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연중 특별기획 '유러피언드림, 그 현장을 가다'를 연재하고 있다. 그 네 번째 대상은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집단들의 평화로운 합의'를 이루어낸 '사회협약의 나라' 네덜란드다. 미국식 소득의 양극화 없이 고용성장을 이룬 인간적인 모습의 사회협약모델을 심층취재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
글 : 구영식 기자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대화, 협력, 타협, 합의, 사회적 지지….'네덜란드 사회협약 모델을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네덜란드에는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사회협약 전통이 있었다. 1919년 아베르제 노동장관에 의해 최고노동위원회가 설립된 것. 노사정 자문기구였던 최고노동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노조는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파트너'로 떠올랐다.
이러한 사회협약 전통은 네덜란드 사회협약 모델을 떠받치고 있는 노동재단(1945년)과 사회경제위원회(1950년)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이 두 기구가 헤이그 중심가의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다는 사실은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정부가 위원장 임명하지만 재정 등에서 '독립성' 유지
사회경제위원회(Sociaal-Economische Raad, SER)는 노동재단보다 5년 늦은 1950년에 출범했다. 1950년 1월 제정된 '산업조직법'에 따라 출범한 이후 "전후 경제부흥과 임금 및 노사관계 안정을 가능하게 했던 대표적인 기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노동재단이 '노사협의기구'라면, 사회경제위원회는 '노사정 3자 협의체제'에 기반한 '자문기구'다.
사회경제위원회는 노사 대표 각 11인과 공익대표('독립적 전문가') 11인 등 총 33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노조 쪽에서는 네덜란드 노총 7명, 네덜란드 기독노총 2명, 중간사무직 노총 1명, 서비스업 노총 1명, 사용자 쪽에서는 네덜란드 경영자연합 7명, 중소기업연합 3명, 농업·원예연합 1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국왕이 임명하는 공익위원은 주로 경제학이나 재정학, 법학, 사회학 등을 전공한 교수 등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국왕에 의해 임명되지만 정부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독립적'이다. 정부 쪽 대표로는 네덜란드은행 총재와 중앙경제정책분석국장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회경제위원회는 ▲경제성장과 지속 가능한 성장의 균형 ▲노동시장 참여 최대화 ▲공평한 임금 분배를 추구하고 있다. 위원회의 주요 역할은 ▲정부·의회에 사회경제정책 관련 제안서 제출(정책자문) ▲산업위원회 등 법적 통상조직 감독 등이다.
사회경제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국내외 사회경제정책 사안들과 관련해 의회와 정부에 제안서를 제출하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사회·경제의 중기 발전계획, 사회정책, 산업정책, 노동 및 산업안전 관련 법안, 근로자 참여 등 노동시장정책, 유럽 통합정책, 운송문제, 소비자문제 등을 다룬다. 이 가운데 향후 5~10년 동안 가야 할 국가정책을 보여주는 '사회경제의 중기 발전계획'이 가장 중요하다.
지난 1995년까지 의회는 모든 사회경제정책과 관련해 사회경제위원회에 자문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1995년 산업조직법이 개정되면서 사회경제위원회와 협의하고 자문해야 할 의무조항(제41조)이 폐지됐다.
사회경제위원회의 전체 회의는 매달 한 번씩 열린다. 전체 회의 외에 열리는 'A3위원회'로 불리는 소규모 위원회가 있는데, 합의는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정희정 암스테르담대 노동연구소 박사는 "이 소규모 위원회에는 3자 대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며 "이 안에서는 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 토론 및 의견 교환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회경제위원회가 운영자금을 네덜란드 상공회의소로부터 받는다는 점도 독특하다. 네덜란드 상공회의소가 각 기업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사회경제위원회의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사회경제위원회는 법에 의해 제도화된 상설기구인데도 정부로부터 운영자금을 지원받지 않는다. 해마다 1600만 유로의 운영자금이 소요되고 있다.
2년 임기의 위원장을 정부가 임명한다는 것을 뺀다면 재정과 운영은 철저하게 정부로부터 독립돼 있다. 사회경제위원회 측은 "법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회경제위원회는 정부기구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노사정 3자의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에 60년간 존속"
16일 오후 4시 헤이그 중심가에 위치한 사회경제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알렉산더 리누이 칸(Alexander Rinnooy Kan) 위원장은 "법에 의해 재정적으로 독립하도록 되어 있다"며 "정부가 (위원회를) 싫어한다면 재정지원을 멈출 수도 있기 때문에 재정 독립를 명문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도 이런 위원회가 있지만 정부에서 돈을 지원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완전히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특별하다."물론 2년 임기의 사회경제위원장은 정부가 임명한다. 정부가 사회경제위원회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그래서 재정독립을 법으로 명문화할 정도로 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재정이나 운영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큰 한국의 노사정위원회와 매우 다른 지점이다.
리누이 칸 위원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원회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인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는 세계적 금융회사인 ING그룹의 아태지역 집행위원장으로 근무하다 5년째(3선) 사회경제위원장을 맡고 있다.
"완전히 거리를 둔 것은 아니지만 독립적이다. 위원장은 정부에 의해 지명되지만 (조직운영과 활동에서는) 독립적이다. 2년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데, 그 기간 동안 정부는 위원회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경제위원회는 정부에 자문을 해주고 있는데, 그것의 정책집행률은 지난 10년간 90%에 이른다는 것이 리누이 칸 위원장의 설명이다. 그만큼 사회경제위원회의 자문내용이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 이렇게 사회경제위원회의 자문내용이 대부분 정부 정책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대화를 통한 합의(동의)'에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생각으로 시작한다. 매우 다른 관점으로 조율이나 협의를 시작하지만 협상을 통해 결국에는 합의로 끝낸다."이어 리누이 칸 위원장은 "사회경제위원회가 60년간 존속한 것은 그것이 노사정 3자 이익에 부합했고 더 넓은 차원에서는 사회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문은 이 나라 전체에 의미가 있다. (사회경제위원회 구성원들이) 서로 동의하면 정부가 따를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노사가 각자) 정부에 곧장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확률은 높지 않다. 그래서 사회경제위원회를 통해 합의과정을 거치는 것이다."리누이 칸 위원장은 "바세나르협약 이후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중요한 부분은 변하지 않았다"며 "노사가 대화와 협상을 진지하게 계속함으로써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사회경제위원회에서 취재진에게 건넨 2010년도 영문책자 <네덜란드의 사회경제위원회>에는 '네덜란드 자문 시스템'(the Dutch consultative system)의 역사적 배경과 특징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우리는 공공정책을 좀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함께 일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 '자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항상 상대적 소수자였던 네덜란드의 특징일지 모른다. 어떤 그룹도 절대적 다수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연합을 형성하고 교섭하며 함께 일할 필요성이 있었다.""노동자가 자신도 가치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야"
노무현 정부 시절 '네덜란드 모델'을 진지하게 검토했을 당시 '노동자의 경영 참여' 문제가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됐다. 자본과 보수진영에서는 "네덜란드 모델(의 핵심)은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아니라 임금인상 억제 등에 있다"고 억지를 부리며 저항했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 모델을 추진하려고 했던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는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해야 사회협약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리누이 칸 위원장은 "노동자의 경영 참여는 아주 정상적인 것"이라며 한국에서 일었던 논란을 일축했다. 그는 "우리가 노동자들의 의견을 믿어야 일의 질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최종 책임은 경영자에게 있겠지만 네덜란드 경영자는 노동자들의 아이디어, 창의력을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특히 리누이 칸 위원장은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사회적 대화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 뒤, "노동자들도 중요하고 진지하게 대우를 받아야 할 만한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다"며 "노동자가 자신도 가치가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한 유럽이 2008년 금융위기에 이어 최근 심각한 재정적자문제를 겪고 있는 것과 관련, 리누이 칸 위원장은 "우리 역할은 단기간 해결책보다 장기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데 있다"며 "우리 자문은 대부분 경제의 지속적인 문제 해결에 있다"고 강조했다.
리누이 칸 위원장은 "재정적자를 빨리 줄여야 하지만 아주 급하게 하지 않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면서도 "(장기적 관점을 제시하는 데) 일반적으로 6~9개월 걸리지만 긴급상황의 경우 직접 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 구영식 기자(팀장), 조명신 기자, 인수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