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월 26일(화)

오늘도 바람소리가 몹시 사납다. 새벽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는 풍경이 몹시 스산하다. 해가 뜨기 직전의 어두운 하늘 아래, 검은 갯벌이 싸늘한 빛을 띠고 있다. 바닷가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풀잎이 산발을 한 채 바람에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다. 보기만 해도 뼛속이 시리는 풍경이다.

문 밖으로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기온이 어제보다 10도가량 더 내려갔다고 하는데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어제와 다를 게 없다. 요 며칠 동안 입고 있는 옷 그대로다. 도양읍에서 추위에 대비하지 않은 걸 후회한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하루 사이에 날이 이렇게 추워질 줄은 몰랐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데 먼저 찬바람이 쌩하고 가슴에 들어와 안긴다. 순간 몸이 휘청한다. 얼음같이 차갑고 무거운 바람이다. 자전거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들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무시무시하다. 하늘에서 용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상태로 얼마나 오래 자전거를 탈 수 있을지 걱정이다. 강풍에 추위까지, 감당하기 힘든 하루가 될 게 분명하다.

강풍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춥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마 햇볕이 나기 망정이다. 하늘마저 흐렸다면, 자전거여행이고 뭐고 모텔 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가다가 못 가는 한이 있더라도 가는 데까지는 가보자는 심산으로 다시 거리로 나선다.

나로2대교를 넘어 외나로도로 들어선다. 나로도항까지 가는 길에 자꾸 브레이크를 잡고 멈춰 서게 된다. 바람 때문에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 자전거 바퀴가 자꾸 궤도를 벗어난다. 차들이 많은 곳에서는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고흥반도에 들어선 이후로 고난의 연속이다.

얼어붙은 몸으로 맞바람과 싸워가며 겨우 나로도항에 도착한다. 어딘가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마시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이 큰 항구에 딱히 쉴 곳이 없다. 부둣가에 서 있으려니, 마치 허허벌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 와중에도 자꾸 주변 풍경에 눈이 간다. 앞바다에 낮게 떠 있는 섬이 방파제 역할을 하는지 바다는 이상하리만치 잔잔하다. 자꾸 등을 떠미는 바람만 아니라면, 항구 주변 풍경을 천천히 감상할 만하다. 하지만 바람이 어찌나 거칠게 부는지 근로사업을 나온 마을 주민들마저 화장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꼼짝을 하지 않고 있다.

 나로도항 앞바다. 낮게 떠 있는 섬.
나로도항 앞바다. 낮게 떠 있는 섬. ⓒ 성낙선

나로도항에서 나로도우주센터까지 가는 길은 길고 높은 언덕이다. 경사가 급한 편은 아니지만, 맞바람이 부는 까닭에 마치 급경사를 오르는 것처럼 힘들다. 겨드랑이로 식은땀이 흐른다. 언덕을 오를 땐 보통 몸이 뜨거워지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렇지 않다. 몸에서 솟는 열이 그 열을 빼앗아가는 바람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몸이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는다. 다리 힘은 바람이 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그런데도 언덕 끝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중간에 이대로 그냥 되돌아 내려갈까, 심한 갈등을 겪는다. 충동을 겨우 억누른다.

가까스로 언덕 끝에 도달하지만,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일 역시 만만치 않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땀으로 젖은 몸이 급격히 식어 버린다. 마치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과도 같다. 이런 경사에서는 보통 시속 40km 이상을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20km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하고 계속 브레이크를 잡는다.

이런 상태로 내가 오늘 안으로 외나로도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나중에 나로도우주센터를 나오면서 반대편 방향에 있는 염포마을까지 가는 길은 깨끗이 포기한다. 그 길은 또 얼마나 힘들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로도우주센터에 바라보는 바닷가 풍경이 생각 밖으로 아름답다. 사실 나로도에서는 그곳의 바다가 어디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거친 날씨만 아니라면, 언덕이 아니라 산을 넘어서라도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고 싶은 풍경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나로도우주센터가 있는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인 채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움푹 들어간 형상이어서 바람의 세기도 한결 덜한 편이다. 그 덕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몸이 따뜻한 햇살에 서서히 녹아내리는 걸 느낄 수 있다. 해변이 몽돌밭이어서 그런지 더 포근한 느낌이다.

 나로도우주센터 앞 몽돌해변
나로도우주센터 앞 몽돌해변 ⓒ 성낙선

우주센터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서는 먼저 스낵코너로 발을 옮긴다. 나로도에서는 식당을 찾아다니는 게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내는 것보다 더 어렵다. 식당 비슷한 게 눈에 띄면 무조건 머리부터 디밀고 들어가야 한다. 밥을 먹고 나니까 온몸이 나른하다.

전시관 관람은 대충 하고, 전시관 의자 위에서 더 오랜 시간을 머무른다. 보는 눈만 없으면, 햇볕 잘 드는 곳에 벌렁 드러누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좋겠다. 하지만 때맞춰, 학생 단체 관람객들이 들이치는 바람에 점잖은 어른 흉내를 내고 앉아 있다.

이번 여행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거지만,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참 예의가 바르다.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서 인사를 자주 받는다. 서울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은 기본이다. 전라도 지역에 들어서서는 '운동 가세요?'라는 말도 여러 차례 들었다.

그것 참 살가운 말이다. 서울에서는 낯익은 동네 어른들에게나 하는 인사가 아닌가? 이런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오늘 단체 관람을 온 학생들 중에는 한 아이가 '고생하시네요'라며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그 녀석, 참 어른스럽다. 내가 교장이라면 표창장이라고 주고 싶다.

경기도에서는 대문 앞에서 놀던 어린아이가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걸 본 적도 있다. 이런 인사법을 어디서들 배웠는지 궁금하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조차 함부로 행동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어른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나로도해수욕장
나로도해수욕장 ⓒ 성낙선

 나로도우주센터 전시관
나로도우주센터 전시관 ⓒ 성낙선

외나로도를 나와서는 다시 내나로도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어제 내나로도를 지나오면서 미처 가보지 못한 동쪽 해안을 마저 다 돌아야 한다. 이곳에서 마주친 풍경이 또 내 마음을 살살 녹인다. 산 아래로 오목하게 들어온 바닷가에 햇살은 가득한데 바람은 거의 불지 않는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다.

그 바닷가를 따라 해안도로가 겨우 어깨를 드러낸 정도로 낮게 엎드려 있다. 자전거 타기에 충분히 넓고 평탄한 도로다.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해안도로를 달려왔지만, 이 길처럼 아름답고 재미있는 길도 드물다. 이 길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만, 어디에나 끝은 있기 마련이다.

 해안도로
해안도로 ⓒ 성낙선

이 길을 벗어나면서 내나로도와도 작별이다. 언제고 다시 한 번 더 와보고 싶다는 소망을 남기고 떠난다. 내나로도와 고흥반도를 연결하는 나로1대교로 올라서면서 다시 바람이 내 몸을 덮친다. 바람이 그새 더 날이 서 있다. 도무지 비위를 맞추기 힘든 바람이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다. 날이 저물면서 기온도 급격히 떨어진다.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어딘가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남열해수욕장까지는 달리는 데만 전념한다. 남열해수욕장까지 또 얼마나 많은 해안 절벽을 오르내렸는지 모른다. 오늘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생이다.

 바다 풍경
바다 풍경 ⓒ 성낙선

 갯벌 위의 섬
갯벌 위의 섬 ⓒ 성낙선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다. 슈퍼마켓과 민박을 겸하고 집에 짐을 내려놓고 나니, 다시 일어서기가 싫다. 마침 샤워장도 마당 한구석, 어두운 곳에 있다. 해는 이미 저물고 날은 몹시 춥다. 수건을 들고 샤워장까지 왔다 갔다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문제는 저녁밥이다. 그래도 해수욕장이라 무언가 먹을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아무것도 없다. 결국 주인집에 얘기해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 눈물 나는 저녁밥이다. 남열해수욕장은 나로호 발사 당시, 발사 장면을 관람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알려져 한때 화제가 됐던 곳이다. 우주로 가는 시대를 열고 있는 나로도에서 라면으로 때우는 저녁이라니, 그 맛 참 씁쓸하다. 오늘 달린 거리는 66km, 총 누적 거리는 2802km다.

 남열해수욕장 가는 길의 바닷가 풍경
남열해수욕장 가는 길의 바닷가 풍경 ⓒ 성낙선

 해지기 직전, 검은 모래가 인상적인 남열해수욕장
해지기 직전, 검은 모래가 인상적인 남열해수욕장 ⓒ 성낙선


#내나로도#외나로도#나로도우주센터#남열해수욕장#나로도해수욕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