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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김수로>.
MBC 드라마 <김수로>. ⓒ MBC

고대왕국 가야(가락)의 건국과정을 그리고 있는 MBC 드라마 <김수로>는 주인공 김수로(지성 분)의 출현 과정과 관련해 좀 색다른 상상력을 발휘했다. 

 

흉노족 일파인 제천금인족(祭天金人族)의 혈통인 김수로는 정상적인 경우라면 북쪽에서 태어났어야 한다. 그런데 김수로 가문이 중국 한족과의 대결에서 패배함에 따라 어머니인 정견비(배종옥 분)가 수로를 임신한 상태에서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하려 했다. 헌데 그 배가 실은 한반도 동남부로 향하는 노예선이라서 김해에 정착하게 됐다는 것. 배 안에서 출생한 김수로가 이렇게 해서 김해 땅과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이 드라마 <김수로>의 이야기다.

 

위의 내용 중에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김수로가 제천금인족의 후예라는 사실뿐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상상의 결과물 중 일부가 이제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수로의 도래 과정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하늘에서 온 김수로는 강력한 해상세력

 

 축제 분위기 속에서 김수로를 맞이하는 토착민들. 사진은 국립김해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벽화의 한 장면.
축제 분위기 속에서 김수로를 맞이하는 토착민들. 사진은 국립김해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벽화의 한 장면. ⓒ 김종성

흔히들 김수로는 북방에서 왔다고 한다. 그 같은 도래 과정이 고려 초기에 간행된 가야 역사서인 <가락국기>에서는 '하늘로부터의 강림'으로 표현되고 있다. 토착민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천상으로부터 구지봉으로 금합이 내려왔고, 그 상자에 담긴 여섯 알이 김수로를 위시한 건국 주체들이 됐다는 것이다.

 

'하늘' 즉 북방에서 내려왔다는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김수로가 육로를 통해 남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선입견은 한국 고대사를 오로지 육지와만 연결 시키려는 잘못된 인식이 낳은 산물이다. 한국인들은 '해상왕' 혹은 '제해권' 하면 흔히 신라 장보고나 조선시대 이순신만을 연상할 뿐, 그 이전에도 한민족이 주변 지역의 바다를 지배했을 가능성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라나 가야가 세워지기 훨씬 오래 전부터 한민족은 바다를 활발히 이용했다. 일례로, 고조선은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03~221년)의 제나라와 해상을 통해 교류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나라가 오늘날의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했기 때문이다.

 

또 <삼국지> '동이전'의 주석에 따르면, 위만에게 왕권을 빼앗긴 고조선 준왕은 그 후 "바다에서 왕 노릇"을 했다. 제해권을 잡은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고대 한민족이 단순히 유라시아대륙의 끝자락에 붙어 있었던 게 아니라, 육로는 물론 해로를 통해 유라시아대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락국기>를 읽다 보면, 가야 건국 이전의 김수로도 바다 위에서 강력한 권력을 보유했다는 정황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김수로가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김해 땅에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수로가 강력한 해상세력이었다는 점은 <가락국기>에 있는 석탈해와의 대결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김수로의 500척 병선, 어떻게 가능했을까

 

 산동반도의 위치.
산동반도의 위치. ⓒ 그림 출처: 도서출판 신유 발행 <고등학교 역

서기 42년에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는 한동안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건국 이듬해인 서기 43년부터 그는 신도시 건설에 역량을 총동원했다. 오늘날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신답평(新畓坪)이란 곳에 성곽·궁궐·가옥·관청·무기고·창고 등을 완비한 신도시의 건설에 착공한 것이다.

 

이 공사는 서기 44년에 끝났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전국의 장정과 기술자들이 이 대규모 공사에 동원됐다. 가야의 인적 역량이 총동원된 것이다.

 

이렇게 신도시를 완성한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갑작스레 불청객 하나가 등장했다. "왜국 동북쪽 1천리"에서 해로를 따라 이동한 석탈해가 가야 해안에 출현한 것이다. 아마 당시의 가야 토착민들은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외래세력이 자꾸 도래하지?"라며 불안감에 떨었을 것이다.

 

김수로 집단에 이어 석탈해 집단까지 도래했으니, 신생국 가야가 조용할 리 없었다. <가락국기>는 상징적 표현기법을 동원해서 두 집단 사이에 주도권 경쟁이 전개됐음을 알려주고 있다. <가락국기>는 이 대결에서 김수로가 승리했으며 석탈해는 패배를 자인하고 가야를 떠나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수로와 석탈해의 대결. 사진은 국립김해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벽화의 한 장면.
김수로와 석탈해의 대결. 사진은 국립김해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벽화의 한 장면. ⓒ 김종성

그런데 석탈해가 가야를 떠나려 한 시점에 김수로가 취한 조치는 김수로 집단이 본래 강력한 해상세력이었음을 반영하는 증거가 된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석탈해가 패배를 인정하고 떠나려 했는데도, 김수로는 석탈해가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석탈해가 기회를 보아 반격을 가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비장의 무기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 비장의 무기에 관해 <가락국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은 (석탈해가) 체류하면서 반란을 모의할까 은근히 두려워하여 병선 500척을 급히 파견해서 그를 추격하도록 했다. 석탈해가 달아나 신라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자 해군은 모두 돌아왔다."

 

김수로가 석탈해를 완전히 추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병선 500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김수로는 어떻게 해서 이만한 규모의 함선을 보유하게 되었을까?

 

<가락국기>에 설명된 바와 같이, 건국 이듬해인 서기 43년부터 건국 3년째인 서기 44년까지 김수로는 신도시 건설사업에 역량을 집중했다. 전국의 장정과 기술자들이 여기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신도시를 완성한 이후로는 한동안 석탈해와의 대결에 역량을 동원했다. 이러한 사실은, 가야 건국 이후로부터 석탈해의 추방 시점까지는 김수로가 500척의 함선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락국기>가 건국 이후의 주요 사업을 상세히 소개한 사실을 볼 때, 만약 가야 건국 이후에 500척의 함선이 건설됐다면 이런 사실이 분명히 <가락국기>에 소개됐을 것이다.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500척은 가야 건국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건국 이전부터 그만한 규모의 함선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혹시 가야 토착세력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김수로가 도래하기 이전의 가야 땅은 9개의 촌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촌장 수준의 리더들이 각각의 촌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 토착민이 건국 이전부터 500척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만약 토착세력이 그 정도의 대규모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외래세력인 김수로 집단에게 그처럼 평화적으로 또 순순히 통치권을 넘겨주었을 리가 없다. 토착세력이 별다른 저항 없이 권력을 내준 것은 김수로 쪽이 그만큼 압도적 우위에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석탈해 추방에 동원된 500척의 함선은 건국 이전부터 김수로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천금인족의 후예이자 김수로의 조상인 김일제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한서> '김일제 열전'을 살펴보면, 김수로가 500척의 배를 가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 이래로 한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김일제 가문이 약 1세기 동안 산동반도에 자신들의 영지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산동반도의 지리적 위치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곳은 전통적으로 해상교류의 거점이었다.

 

그러므로 1세기 동안이나 이곳을 장악한 세력이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김씨 가문이 서기 25년 이후로 중국 무대에서 밀려났으므로 이들이 자신들의 해군력을 이끌고 서기 42년 이전에 한반도 동남부에 출현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해상 영웅들의 등장 우연이 아니다

 

 김해의 옛 항구(복원). 가야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봉화대공원 소재
김해의 옛 항구(복원). 가야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봉화대공원 소재 ⓒ 김종성

서두에서, 김수로의 어머니가 수로를 임신한 상태에서 선박을 타고 김해에 상륙했다는 드라마 <김수로>의 설정이 김수로의 실제 도래 과정과 맞아떨어진다고 언급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 역사서인 <가락국기>나 중국 역사서인 <한서>를 종합해 보면, 김수로가 500척의 함선을 이끌고 한반도 동남부에 출현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락국기>에서는 금합에 담긴 여섯 개의 알이 '하늘'로부터 김해 땅에 내려왔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해석하면, 김수로는 하늘 즉 북방에서 남하하되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그렇게 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은 한국 고대사를 살펴보노라면, 장보고나 이순신 같은 해상 영웅들의 등장이 결코 '우연한 천재의 출현'만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해상 영웅들의 등장은 한민족이 오랫동안 바다를 지배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김수로#제해권#가야#석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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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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