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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수난의 시기

 

.. 특히 과학기술자들에게 패전 직후는 수난의 시기였다 ..  <전후 일본의 과학기술>(나카야마 시게루/오동훈 옮김, 소화, 1998) 12쪽

 

"패전 직후(直後)는"은 "전쟁에 진 바로 뒤는"이나 "전쟁에 진 다음에는"으로 손봅니다. '시기(時期)'는 '때'로 손질하고, '특(特)히'는 '더욱이'나 '더구나'나 '게다가'로 손질해 줍니다.

 

 ┌ 수난(受難) :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함

 │   - 수난의 역사 / 수난을 당하다 / 수난을 겪다

 │

 ├ 수난의 시기였다

 │→ 어려운 때였다

 │→ 힘든 나날이었다

 │→ 고달픈 하루하루였다

 │→ 괴로운 하루하루였다

 │→ 끔찍한 나날이었다

 │→ 견딜 수 없는 때였다

 └ …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겪기도 하고 고달픈 일을 겪기도 합니다. 힘든 일, 힘겨운 일, 벅찬 일, 버거운 일을 겪습니다. 고된 일을 부대끼기도 하고, 고단한 일로 골머리를 앓을 때도 있어요. 온갖 일을 만나고 갖가지 느낌이 겹칩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겪을 다 다른 골치아픔입니다.

 

그래도 이 고단하고 괴롭고 고달프고 힘겨운 일을 좋은 벗으로 삼을 수 있다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벅차고 어렵고 끔찍한 삶을 반가운 이웃으로 여길 수 있으면 어떻겠느냐 싶습니다. 고단한 가운데에도 힘을 내어 봅니다. 힘겨운 가운데에도 주먹을 불끈 쥐어 봅니다. 벅차고 어렵지만 다시금 이를 앙다뭅니다. 끔찍하고 괴롭지만 나한테 좋은 밑거름이 된다고 여기며 다시 일어서 봅니다.

 

배고픈 나날이 있어 배부른 기쁨을 알지만, 배고픈 나날이 있어서 배고픈 이웃을 온몸으로 느끼며 껴안게 됩니다. 짓눌리고 괴로운 나날이 있어 아프고 깨지고 쪼그라들지만, 이렇게 아프고 깨지고 쪼그라들던 나날이 있었기에 아픈 이웃과 깨진 동무와 쪼그라든 겨레를 돌아보며 부둥켜안을 수 있습니다.

 

 ┌ 수난의 역사 → 괴로운 역사 / 고단한 역사

 ├ 수난을 당하다 → 어려움을 겪다 / 어려움을 치르다

 └ 수난을 겪다 → 어려운 일을 겪다

 

곰곰이 돌아보면, 이 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과 글은 여태까지 어느 한 번도 걱정없거나 느긋하거나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고 느낍니다. 언제나 짓눌리고 늘 짓밟혀 왔습니다. 힘을 움켜쥔 이들이 짓누르고 돈과 이름을 거머쥔 이들이 짓밟아 왔습니다. 사람들 스스로도 아끼거나 보듬거나 돌보지 못했어요. 늘 엉망진창인 채로 이어온 우리 말이요, 언제나 갈기갈기 찢긴 채 버텨 온 우리 글입니다.

 

한자말 '수난'을 풀이한 국어사전을 들여다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함"이 '수난'이라고 풀이하지만, 보기글에는 "수난을 당하다"가 실려 있습니다. 국어사전 풀이를 따른다면 "어려운 일을 당함을 당하다"가 되는 꼴입니다. 그리고 '當하다'란 '겪다'와 같은 뜻이기 때문에 "수난을 겪다"도 앞뒤가 어긋난 겹말 씀씀이입니다.

 

그런데 이런 얄딱구리한 국어사전 얼거리를 깨닫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국어사전을 엮는 국어학자는 여태껏 우리 말을 어떻게 배우고 익히고 살피고 가다듬었을까요. 우리 스스로도 돌보지 않았으나, 국어학자 된 분들마저 보듬지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과 학자뿐 아니라 글과 말로 먹고사는 지식인들 또한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살림살이도 괴롭다지만, 우리 말살이도 괴롭습니다. 우리 삶터도 고달프다지만 우리 글터도 고달픕니다. 안타까운 고리는 끊어지지 못하고, 슬기로운 고리로는 이어지지 못합니다.

 

 

ㄴ. 수난의 계절

 

.. 뱀필드의 겨울은 구질구질하게 비가 많이 내릴 뿐만 아니라 폭풍 및 파도 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수난의 계절입니다 ..  <숲과 연어가 내 아이를 키웠다>(탁광일, 뿌리깊은나무, 2007) 65쪽

 

"뱀필드의 겨울"은 "뱀필드 겨울"이나 "뱀필드에서 맞는 겨울"이나 "뱀필드로 찾아드는 겨울"로 손봅니다. '폭풍(暴風)'은 '세찬 바람'으로 다듬고, '파도(波濤)'는 '거센 물결'로 다듬으며, "등(等)으로 인(因)해"는 "들 때문에"로 다듬습니다. '계절(季節)'은 '철'이나 '때'나 '날'로 고쳐씁니다.

 

 ┌ 수난의 계절입니다

 │

 │→ 수난이 그치지 않는 철입니다

 │→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 철입니다

 │→ 어려움이 자꾸 이어지는 철입니다

 │→ 고달픈 철입니다

 │→ 괴로운 날입니다

 │→ 힘겨운 때입니다

 └ …

 

한자말 '수난'을 넣고 싶다면 알맞게 넣어 줍니다. "수난의 계절"이 아닌 "수난이 이어지는 계절"이요 "수난이 그치지 않는 계절"이며 "수난이 가득한 계절"입니다.

 

한자말 '수난'을 다듬어 내겠다면 다듬을 노릇입니다. 이러면서 한자말 '계절'을 함께 다듬습니다.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 나날"이요 "고달픔이 이어지는 하루하루"이며 "어려움이 가득한 때"입니다.

 

"고단한 철"이요 "고달픈 철"이며 "괴로운 철"입니다. "힘겨운 철"이고 "벅찬 철"이며 "버거운 철"이에요. "힘에 부치는 철"인 한편 "힘든 철"입니다.

 

어쩌면 "슬픈 철"이나 "무서운 철"이나 "추운 철"이라 할 테지요.

 

살포시 마음을 기울이면 알뜰살뜰 여밀 수 있는 말입니다. 가만히 마음을 쏟으면 슬기롭게 북돋울 수 있는 글입니다. 아무렇게나 쓴다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말이 되고, 대충대충 쓴다면 대충대충 일그러지는 글이 됩니다.

 

사랑을 담아 한 마디 가다듬는 매무새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믿음을 실어 글줄 하나 어루만지는 몸가짐으로 새로 태어나면 기쁘겠습니다. 한결 깨끗하거나 정갈하게 말을 한다면 참으로 아름답겠지요. 더욱 착하거나 참다이 글을 쓴다면 몹시 어여쁠 테지요. 목청 높이 외치는 한글사랑보다는, 조용히 내 삶자리에서 알뜰살뜰 꾸리는 조촐한 살림말과 살림글이 되게끔 힘쓰는 사람을 마주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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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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