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일)언제부터 내리는 비인지는 모르겠다. 오전 9시 무렵, 구봉도를 향해 가는 길, 비가 내린다. 빗줄기가 굵지 않아 다행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견딜 수 있는 한, 가는 데까지 가볼 생각이다. 가방이란 가방에 모두 노란 방수포를 뒤집어씌운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햇볕 따가운 날이 계속됐다. 덥다고 구시렁거렸다. 그랬더니, 오늘 드디어 비가 내린다. 혹시 내 기도가 통한 걸까?
구봉도 들어가는 길 입구에 '구봉도유원지'라고 쓴 아치형 간판이 비를 맞으며 찾아오는 나그네를 반긴다. 구봉도는 대부도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나간 모양의 지형을 하고 있다. 구봉도에서 제일 먼저 마주친 건 낚시터다. 지도상에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땅에 이렇게까지 많은 낚시터가 몰려 있을 줄은 몰랐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낚시터마다 낚시꾼들이 타고 온 차들이 꽉 들어차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의외의 모습이다.
구봉도에 종현어촌체험마을이 있다. 마을 앞 바닷가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갯벌이 펼쳐져 있다. 비가 와서 바다 끝이 더 아스라하다. 갯벌 한가운데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서 사람들이 오순도순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다. 갯벌이 얼마나 넓은지 먼 바다로 나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검고 작은 그림자로만 남아 있다.
구봉도에 들어서 얼마 안 가 횟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개를 발견했다. 녀석의 목에 끈이 묶여 있지 않다. 강화도에서 겪은 일도 있고 해서 움찔했는데, 그 녀석 나를 그냥 쳐다보는 둥 마는 둥한다. 아주 심상한 표정이다. 그곳 말고도 두세 군데에서 더 개들과 마주쳤지만, 특별히 자전거여행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놈이 없었다. 그중에는 심지어 꼬리를 감추며 달아나는 놈도 있었다.
제주도에 갔을 때도 유사한 경험을 했었다. 육지에서 만난 개들과 달리, 제주도의 개들은 자전거여행자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기까지 했다. 구봉도의 개들이 그렇게까지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한결 달관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무엇이 강화도에 사는 개들을 그렇게 사납게 만든 것일까? 자전거여행을 계속 해야 하는 나로서는 그것이 참 미스터리다.
구봉도를 벗어나 선재도를 향해 간다. 대부도 서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선재도와 영흥도로 가는 표지판이 자주 나타난다. 선재도와 영흥도는 모두 연도교로 연결되어 있다. 얼마 가지 않아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진다. 아무래도 쉽게 그칠 비 같지가 않다. 하늘이 온통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이 길엔 갓길이 없거나 좁은 구간이 많아 속도를 내기가 어렵다. 자전거에서 내려 비를 긋거나 쉴 만한 공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선재대교,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비가 오는데도 선착장까지 내려가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잿빛 하늘 아래 파란색 페인트칠을 한 배들이 파도 위에서 마치 요람이라도 타듯이 출렁이고 있다. 출렁이는 게 파도와 배뿐만은 아니다. 어찌된 일인지, 바닷가로 내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나, 온몸에 비를 맞고 서 있는 내 마음까지 출렁인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서늘한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유는 왜일까?
바닷가를 돌아나가자 다시 영흥도로 가는 길과 만난다. 이제 비가 그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아예 접어버린다. 잠시 멈추는 듯싶다가는 다시 퍼붓기를 계속하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내린다. 이제는 그만 해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진다. 앞으로 다시는 하늘에다 대고 햇볕이 너무 뜨겁다느니 어떻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대지 않을 생각이다.
선재도는 매우 작은 섬이다. 이제 선재도에 들어섰나 싶었는데 어느새 영흥도다. 빗속에 모습을 드러낸 영흥대교가, 잿빛 하늘 아래 위엄이 어린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이 절집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려고 찾아온 우매한 중생들을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천왕상을 연상시킨다. 나그네의 방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영흥대교 앞에서 한참 망설인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영흥대교에 인도가 있고 차도 옆으로는 좁은 갓길이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인도 바로 옆으로는 천길 낭떠러지 검푸른 바다다. 내 키에 비해 난간이 너무 낮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할 수 없이 찻길 옆 갓길로 접어든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매번 고민이다.
영흥대교 아래로는 큰 배들이 지나가게 되어 있다. 다리 중간 부분이 크게 원을 그리며 솟아 있다. 언덕이 높아 속도를 내기가 만만치 않다. 영흥대교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수협직판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영흥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직접 판매하는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비가 와서 행사장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다. 직판장을 벗어나면 바로 진두선착장이다. 이곳 역시 선착장에 낚시꾼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흥도는 자전거동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중간 중간 산악자전거를 탈 수 있는 코스가 있고, 바닷가 풍경을 바라다보며 자전거를 타는 묘미를 즐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덤으로 비교적 싼값에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도 있다. 영흥도 서쪽 해안도로가 일품이다. 일요일인데도 오가는 차량을 찾아보기 힘들다. 자전거를 타고도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어 좋다.
영흥도에 십리포해수욕장과 장경리해수욕장이 있다. 모두 모래사장이 넓고 고와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주말을 맞아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낸 관광객들이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은 채 백사장을 거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비가 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닷물 속으로 뛰어든 아이들도 있다.
장경리해수욕장에는 유난히 오토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바닷가 해변 가까이 있어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해변 소나무 숲 아래 텐트를 친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화로를 피워 고기를 굽는 냄새가 구수하다. 오토캠핑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실태를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차량에 싣고 온 장비들이 어마어마하다. 비가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탓에 텐트를 걷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
하루종일 비를 맞아서인지 가만히 서 있으면 몸이 더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장경리해수욕장을 나와 영흥화력발전소를 찾아간다. 영흥화력발전소 곁에 에너지파크가 있다. 어떻게 보면 비가 오는 날 찾아가기 적당한 곳이다. 영흥화력발전소는 총 3340MW의 발전설비를 갖췄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전기는 주로 인천 지역에 공급된다.
이곳에 가면 바닷가에 화력발전소들이 들어서는 연유를 잘 알 수 있다. 화석 연료를 대체할 새로운 친환경 에너지를 개발해야 할 필요성 역시 잘 설명이 되어 있다. 놀이 삼아 즐길 수 있는 체험 시설들이 많아서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기 좋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전기가 철탑 다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시를 밝힌다. 한국인의 에너지 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에너지를 낭비하는 요소가 너무 많다는 얘기다.
아이들과 뒤섞여 에너지파크를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물벼락을 맞았다. 4륜구동차 한 대가 앞서 가는 차들을 추월하기 위해 노란색 중앙선을 넘어오더니, 반대편 차선 갓길을 달리고 있는 내게 물벼락을 안기고 달아난다. 순간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급브레이크를 잡아야 했다. 사람이든 차든 에너지가 너무 넘쳐도 안 좋다.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에너지가 좀 더 유용한 목적에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너지파크에서 산성비가 내리는 이유도 살펴봤다. 화석 연료를 주 연료로 사용하는 자동차나 공장이 질소 화합물이나 황 화합물을 배출하면서 빗물을 산성으로 만든다는 설명이다. 차를 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산성비를 내리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 내게 도로 위의 각종 오염물질로 뒤범벅이 된 흙탕물을 끼얹고 지나간 당신 역시 결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