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유러피언드림 세 번째 이야기는 바로 볼로냐 경제모델의 비밀이다. 인구 40만이 채 안 되는 이탈리아 북동부 중소도시 볼로냐. 1970년대 경제위기와 불황 속에 한때 빈민의 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던 곳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삭막하고 치열한 경쟁 대신 협동과 연대의 정신이 오늘날 볼로냐를 이끌었다. 일부 소수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경제에도 볼로냐가 던지는 시사점은 많다.
경제전문가와 협동조합 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볼로냐 취재팀은 농업을 비롯해 소비자, 건설 등 각 분야 협동조합과 기업 등을 방문한다. 또 사회적 경제의 권위자인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볼로냐대학) 등 주요 전문가들의 심층 인터뷰도 진행할 예정이다. [편집자말] |
취재정리 : 이승훈 기자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 이탈리아편> 특별취재팀볼로냐시에 거주하는 바르바라 로베르시(Barbara, Roversi)는 19년 전인 지난 1991년 처음으로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당시 본인과 남편 2인 가구였던 로베르시가 구입한 집은 시 외곽에 위치한 180㎡(약 55평) 규모의 단독 빌라.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새 집이었다. 집값은 우리 돈 약 1억5000만 원으로 시세보다 20% 정도 쌌다.
로베르시가 저렴하게 집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주택건설협동조합 '무리'(MURRI) 덕분이었다. 그는 집 장만을 위해 무리에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운 좋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빌라에 입주할 기회를 잡았다. 보통 2년에서 5년 정도 기다려야 차례가 돌아오지만 로베르시의 경우에는 마침 완공된 집이 남아 있어 곧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
로베르시는 "무리에서 지은 집은 가격이 쌀 뿐만 아니라 일반 건설회사보다 좋은 건축 자재를 써 품질이 월등하다"며 "집을 산 지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리모델링이나 내부 수리 없이도 생활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내가 살 집은 직접 짓는다... 협동조합 '무리'무리는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주택 수요자들이 만든 협동조합이다. 일반 건설회사들이 공급하는 주택을 수동적으로 구입하는 게 아니라 집을 사려는 수요자들이 원하는 집을 직접 짓는 것을 모토로 지난 1963년 설립됐다. 지금까지 건설한 주택이 1만2000여 채, 현재 가입된 조합원만 2만3000명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주택건설협동조합 중 하나다.
무리에서 짓는 집은 가격에 비해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 친환경 자재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태양광 설비를 갖추는 등 집 자체가 에너지 절약형으로 설계된다. 그러면서도 집값은 최대 20%까지 싸다. 볼로냐시의 경우 평균 분양가격은 1㎡에 3000유로(환율 1600원 적용시 480만 원)로 66㎡(20평) 아파트의 경우 19만8000유로(약 3억1700만 원)다.
무리에서 지은 임대 주택의 경우 임대료는 더 저렴하다. 66㎡ 아파트의 월 임대료는 평균 600유로, 이는 같은 크기의 일반 주택 월 임대료 1000유로의 60% 수준에 불과하다.
집을 짓는 과정도 민주적이다. 건축 허가 과정부터 조합원들에게 상세한 정보가 제공되고 주택의 설계와 시공에 조합원들의 의견이 반영된다. 건축 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의 집을 구입하고 싶은 조합원들은 1만 유로(약 1600만 원)를 조합에 내고 분양 신청을 한다. 경쟁률은 3:1 정도로 조합에 가입한 기간이 길수록 기회를 잡을 확률이 높아진다.
만약 주택에 당첨되면 공사 진척에 따라 6번에 걸쳐 중도금을 납입하면 된다. 중도금 납입 시기와 방법은 조합원의 사정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다. 만약 분양 신청을 했지만 떨어진 경우에는 초기에 냈던 1만 유로를 돌려받을 수 있다.
품질 좋은 집을 싸게 공급하는 비결
무리가 질 좋은 집을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이유는 건설회사의 이익이 아니라 집을 구입할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무리는 저렴한 땅을 구입해 개발하고 자체 인력으로 설계 등 건축 전반을 챙긴다. 시공도 건설 회사들이 만든 협동조합에 맡긴다. 이와 함께 볼로냐대학의 교수 및 연구원들과 새로운 건축 기술 개발에도 힘을 쏟는다.
무리의 스테파노 파르네티 기술담당이사는 "우리가 집을 짓는 목적은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게 아니다"며 "이윤이 남더라도 내부에 적립해 다음에 조합원들이 입주할 주택 건설을 위해 쓴다"고 말했다.
수요자들이 집을 직접 짓는 덕분에 이곳에는 한국에서 사회적 문제가 됐던 분양가 거품과 건설사들의 폭리 구조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입주자들이 수고스럽게 건설 회사를 상대로 분양원개 공개 운동에 나설 필요도 없다.
무리와 같은 수요자 주택건설조합은 볼로냐 지역에만 10여 개가 있다. 이들은 볼로냐 전체 주택 공급의 15~20%를 담당하고 있다. 품질이 높고 값싼 주택 공급을 통해 이 지역의 집값 안정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가다.
철저히 수요자 중심의 주택 분양은 전 세계적인 부동산 침체 국면에서도 무리가 재정의 건실성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현재 볼로냐에서는 2008년 유럽의 금융위기 이후 주택 수요가 10% 이상 크게 하락했다. 이미 주택 보급율이 100%가 넘어선 데다 집값 하락과 중산층의 파산을 우려한 은행들이 모기지 대출을 크게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주택 시장의 양극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넓은 면적의 값비싼 집들은 거래가 이루어지지만 20만 유로(3억2000만 원) 안팎의 중산·서민층 주택은 좀처럼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외 없는 부동산 시장 침체... "무리에는 위기 없다"무리의 경우도 예전엔 입주 경쟁률이 3:1까지 올랐지만 요즘에는 집이 완공된 후에도 입주 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아 미분양 주택들이 늘었다. 하지만 심각한 위기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무리가 은행 빚이 아니라 내부 적립금으로 주택을 짓기 때문에 당장 팔리지 않아도 자금 압박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무리의 내부 적립금은 4700만 유로(752억 원)에 달한다.
파르네티 기술담당이사는 "빚을 내서 집을 지은 건설 회사들은 거품이 붕괴할 경우 자산 가치의 하락을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하지만 무리는 내부 적립금이 많고 은행 빚이 없기 때문에 집이 안 팔려도 당장 재정 위기에 처할 가능성은 없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무리는 부동산 시장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다각적인 대응 방안 마련을 병행하고 있다. 먼저 미분양 주택을 임대 주택으로 전환해 현재 10% 정도인 임대 주택의 비중을 점차 늘려나갈 계획이다. 각 지역에서 몰려든 대학생 등 유동인구가 많아 임대 수요는 충분하다. 또 추가적인 주택 건설을 자제하는 대신 지은 지 오래된 주택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환경을 개선하는 리모델링 사업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정태인 경제평론가는 "한국에서도 소비자들의 협동조합이 만들어져 기술과 품질도 뒤처지지 않고 투명하고 합리적인 분양가에 집을 구입할 수 있다면 대기업 건설 회사들의 폭리와 횡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 이탈리아편> 특별취재팀: 현지 취재 : 김종철 기자(팀장) 이승훈 기자, 편집 자문 : 정태인 경제평론가, 신성식 경영대표(아이쿱 생협), 정원각 사무국장(아이쿱 생협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