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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ㄱ. 10환·50환·1원·5원·10원짜리 쇠돈

국민학교 1학년을 다니던 1982년부터 우표이며 쇠돈이며 모았다고 떠오릅니다. 이무렵 제가 모을 수 있던 우표나 쇠돈이란 고작 1982년 언저리 우표이며 쇠돈이었습니다. 벌써 옛날부터 우표나 쇠돈을 모았던 형이나 누나, 또는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은 1982년 언저리 우표나 쇠돈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우표라면 으레 일제강점기에 나오던 우표쯤은 되어야 우표로 여기고, 쇠돈이라면 조선 때 엽전쯤은 되어야 쇠돈으로 여겼습니다.

우표나 쇠돈을 사들일 돈이 없는 저로서는 아버지한테 오는 편지가 '우표를 모으는' 좋은 곳간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할 수 있는 일은 동네 놀이터 모래밭을 파헤치기요, 길을 걸어가면서 땅에 떨어진 쇠돈이 없나 살피는 일입니다. 동네 놀이터이든 학교 놀이터이든 모래밭을 파 보면 으레 쇠돈이 한두 닢 나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철봉을 타다가 바지나 치마에서 떨어졌다든지 하니까요. 게다가 꽤 넓은 동네 놀이터 모래밭이라면, 제 주머니에서 돈이 한두 닢 떨어졌어도 어디에 떨어졌을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잃은 사람도 어디에서 잃은 줄을 모르는 가운데, 주우려는 사람 또한 어디에서 주울는지 모르면서 애먼 모래밭을 파헤친다고 하겠습니다.

우표나 쇠돈을 모으면서 생각합니다. 나한테 돈이 없는데 무슨 오래된 우표나 쇠돈을 모으겠느냐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오늘 이곳에서 쓰는 우표하고 쇠돈을 모을밖에 없다고.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은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까 훨씬 예전 우표나 쇠돈을 잘 알 뿐더러 갖고 있을 텐데, 나는 내가 앞으로 아저씨나 할아버지 나이가 되면 먼 뒷날 아이들 앞에서 '이 아이들이 모르거나 가질 수 없는 우표나 쇠돈을 갖고 있는' 우러러보이는 어른이 되리라 여겼습니다.

 저금통마다 차곡차곡 모아 놓던 예전 쇠돈들.
저금통마다 차곡차곡 모아 놓던 예전 쇠돈들. ⓒ 최종규

1982년에는 1982년 10원짜리와 50원짜리와 100원짜리를 모읍니다. 모았던 100원짜리는 나중에 우표를 산다든지 만화책을 산다든지 하면서 하나하나 꺼내고 맙니다. 500원짜리도 한두 번 모았다가는 다시 씁니다. 1983년에는 1983년짜리 10원짜리와 5원짜리와 1원짜리를 모읍니다. 때때로 10환짜리 쇠돈이나 50환짜리 쇠돈을 만납니다. 이 쇠돈이 쓰일 일은 없으나 10환짜리는 10원짜리와 크기가 비슷해서 가끔가끔 10원짜리 뭉텅이에 섞여 있곤 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에 섞여 있으면 이 녀석은 따로 빼내어 제가 건사했습니다.

어린 나날에는 '내가 앞으로 서른 살을 더 살면 그때에는 이 쇠돈 값어치가 올라서 부자가 될 수 있을는지 몰라'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이런 꿈을 부질없이 꾸던 때 나이에서 참말 거의 서른 해를 더 살고 있는데, 어린 나날 모은 쇠돈은 틀림없이 햇수를 많이 먹어 '이제는 오래된 녀석'이라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이 쇠돈이 큰돈 값어치를 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큰돈 값어치를 할 수 없었겠지요. 우표이든 쇠돈이든 '모아서 돈굴리기를 하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쓰는 물건일 뿐이니까요.

 ㄴ. 인천 시내버스 '쇠표(토큰)'

강철수 님이 1970년대에 그린 만화를 보다가 '쇠표'라는 낱말을 처음 마주했습니다. 흔히들 '토큰(token)'이라고만 일컫지만, 쇠로 만든 버스표이기 때문에 '쇠표'라는 이름을 나란히 붙여서 쓰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그러나 이 낱말 '쇠표'를 사람들이 널리 썼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종이로 만들었으니 '종이돈'이고 쇠로 만들어 '쇠돈(구리돈)'이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지폐(紙幣)'와 '동전(銅錢)'이라는 낱말만 써 왔습니다.

인천에는 종이로 만든 버스표만 있었습니다. 1992년, 저로서는 고등학교 2학년일 무렵에 이르러 비로소 인천에 첫 번째 쇠표가 나왔습니다. 인천하고 가까운 서울에서는 '일반 쇠표'뿐 아니라 '학생 쇠표'까지 있는 판에, 인천에는 늘 종이 버스표만 있었습니다. 그나마 1992년에 쇠표가 처음 나올 때, '일반 쇠표'로만 나오고 '학생 쇠표'는 나오지 않습니다.

 1992년에 처음 나온 '인천 시내버스 쇠표'와, 1992년에 마지막으로 나온 '종이 버스표'.
1992년에 처음 나온 '인천 시내버스 쇠표'와, 1992년에 마지막으로 나온 '종이 버스표'. ⓒ 최종규

인천을 찾아온 서울사람들은 '종이 버스표'를 볼 때면 으레 "뭐야, 인천이 시골이냐? 종이 버스표를 아직도 쓰게?" 하는 말을 읊었습니다. 작은아버지 몇 분이 살고 있는 서울로 마실을 하던 어린 날 처음으로 쇠표를 보았는데, 이때 버스를 탈 때에 내는 표가 종이로만 만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비오는 날 종이 버스표가 비에 젖을 걱정이 없을 쇠표를 보며 더없이 부러운 한편, 인천이란 곳은 왜 이리 뒤떨어진 곳인가 싶어 슬펐습니다.

어린 나날, 우산을 챙겨 비를 막기도 하지만, 집을 나설 때에 비가 뿌리지 않으면 애써 우산을 챙기지 않았고, 비가 뿌려도 가는 빗줄기이면 따로 우산을 들지 않았습니다. 비가 와도 그냥 맞곤 했으며, 가방이 비에 젖었으면 교과서와 공책을 꺼내어 펼쳐 놓고 말리면 넉넉했습니다. 교과서와 공책이 비에 젖을라치면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크게 꺼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이로 된 버스표가 비에 젖을까 싶어 몹시 걱정스러웠습니다. 이제 막 열 장짜리 버스표를 새로 샀는데 비를 만나면 자칫 열 장이 쫄딱 젖어 엉겨붙을 수 있거든요.

때로는 버스표를 바지나 웃옷 주머니에 넣어 둔 채 깜빡하고 빨래를 합니다. 이럴 때에는 버스표가 함께 물벼락을 맞으며 너덜너덜해집니다. 그나마 빨래를 막 끝낸 다음이나 빨래를 하다가 '아차! 버스표!' 하고 떠오르면 얼른 꺼내어 한 장씩 떼어내어 빨래줄에 널며 말린다지만, 빨래가 다 마르고 나서 생각난다면 큰일입니다. 한 뭉치로 엉겨붙은 너덜너덜한 조각은 어찌 되살릴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는 초중고등학교와 일반 모두 종이로 된 버스표만 오래도록 써 왔고, 쇠표가 나온 뒤로도 초중고등학생은 종이 버스표만을 썼습니다.
인천에서는 초중고등학교와 일반 모두 종이로 된 버스표만 오래도록 써 왔고, 쇠표가 나온 뒤로도 초중고등학생은 종이 버스표만을 썼습니다. ⓒ 최종규

퍽 오랫동안 종이 버스표만 쓰인 인천인데, 1992년에 드디어 쇠붙이 버스표가 나올 무렵, 시내버스 아닌 마을버스에서도 쇠붙이 버스표를 썼습니다. 제가 다닌 중고등학교가 있던 용현5동을 다니던 마을버스에서는 종이 버스표를 안 쓰고 맞돈조차 잘 안 받으면서 쇠붙이 버스표를 따로 받았습니다. 동무들은 학교에서 동인천 시내로 나갈 때에 '몇 정류장 안 되는' 거리임에도 어김없이 마을버스 쇠붙이 버스표까지 사서 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저는 그만한 거리를 왜 버스까지 타느냐며 동무들을 나무랍니다. 용현동 마을버스 쇠표는 인천 시내버스 쇠표와 견주어 거의 플라스틱 쪼가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마을버스 쇠표가 볼품없어 보여 마을버스를 안 타지 않았습니다. 이십 분쯤 걸어가면 되는 길을 마을버스 기다린다며 십 분 남짓 서 있는 일이 더없이 아깝다고 느꼈고, 동무들이 마을버스를 기다린다며 서성이며 지껄이는 수다가 썩 듣기 싫었습니다.

하나같이 거친 말투와 욕설이 섞인 수다를 듣느니, 혼자 조용히 책을 읽으며 집으로 걸어가거나 동네 골목을 느끼며 동인천 시내나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한 시간 즈음 걸어가곤 했습니다. 짧아도 삼십 분쯤 달려야 하지 않으면 버스를 타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고, 걸어서 한두 시간쯤 되는 곳은 가볍게 걸었습니다. 비가 와도 걷고 눈이 와도 걸으며 땡볕이어도 걷습니다.

언제나 걸으며 지내다 보니 버스 탈 일이 드물어, 학생 때에 늘 버스삯을 많이 아꼈고, 버스삯을 아끼면서 버스표를 쓸 일 또한 드뭅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에도 '시내버스 일반 쇠표'를 사서 쓸 일이 드물어, 저한테 남아 있는 버스 쇠표는 몇 되지 않습니다. 용현동 마을버스는 딱 한 번만 탔으니(동무가 버스표 내줄 테니 한 번은 같이 타고 가자고 해서), 우리 나라에 거의 없는 '마을버스 쇠표'라는 녀석을 따로 챙겨서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제 마음에는 버스표 나날이 마감하고 '교통카드 나날'로 바뀌어 갈 무렵에 바야흐로 쇠표가 처음으로 나와 몇 해 동안 반짝 쓰이다 사라진 인천이라는 고향 삶터가 안쓰럽고 슬펐다는 이야기 한 자락 남아 있습니다. 만들려면 진작 만들든지, 끝까지 종이 버스표를 밀어붙이든지 …….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인천이야기#토큰#버스표#인천 토큰#내가 살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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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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