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풍수사 송길주는 '관상찰요'를 살펴보라 했다. 관상감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 됐을 터인데 굳이 그것들을 살피게 한 이유가 어디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서과가 두어 차례 불렀을 때야 퍼뜩 정신을 차린 정약용에게 그녀의 뒷설명이 날아갔다.
"나으리, 주검은 식기상이 꺼지고 이렇게 목에 액흔이 감돕니다. 이것으로 보면 지전의 행수나 나상희는 '스스로 목을 졸라' 죽은 게 분명합니다."
"다른 질병은 어떤가?""없습니다."
"나상희가 '스스로 목을 졸라' 죽었다고 보는 이윤 뭔가?"서과는 자못 짜증이 일어났다. 빼어난 추리력과 논리적 사고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정약용이 왜 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묻는질 알 수 없었다. 서과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려 말소리에 힘을 주었다.
"졸린 목의 부위가 검은 데다 입술이 벌어져 이가 드러나고 혀는 빼물었습니다. 끈이 단단하고 곧은 것으로 보아 자액이 틀림없습니다."
자액으로 꾸민 경우는 끈이 느슨하거나 늘어난다. 스스로 목을 매 죽은 경운 먼저 그 시체가 어느 지점에 있으며 죽은 이가 어떤 물건을 사용했는질 살펴야 한다. 동서남북의 방위에 어떤 물건이 있으며 안면은 어느 곳을 보고 있고 등은 어딜 향하는 지도 검사한다. 정약용이 묻는다.
"나상희의 혀는 어느 정도 나왔더냐?""2푼 어림입니다."
"살빛은?""형체(形體)는 누렇고 파리합니다. 두 손은 주먹을 쥐었으며 둔부엔 대변기가 보인 데다 좌우 손 안엔 목에 거는 끈이 남아있으나 강하게 잡지 않았습니다."
이외에도 두 주먹이 놓인 거리를 측정하고 숨통 아래 줄이 교차된 부위의 상흔을 살피고 어느 쪽이 깊은가도 재어봤다. 방안의 물건을 조사하던 중 사헌부로 가져온 문갑 안에 들어있던 유서를 집어들었다. 거기엔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하는 깊은 회한이 배어 있었다.
<···사람이 어찌 눈앞의 것만 보고 살 수 있을까. 조금은 이웃과 애증을 나눠야 하는데 나의 욕심은 그러질 못했고 이것은 사랑하는 것에도 적용되었다.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모든 사람이 편안해지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한 건 나의 지나친 과욕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고쳐 생각해도 나상희의 죽음은 적지 않게 의도적인 냄새가 짙었다. 다시 한 번 광희문 밖으로 나가려는 걸음이 아침나절 연락을 해 온 송길주를 생각하고 관상감으로 방향을 틀었다.
관상감의 천문관측 기구는 중국의 것을 모방해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백제에선 역(曆)을 살피는 박사와 왕실의 길흉사를 예측하는 일관(日官)이 있었으며 고구려엔 일자(日者)가 있었다. 그런가하면 고구려 때엔 점치는 일을 주로 하고 점서(占筮)를 관리하는 태복감이 있었는데 나중엔 서운관(書雲觀)으로 발전했다.
조선이 들어서자 서운관은 그대로 존속돼 오다 세조 때야 관상감으로 바뀌었다. 그곳의 최고 책임자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영사(領事)를 필두로 종9품의 참봉(參奉)에 이르기까지 예순 다섯 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점(占)이나 예언에 밝은 술사들이 수없이 등장해 실제로 관상감을 싸고 도는 인원은 백 명이 훨씬 넘는다고 봐야할 것이다.
오명계(五鳴鷄) 터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한 송길주는 관상감의 지리학훈도(地理學訓導)로 일하는데 그가 만날 장소를 정해놓고 일찍 나와 기다렸다. 장소는 사헌부에서 멀지않은 '바침술집' 안이었다.
날씨가 따뜻한 탓에 백성들의 마음자리도 풀린 듯 싶었으나 정오가 지나면서 쏟아진 빗발 때문인지 도성 안 인심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요즘엔 비 꽃이 떨어지기만 해도 궂은비 내릴까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청명(淸明)이 되면 봄갈이가 시작되고 산과 들로 나간 여인들은 화전놀일 즐기고 양반님네들은 계집을 불러 앉혀 술자릴 열기 마련이다.
작년만 해도 대비전에선 향응을 위한 금백(金帛)을 내렸는데 올해엔 한식날이 머지않았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송길주는 '바침술집'안 깊숙이에서 정약용을 맞이했다.
"어젠 소인이 나으리께 실례한 것 같아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도움 받았지요."정약용이 주위를 훑어보며 자리에 앉자 송길주의 설명이 잔잔히 뒤따른다.
"이곳은 '병술집'이라 주합(酒盒)에 넣어 술을 판매할 뿐 자리에 앉아 차분히 마실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모가비와 인연이 있어 자릴 마련했습니다."
그때 체격 좋은 모가비가 작은 항아리에 든 술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냄새로 보아 사마주(四馬酒)였다.
"술이 잘 익었습니다. 한 잔 하시지요."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나으리께서도 관아에 소속됐으니 이미 전하께 바친 몸이지만, 저희들 목숨은 대비마마께 내놓고 서약한 지 오랩니다. 그렇다보니 목이 달아난다 해도 두렵거나 억울해 하진 않습니다만 근자에 서약한 자들은 대비마마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게 쉽지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으음.""더구나, 상감께서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니 우리가 행하는 일조차 근본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약용은 술잔을 들었으나 마시지 못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사실이 그랬다. 백성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보다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는 생활을 꿈꿨다. 그러나 대비전에서 내린 명은 한결같이 백성들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다. 근자에 일어난 몇 가지 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나으리께서 어찌 생각하시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연전에 대비마마를 찾아온 술사(術士)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송하도인(松下道人)이라 했지요. 그 분이 조선팔도를 돌아본다는 말로 길 떠나기 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제왕이 힘을 얻는 것은 '용'이지만 여인이 힘을 얻는 건 '봉'이라 했습니다."
"봉이라···.""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봉이 쉽게 나타나지 않은 새이기에 심드렁한 표정이었으나 송하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잘못 생각한다는 거였어요. 봉(鳳)은 글자를 나누면 범조(凡鳥)가 되는 것으로 이것은 신령한 닭이라고 했어요."
"신령한 닭?""보통 닭이 아니라 자정이 지나 하루 저녁에 다섯 번 우는 오명계(五鳴鷄)가 모습을 바꾼 봉황이니 그 터를 찾아내는 게 뭣보다 간요하다 했습니다. 관상감의 술사들이 찾아 나섰으나 아직까지 대비전에서 그 터를 찾았단 말이 없는 데다, 요근래 몇 년 사이에 지전 행수와 딸자식이 주검으로 발견됐으니 일이 심상치 않아 나릴 뵙자한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만약 대비전에서 다른 길을 이용해 손을 썼다면 분명 이번 사건과 연관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지전에 들려 그걸 찾아달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정약용은 바침술집에서 나와 지전(紙廛)으로 향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어용상점으로 국역을 부담하는 대신 조정으로부터 강력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주로 왕실과 국가의식에 필요한 물품의 수요를 전담해 온 여섯 가지 물품에 대해 전매권을 행사해 특권적 지위를 누렸다.
주검으로 발견된 나상희가 운영한 곳은 지전이다. 상가(喪家)란 종이딱지를 여러 곳에 붙인 집안엔 시전의 우두머리 신환수가 굴건을 쓴채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가 정약용을 보자 빈청으로 안내하여 차를 내놓았다.
"바쁘실텐데 이곳까지 오시어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제가 아는 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들은 말엔 지전(紙廛)을 운영하던 나웅배 행수가 갑자기 죽은 것으로 압니다만.""생각하면 슬픈 일이지요. 그 어른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이곳은 활기찼습니다. 그 어른이 돌아가신 후 이렇듯 고전하고 있습니다."
"나상희씨가 세상을 떴으니 이 집 재산은 어찌 됩니까?""재산이라 하셨습니까? 글쎄요, 그리 말하시니 재산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그럼, 없습니까?""남아 있다면 아가씨가 목숨을 끊었겠어요. 어려운 살림인데 여기 저기 나가는 돈이 무척 헤펐어요. 아무리 말리려 했지만 워낙 황소고집이라야죠. 결국 아가씨는 자기 고집에 빠져 목숨을 잃은 셈이죠."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는 데 이만한 상권에 남은 물건이라면 몇 해는 살 것 아니겠소?"그 말에 신환수는 실소를 터뜨렸다.
"가게만 열어놓으면 장사가 되는 게 아닙니다. 수완을 부려야지요. 참으로 못된 얘기 같습니다만 여기저기 뇌물도 뿌려야 하고 파리새끼처럼 두 손을 부빌 땐 눈치볼 것 없이 부벼야 하구요. 그런데 그러질 못했어요. 항상 '정도를 가야 한다' '장사에도 상도가 있다'고 주장하는 아가씨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결국 빚은 빚대로 늘어나고 이젠 운영자금까지 바닥나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처하자 목숨을 버린 거죠."
이곳 지전을 정리해 봐야 빚쟁이들 잔치를 하면 몇 푼이나 남을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터뜨렸다.
"이렇게 큰 덩치에 빚잔치를 하면 남을 게 없다니 참으로 씁쓸하네요."듣고 보니 그랬다. 오죽 했으면 자진했겠는가. 가게가 거덜나면 얼마든지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게 사업부진에서 오는 자괴감이니 나상희의 죽음은 사업실패일 것이다.
언뜻 정약용의 뇌리를 치며 달려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죽은 나상희의 주머니에 있던 열쇠에 낀 6이란 숫자였다.[주]
∎비 꽃 ; 비가 시작될 때 몇 방울 떨어지는 비
∎도중(都中) ; 시전의 우두머리
∎사마주(四馬酒) ; 오(午)가 들어간 날로 빚은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