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의 어머니는 속이 텅 빈 호도 같다. 호도를 볼 때면 어머니의 얼굴이 겹치고,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 호도의 메마른 굵은 주름들이 겹친다. 그나마 잔주름을 감싸고 있던 피부가 이제는 피부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무슨 빈 자루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작년 이즈음만 해도 화색이 돌던 어머니의 얼굴이 언제 이렇게 되어 버렸나. 새삼스레 묻고 있는 나 자신을 어리석다고 한다면 누구 웃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 큰소리로 웃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연민이 가득한 시선으로 얼굴에 살짝 주름을 잡는 쓸쓸한 웃음은 사양하련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을 발견해서 "이것 봐라, 이것 봐."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칼칼칼 웃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유 어쩌나", 하는 소리는 이제 듣고 싶지 않다. "아이고 어찌까, 집이가 고생이요", 하는 말씀도 이제는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한때는 그런 소리가, 그런 위로의 말씀들이 내게 일정 부분 힘을 실어주기도 했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아마 철이 없었던가 보다. 늙고 병들어 아무 데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칭찬받을 만한 일이구나 하는 그런 엉뚱한 자부심마저도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 채 오줌을 벌벌 싸는 어머니에게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본다. 어머니는 그 시절에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을 벌벌 흘리는 아들을 보면서 결코 외면하지는 않았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아이고 써글놈아" 소리는 나왔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이 아니었다. 보다 적극적인 포옹이었다. 그런데 나는 선 채로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을 벌벌 흘리는 어머니를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외면을 했다. 그렇게 외면의 과정을 거친 뒤에서야 겨우 수습을 하고 나섰다.
살고 있는 듯이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비교적 건강하셨을 적에 어머니의 소원이었다. 중증 치매 선고를 받은 이후 어머니의 소원은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아무런 바람도 없고, 소원도 없이 아들을 오빠라고 부르며 밥 먹자고 하면 고개를 끄덕거리고, 목욕 하자고 하면 또 고개를 끄덕거리는 어머니에게서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본다.
날마다 조금씩 번데기처럼 작아지다가 어느 날 홀연 눈을 감으신 외할머니는 그 뒤로도 한동안은 우리 집 주변에 계셨다. 무더운 여름 밤이면 마당의 감나무 밑에 깔아놓은 대자리 위에서 외할머니가 부채질을 하고 계셨고, 손발이 덜덜 떨리는 겨울 밤이면 변소간 앞에서 외할머니가 호롱불을 켜들고 발을 동동거리며 "아니 그놈의 똥이 어째서 아직도 안 나온다냐"하고 계셨다.
함께 살지 않았던 외숙모님의 곡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조계종 소속 사찰에서 보낸 깡패들에 의해 절간에서 쫓겨나신 태고종 소속의 외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와서 임종까지 지켜본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울고 싶을 때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눈물을 찍어내는 것이 특기인 어머니가 그날도 어느 구석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생각건대 아마도 어머니는 끝내 울지 않았을 것 같다.
죽음의 과정을 옆에서 낱낱이 지켜본 사람에게는 눈물이나 곡소리보다 더 긴급한 어떤 것이 있을 것 같다. 아니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내밀한 어떤 것마저 없다면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무엇으로 유지할 것인가 말이다. 눈물보다 소중한 어떤 것, 그것은 무엇일까. 그런 하릴없는 생각을 뒤적거리며 마당으로 나섰다.
개수로만 보자면 몇 포기 되지도 않는 고구마 밭에 고구마순이 무성하다. 고구마순을 한 바구니 뜯어다가 원두막에 쏟아놓고 어머니더러 껍질을 벗기자고 했더니 마지못해 하는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작년 이즈음만 해도 어머니는 무엇이든 일거리를 만나면 끝을 볼 때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 하셨다. 쉬었다가 나중에 다시 하자고 하면 "어느 미친년이 일 놔두고 쉬는 법도 있냐"고 볼멘소리를 하시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지금은 한 시간도 안 되어 슬그머니 자리에 눕거나 일 자체를 잊어버린 채 그냥 무연히 앉아만 계신다.
"어매, 고구마순이 좋기도 하네."
고추밭에 고추를 따러 가시던 이웃집 할머니께서 잠시 들르셨다.
"주인아저씨가 허라고 안 허요."
어머니가 느닷없이 그러신다. 이웃집 할머니는 영문을 몰라서 한참이나 멍, 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 이어서 어머니를 보며 대답이 궁금하다는 투로 한 마디 질문을 하신다.
"주인아저씨가 누구다요?"
"있어라. 우리 주인아저씨, 언능 가시오 잉. 나 일해야 헝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오빠'였던 나는 이제 그렇게 '주인아저씨'가 되었다. 그런데 그 주인아저씨가 어머니에게는 아마 무척 악독한가보다. 틈만 나면 부려먹으려 하면서 밥도 잘 안 주고 아마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 그렇게 얼른 일해야 한다고, 찾아온 손님 따위 하나도 반가울 이유 없으니 어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이겠지만, 그러나 어머니는 이웃집 할머니가 마당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벌써 당신의 일거리를 잊어버렸다.
이웃집 할머니를 사립문께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니 어머니는 그새 모로 누운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잠든 어머니를 한참 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영화 생각이 났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거장이면서 노장인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고 출연한 그 영화를 벌써 세 번이나 보았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발견되어 또 보고 싶은 거였다. 영화를 돌리기 전에 커피도 한 잔 끓였다. 무더운 날씨에 뜨거운 커피만큼 나를 차분하게 해주는 것도 없지, 어쩌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 십 분이나 지났을까. 어머니가 잠든 원두막 쪽에서 갑자기 무슨 쿵,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일어서서 어떻게 뛰쳐나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여튼 뛰쳐나가다가 댓돌에 발을 헛디뎌 달팍 엎어지고 말았다. 엎어진 채로 고개를 들어 원두막을 보는데 세상에, 도대체 저게 무슨 자세란 말인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한참을 그렇게 엎어진 채로 보고 있었다. 시간을 재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20~30초 정도는 그렇게 보고 있었을 것이다.
잠결에 문득 소변이라도 마려웠던 것일까. 언제 원두막을 빠져나왔는지 어머니가 화분 속에 머리를 박고 엉덩이를 하늘 쪽으로 치켜든 채 오른쪽 손으로 마치 구조신호라도 보내듯이 까딱, 까딱 하고 계시는 거였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슨 엉뚱한 생각이 발동해서 장난을 하시는가 하는 생각도 잠깐 있었다. 때문에 뭐예요, 왜 그래, 소리를 내며 달려가면서도 그렇게까지 화급한 마음은 아니었다. 설령 장난이 아니라 해도, 화분 속의 무슨 풀이라도 뽑다가 순간적으로 넘어진 정도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태를 수습한 뒤에야 되짚어보니 그 순간의 어머니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계셨던 것으로 밝혀졌다.
화분은 딱딱한 관목이나 선인장 종류가 아닌, 사랑초라는 이름의 연약한 초본식물이 심어진 것이어서 어머니의 얼굴이나 머리에 상처는 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연약한 초본식물이기에 사람의 얼굴이 덮치면 흙과 바로 밀착될 수 있었고, 때문에 어머니는 눈이며 입이며 코며 중요한 기관 일체를 흙 속에 파묻은 채로 그렇게 비교적 자유로운 오른손 한쪽만을 필사적으로 까딱, 까딱하는 식으로 구조요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사람의 신체 기관에서 무슨 에너지가 어떻게 빠져나갔으면 이렇게까지 아무 힘도 쓸 수가 없는 것인가. 서서 걷고자 하면 다리가 덜덜 떨리고, 앉아 있고자 하면 허리에 힘이 없어 누워야만 한다. 그런 육체가 머리부터 땅에 닿았으니, 엉덩이가 하늘 쪽으로 치솟았으니, 나도 모르고 어머니 당신도 모르는 무슨 법칙에 의해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된 거였다. 내가 만일 집에 없었다면, 아니 조금만 더 늦게 나갔더라면,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우두커니 서 있는데 어머니가 상기된 표정으로 한 마디 하신다.
"고맙소, 참말로 고맙소."
"고마워요? 뭐가?"
"아이고, 참말로, 고맙지요. 이 고마운 공을 으떻게 갚어야 쓸꺼라."
옆에서 일으켜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텐데 '주인아저씨'가 일으켜준 덕택에 살았났으니 고맙다는, 아마도 그런 뜻인 모양이다. 그렇게 연거푸 고마워하시는 어머니를 일으켜 세워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을 끝내고 나자 어머니는 이내 잠이 들었다.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또 호도가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어머니와 호도, 호도와 어머니. 닮았는가? 정말로?
집이 없는 내가 집 한 채 사기로 결심하고 이것이든 저것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시절의 어느 즈음 천안 삼거리 부근에 석 달 정도 있었다. 호도가 익어가는 계절이었고, 호도밭에서 호도를 따는 아주머니의 일손을 잠깐 돕고 호도알 아홉 개만 달라고 해서 얻었다. 왜 아홉 개였는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것을 깨트려서 먹지 않고 가방에 넣어두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게 벌써 7년여 전의 일이었다. 7년이 지나는 동안 3개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6개가 남은 거였다.
7년 전의 호도를 왜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는가는 사실 나도 모른다. 하여튼 7년 전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팔팔에 육십삼, 팔구 칠십이를 무슨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셨다. 그렇게 하면 치매에 안 걸린다는 소리를 누구에게서 들었다는 거였다. 그래서 당신은 치매 같은 절대로 안 걸리고 죽을 때까지 독거노인으로 있을 거라고 장담에 큰소리를 치시던 거였다.
그 시기의 어느 날 어머니는 동갑계원들로부터 중국여행 제안을 받았다. 1년에 한 번씩 1박 2일로 국내여행을 다니는 계원들이었다. 그 계원들이 평생에 한 번 외국여행을 가자고, 다른 데는 경비가 많이 들어서 못 가지만 중국 정도는 가볼 만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이 나와서 다들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어머니 당신은 아직 결정을 못했다는 거였다.
어머니로부터 지나는 말처럼 나온 그 말씀을 듣고도 나는 아무런 긍정적인 대꾸도 못했다. 더 늦기 전에 집이라도 한 채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혈안이 되어 있었던 그 무렵의 내 귀에 어머니의 중국여행이란 그리 썩 즐거운 소재가 아니었다. 아들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어머니는 결국 여행을 포기하셨다. 포기했다는 것을 안 뒤에야 후회가 밀려 왔지만 낯간지러운 반성이었다.
그 뒤로 일 년쯤 뒤에 어머니는 쓰러졌다. 심장 수술을 받고 회복은 되었지만 어머니는 이미 예전의 그 팔팔은 육십삼을 외우던 그런 어머니가 아니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어머니의 손은 새색시처럼 반들반들 깨끗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당신의 그런 손을 볼 때마다 "이것이 뭐이까, 이것이 뭐이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시곤 했다. 농사꾼이 농사일을 못하니 손만 깨끗해진다는, 손이 깨끗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자문자답의 끝에 나온 한숨일 터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 하루 실종되었다. 저녁에 사라진 어머니가 다음 날 오전 10시쯤 십리도 넘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아마도 저녁에 잠시 집을 나왔다가 방향을 못 잡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동안 그렇게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십 리도 넘는 곳까지 밤새 걷고 있었을 터이었다.
그날의 경험이 어머니를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 어머니는 그날 이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전기 스위치 작동법을 잊어버렸고, 화장실 문을 항상 열어놓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소위 중증 치매 상태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때부터 내 눈에 호도가 자주 띄었던 것이지 여부는 지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호도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호도는 7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작아지지도 않았고 커지지도 않았다. 색깔에도 변화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손으로 들어보면, 확연하게 느껴진다. 속이 텅 비었다는 것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대번에 알 수 있다.
껍질이 그렇게도 단단하고, 개미 한 마리는커녕 먼지 한 톨 들어갈 틈도 없이 완벽하게 무장(?)을 하고 있는데도 7년 전에 손으로 느낄 수 있었던 무게감을, 알맹이의 존재감을 이제는 느낄 수가 없다. 제법무상이라고 하는 저 완고한 법칙에 의해 스스로를 소멸시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인가?
인생을 소풍에 비유한 천상병 시인의 부인께서 현생을 떠나던 날이었던가. 그 즈음의 어느 날 문득 새벽의 별처럼 머릿속을 관통하는 한 생각이 있었다. 이 집을 팔아서 중고 미니버스라도 한 대 살까? 그렇게 버스를 타고 어머니와 함께 팔도강산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져볼까?
사실을 말하자면 벌써 오래 전부터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이대로 그냥 있기만 한다는 것은 결국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아니라는, 도무지 말로는 말이 잘 안 되는 어떤 혼란과 질서가 뒤섞인 듯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여기가 아닌 어디로,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알 수 없기에 더욱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생애 단 한 번도 어머니와 더불어 소풍 같은 소풍을, 여행 같은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게 뭔가. 이렇게 헤어져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헤어질 날을 기다리고만 있어도 되는 것인가.
인간에게 만일 정말로 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머니의 혼과 내 혼이 구천이라는 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 무엇으로 서로를 알아볼 것인가. 아무 공유할 만한 추억도 없이 헤어진다면 무엇으로 전생을 환기하며 오 네가 너로구나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그야말로 무슨 청승 같은 생각들이 나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떠난다면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오가 있어야 할 터이다. 나중에 어찌어찌 해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해도, 그때는 그때일 뿐이고, 떠나는 당장의 마음 속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가 철벽처럼 깔려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러므로 미니버스를 한 대 사기 위해 새로 돈을 벌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집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공자 같은 뛰어난 현인도 50대 중반에 익숙한 울타리를 빠져나와 낯선 방랑에 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이까짓 집 한 채가 무슨 대수인가 말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온갖 생각들을 벌써 한 달도 넘게 뒤적거리고 있지만, 아직 누구에게도 의논은 해보지 않았다. 동생들은 물론이고 제수씨에게도, 친구에게도, 후배들에게도 조언은 구하지 않고 도깨비처럼 혼자서만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어쩌면 '미친놈'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일상의 행복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다는 속 깊은(?) 배려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 되었건 이제 큰 틀의 생각은 그만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집이 금방 팔릴까? 금방 안 팔린다 해도 시간은 아직 넉넉하다. 어차피 겨울을 나고 봄에나 출발을 해야 할 테니까. 겨울이 내일모레인 시기에 새로운 출발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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