이 자라고 있다. 뭐냐, 이게, 응? 뭐냐고.

 

낭패도 그런 낭패도 없었다. 마당에 콩을 심을 정도라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얘기였다. 이유야 무엇이건, 어떤 연유로 해서 아들이나 혹은 딸을 따라서 집을 버리고 가셨건 그 할머니는 한동안 집에 안 오신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마당에 콩을 심어서 자라게 한 것으로 표명하신 거였다. 아니 어쩌면, 아니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동안이 아니라 오래오래, 아주 오래도록 안 돌아실지도 모르는 거다. 내가 이사를 왔던 이듬해 아랫집 할머니가 아들을 따라 병원인가 어디로 가신 뒤로 한 달이 채 안 되어 부고가 날아왔듯이 그렇게 말이다.

 

낭패를 씹고, 또 씹어가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어머니는 또 입에 화장지를 가득 물고 계신다. 작년에는 코에서 콧물이 나온다고 화장지로 틀어막곤 해서 애를 먹이시더니 금년에는 입이다. 입에 침이 있다고, 닦아내고 또 닦아내도 침이 고인다고, 그래서 아예 화장지를 물고 계신다는 거다. 사람이 입에 침이 없으면 죽는다고, 침은 당연한 것이라고 아무리 어리석은 설명을 드려봐야 어머니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더러운 침이 왜 당신의 입 안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게 어머니의 불만이다. 삼키면 되지 왜 닦아내려 하느냐고 하면 더러운 침을 어떻게 삼키느냐고 하신다. 하는 수 없이 화장지를 감추었더니 신문지를 구겨서 입 안에 넣고, 신문지를 감추면 수건이며 옷가지 같은 것들을 또 입 안에 넣는 거였다.

 

아 어머니, 어머니,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일까요, 네? 이런 질문의 끝에서 집을 나섰더랬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비어버린 집을 보았더랬다. 콩이 자라는 마당이 눈에 선하다. 사라진 빨랫줄은 어디로 갔을까. 그깟 빨랫줄이 몇푼이나 한다고, 왜 그렇게도 착실하게 그것을 걷어갔을까, 응? 한동안 이 질문이 내 머릿속을 하얗게 밝혀줄 것 같다.


#빈 집#독거노인#어머니#치매#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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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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