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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기행 다섯째 날(8월16일)은 새벽에 연길(옌지) 수상시장에 다녀와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이날은 '동쪽(한반도)을 밝힌다'라는 뜻을 지닌 명동촌, 15만 엔 탈취 기념비, 3·13희생자 묘역, 두만강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문(투먼)시를 돌아봤다.

 

오전 9시 10분 호텔을 출발했다. 마침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이어서 국기게양식을 하고 있었다. 연길에서 국기게양은 나라 사랑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일상적인 교양활동으로 여긴다고 했다. 길을 걷다 갑작스러운 애국가 연주에 허둥대던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가이드는 지금도 한국에는 '연변'과 '연길'을 혼동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연변이라 부르고, 연길은 자치주의 행정, 경제, 문화 등의 중심도시라고 설명했다. 연변이 한국이라면 연길은 서울이라는 것.  

 

버스가 용정에서 냇가를 끼고 20분쯤 달리니까 명동촌이 나왔다. 문익환 목사가 태어났다는 장재촌과 이웃하고 있었다. 육도하 북쪽으로 성고촌, 중명촌, 명동촌, 장재촌이 있고, 남쪽에는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등의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명동지구'라 불렀단다.

 

명동촌의 상징 명동교회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우측으로 명동 교회 건물과 김약연(1868~1942)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저항시인 윤동주 생가와 이웃하고 있었는데, 문익환 목사도 이곳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애국혼을 길렀다니, 남다르게 느껴졌다.

 

명동교회 건물은 명동촌 관련 사진과 자료를 모아놓은 역사 전시관으로 사용하면서 여성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까 해설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명동촌에 대해 설명했는데, 전형적인 북한 말씨로 무척 상냥하고 친절했다. 

 

명동촌 방문 기념으로 윤동주 시집과 조선족 관련 책도 한 권 구입했다. 잠시 틈을 내어 펼쳐보니까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이 많았고 문체와 어투도 낯설었다. 하지만, 낯섦이 마음을 더 가깝게 하면서 흥미를 끌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명동교회는 1909년 5월 여덟 칸 집을 사들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다 1916년 김약연 선생 등의 주선으로 지금의 명동교회 건물을 세우게 되었단다. 교회 설립에는 국내에서 온 기독교 독립운동가 정재면의 공이 컸다고.

 

명동교회는 공산혁명 이후 정미소로 사용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993년 4월 명동촌이 관광지로 지정되자, 용정시 인민정부는 보호하기에 이르렀고, 1994년 8월에는 해외 한민족연구소 지원을 받아 단층 70여 평 크기의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단다.

 

규암 김약연을 통해본 명동학교

 

 

명동촌에는 민족교육의 선각자 규암 김약연 기념비와 윤동주 생가 등이 보존되고 있었으나 명동학교는 터를 알리는 비석만 서 있었다. 20세기 초만 해도 수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우거진 무인지대였는데, 19세기 말 열강의 침탈과 가난에 쪼들린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단다.  

 

해설자 설명에 의하면 1899년 2월 18일 김하규, 문치정, 김정규, 남위언 등과 두만강을 건너와 황무지를 수백 정보 사들여 명동촌을 세운 규암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901년 4월 <규암제>를 세웠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만 공부하는 야학형식이었다고. 

 

규암은 '서전서숙'(瑞甸書熟)이 문을 내리자 규암제 등의 사숙을 통합하여 1908년 4월 27일 신학문을 배우는 <명동서숙>을 설립했다. 이듬해 4월 <명동학교>로 바꾸고, 1910년 중학부를 증설하면서 교장으로 취임했다. 학교운영 경비는 학생 42명의 회비, 학전(學田)수입, 기부금, 의연금 등으로 해결하였단다.

 

중국조선족교육 역사상 처음으로 여학부를 두었던 1911년 3월 학생 수가 중학부 160명(남 114명, 여 46명), 소학부 보통과 121명, 고등과 159명이었고, 여학부 보통과 53명, 고등과 12명이었다는 내용은 규암이 여성교육에도 선각자임을 입증하는 통계처럼 느껴졌다.

 

교사들이 학생들 집에서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1917년에는 현대식 교사 건물을 세우고,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키워줌으로써 명동학교는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의식이 높은 배움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규암은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운영, 이동휘 등과 독립운동의 연합전선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0년에는 <상해임시정부> 초청으로 상해로 가는 도중 체포되어 2년을 감옥에서 보냈단다. 그해 가을 일본군은 명동촌에 난입하여 학교에 불을 지르고 10여 명을 살해한 뒤 90여 명을 체포해갔다.  

 

1922년 가을, 석방되어 돌아온 규암은 명동학교 교장으로 재임하였으나 대흉년(1924년) 으로 1925년 중학부가 문을 닫으니까 교회에서 경영하게 되었는데 학교는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여론으로 1928년 명동학교를 떠났다.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명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규암은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74세에 운명했다.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언으로 여겼던 규암 김약연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초등학교 역사 교육을 축소하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아픈 상처를 잊자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과 역사의식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도 15만 엔 탈취사건 기념비와 3.13 반일의사 능 참배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놈놈)>의 배경이 되었다는 간도 15만 엔 탈취사건 기념비와 3.13 반일의사 능(陵)도 한마장 거리에 있었다. 박영희 시인은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탈취사건을 기념하는 비는 이곳밖에 없을 것이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3·1운동이 실패하자 임국정, 한상호, 윤준희, 최봉설 김준 등은 1919년 겨울에 철혈광복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마련하던 중 회령에서 용정 출장소로 보내는 철도 부설자금 조선은행권 15만 엔이 우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무기구입 자금을 마련할 정보를 입수한 철혈광복단 조직원들은 1920년 1월 4일 동랑어구(지금의 기념탑이 서 있는 부근) 숲 속에 매복해 있다가 수송마차를 습격해서 탈취에 성공했다. 당시 총 한 자루 가격은 10원 정도였다고.

 

군자금 탈취에 성공한 이들은 무기구입을 위해 국자가(연길), 와룡동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갔다. 그러나 밀정의 고발로 최봉설을 제외하고 모두 체포되어 회령을 거쳐 서울 서대문구치소까지 끌려와 사형을 당한다. 

 

 

발길을 돌려 3.13 반일의사 능을 참배했다. 국내에서 3·1운동(1919년)이 일어나고 열사흘 후인 3월13일 만주 용정에서도 1만 명가량의 한국인과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들고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은 중국관헌과 교섭하여 중국군대로 하여금 만세운동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군중의 위세를 꺾을 수 없었던 중국군은 발포를 강행하여 18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30여 명이 부상당한 채 해산되었다.

 

3·13 대규모 시위 후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형성되고 무장 독립군부대가 창설되었다. 당시 독립군은 국경을 넘어 일제의 식민통지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 만주에서는 3·1운동을 3·13운동으로 부른단다.

 

순직자들 장례식은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조국이 광복되는 날 고국에 유골을 모셔갈 것을 약속하였다. 당시 주민들은 용정시 교외 허청리(합성리) 묘소에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묘역은 근래까지 방치되어 오다 용정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1990년 비를 세우고, 1993년에는 화강암 묘비를 세웠다. 1996년에는 대대적인 공사에 착수해 기념비를 중앙에 두고 앞줄에 9기, 뒷줄에 4기를 배열하는 등 묘역을 성역화하여 해마다 성대한 추모제를 거행한단다. 

 

참배를 마치고 발길을 돌리려다, 박영희 시인이 "실망하지 마세요. 일제가 시신을 내놓지 않아 사실은 빈 무덤입니다"라고 하자 어른 아이 모두가 경악했다. 필자도 실망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2008년 4월 21일 일본을 방문해서 일왕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이명박 대통령 모습이 떠오르면서.

덧붙이는 글 | 명동촌 전시관 책자와 박영희 시인의 설명, ‘2010만주기행’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김약연#명동촌#15만 엔 탈취사건#3.13 반일의사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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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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