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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연중 특별기획 '유러피언드림, 그 현장을 가다'를 연재하고 있다. 그 네 번째 대상은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집단들의 평화로운 합의'를 이루어낸 '사회협약의 나라' 네덜란드다. 미국식 소득의 양극화 없이 고용성장을 이룬 인간적인 모습의 사회협약모델을 심층취재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글 : 구영식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1982년 네덜란드 노총 위원장으로 바세나르협약에 참여했던 빔 콕 전 총리는 일흔세 살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82년 네덜란드 노총 위원장으로 바세나르협약에 참여했던 빔 콕 전 총리는 일흔세 살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조명신

18일 오후, 빔 콕(Wim Kok, 73) 네덜란드 전 총리를 만나러 암스테르담 근교 TNT 본사로 가는 취재진의 마음은 불편했다. 며칠 전 헤이그에서 TNT 우체부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목격하고 취재했던 경험 때문이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그는 현재 TNT에 경영자문을 해주는 고문(commissioner)이다. 마치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단병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 대기업에 경영자문을 해주는 격이다.

빔 콕 전 총리가 네덜란드 노총(FNV) 위원장출신임에도 노조 쪽의 시선이 썩 호의적이지 않다. 네덜란드 현지에서 만난 노총의 한 관계자는 "빔 콕 전 총리가 노조 활동가였을 때는 CEO의 연봉이 최저 임금의 20배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해놓고 대기업에 들어간 후에는 CEO가 많은 연봉을 받아가는 것에 동의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빔 콕 전 총리는 로열 더치 쉘과 ING, TNT 등 대기업에 경영자문을 해주는 대가로 각 기업으로부터 1년에 수만 유로에 이르는 연봉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현재 위치가 '바세나르협약의 주역'이라는 그의 역사적 명예를 크게 훼손하지는 못할 듯하다. 암스테르담대에 다니는 한 학생은 "빔 콕 전 총리는 네덜란드의 영웅으로 각인돼 있다"고 말했다. 

'배신자' 비난 속에서도 바세나르협약 성사시키다  

 네덜란드 문화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바세나르협약은 사회협약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됐다. 사진은 암스테르담의 뮤지엄 광장에 있는 조형물 'I amsterdam'.
네덜란드 문화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바세나르협약은 사회협약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됐다. 사진은 암스테르담의 뮤지엄 광장에 있는 조형물 'I amsterdam'. ⓒ 조명신

빔 콕 전 총리는 네덜란드 건설부문 노조운동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통합 전 노총 위원장이던 1982년 노사의 양보를 이끌어내 '바세나르협약'을 성공시켰다. 특히 당시 노조 일부에서는 그를 두고 "노동자를 팔아먹은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협약 내용에 임금삭감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빔 콕 전 총리는 당시 크리스 반 빈 경영자연합(VNO-NCW) 회장이 거주하고 있는 자택으로 찾아가 며칠 간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단축'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협약을 이끌어냈다. 이 바세나르협약은 이후 네덜란드 사회협약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됐다. '제도화된 사회적 대화기구'인 노동재단과 사회경제위원회가 60여 년 동안 존속될 수 있었던 것도 '바세나르협약의 성공'에 있었다. 

엘코 타스마 노총 선임 정책위원은 "바세나르협약이 체결되기 전에 노동재단이나 사회경제위원회 등 사회적 대화 시스템이 있었지만 그 협약이 성공하고 나서 사회적 대화가 더 좋아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바세나르협약은 노사정 3자가 모두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어떻게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와 관련된 상징이 되었다."

바세나르협약이 이루어진 바세나르는 헤이그 인근의 작은 도시다. 인구 2만 5000명 정도가 살고 있는 이곳은 외교관이나 다국적 임원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바세나르협약의 한축이었던 크리스 반 빈 경영자연합 회장의 자택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바세나르는 '공산권 전력무기 수출금지체제'가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바세나르협약을 체결한 이후 빔 콕 전 총리는 통합 네덜란드노총 위원장으로 선출됐고, 1986년에는 정치권에도 진출해 네덜란드 노동당(PvdA, 중도좌파)의 지도자였던 요프 던 아윌 (Joop den Uyl)의 후임으로 노동당 대표 자리에 올랐다.

이후 부총리 겸 재무장관(1989년)을 거쳐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총리직을 연임했다. 현재는 대기업 경영자문은 물론이고 NGO 후원활동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으며 국가 종신고문격인 명예장관으로도 활동 중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새만금 홍보 전도사'를 맡고 있다. 지난해 간척지에 건설 중인 네덜란드 알메르시를 방문한 박영준 당시 국무총리실 차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만금 특별자문관'으로 위촉된 것.

빔 콕 전 총리는 여러모로 룰라(Lula da Silva) 브라질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 철강노조위원장을 거쳐 연방하원의원에 진출했고, 브라질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노동운동 지도자가 국가를 경영하는 최고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노조 일각의 비판 속에서도 국민의 지지가 여전하다는 점에서 두 지도자는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바세나르협약의 성공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빔 콕 전 네덜란드 총리
빔 콕 전 네덜란드 총리 ⓒ 조명신

큰 키에 볼이 불그스레한 빔 콕 전 총리는 7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처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1시 20분 TNT 본사 회의실에서 만난 그는 "현재 비정부 기구에서도 활동하고 있고 강연이나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며 자신의 바쁜 근황을 전했다.

빔 콕 전 총리가 한 축을 맡았던 바세나르협약이 체결된 지도 벌써 28년이 흘렀다. 그는 28년 전의 '결정적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

"누구도 그 협약에 기뻐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왜 임금인상 투쟁을 막느냐고 이야기했고 사용자 측도 이런 험한 일은 정부가 하도록 내버려두지 왜 우리가 하냐고 불평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병을 앓고 있었고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의사처럼 진단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찾아야 했다. (결국 바세나르협약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봤다. 실업률은 낮아졌고, 네덜란드 경제는 다시 살아났다. 바세나르협약의 성공은 노동자들에게서 큰 상을 주었다."

노총 위원장이었던 빔 콕 전 총리에게 노조를 설득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대신 임금 삭감에 동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배신자"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그는 "당시 노조는 협약내용에 다 동의했다"며 "그 협약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소수의 노동자들은 아직 이익을 많이 내고 있는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은 '바세나르협약 때문에 임금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노조원들이 거의 동의했다. 당시 경제위기가 깊어가고 있었다. 실업자가 늘어나면 안 되고 우리의 경쟁력을 키워야 했다. 네덜란드는 독일이나 프랑스에 뒤처지고 있었다. 결국 바세나르협약으로 네덜란드의 경쟁력이 높아졌다."

바세나르협약은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이 한발씩 양보해 '주고받기'를 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정부의 개입보다 노사의 자발적(혹은 자율적) 협의가 협약을 성공시킨 주요 동력이었던 것. 

"노동자들은 나중에 상을 받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 (임금 등을) 포기해야 했다. 경영자는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몇 년 지나면서 젊은 실업자들은 줄어들고 일자리도 많이 생기고, 경제도 나아졌다. (바세나르협약의) 성공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눈에 보이는 변화가 나타났다."

"사회적 대화를 위해선 두 명의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 조명신
네덜란드 사회협약 모델은 '네덜란드 문화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바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모델이라기보다 철저히 '네덜란드적인 모델'이라는 것. 특히 1910년대에 이미 노조를 사회적 파트너로 받아들인 것은 네덜란드 문화와 역사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빔 콕 전 총리는 "나는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내가 경험한 것을 공유할 수는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는 전통적으로 두 개의 탁자에 앉아서 서로의 얘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었다. 실질적인 해결책을 만들 수 있는 다리(bridge)를 만드는 것이 네덜란드의 특징이다. 네덜란드 안에서 사회적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드는 것 말이다. 네덜란드 사회경제모델에는 (노사가) 서로 진지하게 존중하는 마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따라 주고, 펼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따라야 한다."

빔 콕 전 총리가 표현한 '다리'란 노동재단(노사협의기구)와 사회경제위원회(노사정자문기구)를 가리킨다. 취재진은 "노동재단과 사회경제위원회가 잘 작동되고 있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는 "모든 것은 다 완벽하지는 않다"며 답변을 이어갔다.

"양자가 이해를 많이 하지만 사이가 안 좋을 때도 있다. 노조에는 급진적인 사람도 있고 온건한 사람도 있다. 사용자 쪽에도 융통성이 없어 대화의 문을 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사회적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두 명의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이어 빔 콕 전 총리는 "노동재단과 사회경제위원회는 네덜란드 안에서 사회적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잘 맞는 중요한 기구"라면서 "하지만 다른 (사회적) 힘들이 있다"고 말했다.

"정당이 사회경제위원회에 아주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모든 정치적 결정을 하는 기구는 의회밖에 없다. 의회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용하는 곳이다. 내가 보기에 정치적 민주주의는 시민사회가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사람들이 사회경제위원회를 알아봐주면 정부에서도 위원회의 조언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사회경제위원회는 계속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경제위원회 회원들의 의견이 아주 많이 다르면 사회경제위원회는 무시당할 수 있다. 결국 사회경제위원회나 노동재단은 정치적 환경이나 그들의 역량에 의해 좌우된다. 협상이 중요하거나 노사에 좋은 조언을 할 수 있으면 그들의 영향력이 증가한다."

빔 콕 전 총리의 얘기는 얼핏 '사회적 대화 체제'도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정당구도와 정부구성의 성격 등에 따라 사회적 대화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강한 진보정당의 존재가 사회협약 성공의 요인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의 답변은 단호했다.

"나는 항상 얘기한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노사는 항상 있을 것이다. 노사는 좌파정부가 있을 때도 있고, 우파 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있다. 그래서 노사는 어떤 환경에서라도 항상 대화를 해야 한다. 노사는 항상 그런 관계에 있었다."

엘코 타스마 네덜란드 노총 선임 정책위원은 "최종적으로 누가 집권했는지가 중요하다"면서도 "(대화의) 주제가 중요하면 누가 집권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경영자 측이 노조를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동의 안해"

ⓒ 조명신

취재진이 네덜란드 현지에서 반복해 들은 얘기가 있다. 노조 측이든 사용자 측이든 "노사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한다"고 얘기했다. 이는 불신과 대립의 노사관계에 놓여 있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글로벌기업 삼성의 '무노조전략'은 가장 극단적인 노사관계를 보여준다. 삼성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언을 받들어 '무노조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빔 콕 전 총리는 "무노조전략은 사회협약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노조는 경영자들에게도 꼭 필요하다. 노사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경영자 측은 노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 사기업들에 노동자평의회가 있겠나? 거기서 노동자들이 자기 의견을 펼치고 회사에 조언해줄 수도 있다. 회사가 추진하는 정책을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실제로 경험했다. 그런 사회적 대화를 하는 업체가 노동자를 무시하는 업체보다 더 큰 이익을 냈다. (노사가 서로 대화하는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훨씬 더 일하고 싶어한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지원할 수 있다. 그래서 노조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빔 콕 전 총리는 "경영자 측이 노조를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기업 수준에서나 국가 수준에서나 노조가 경영자와 같이 의견을 같이 펼치는 것이 좋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빔 콕 전 총리는 노동운동가출신으로서 총리직을 수행했던 일은 "꽤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큰 모험이었다"는 평가도 곁들였다.

"노조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가 갑가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 (노동운동가출신이) 총리가 됐을 때 많은 기대를 하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노조 지도자로서 나를 많이 믿었다. 하지만 나중에 정치인으로서 나에 대해서는 실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인으로서는 노조 지도자 같은 정책을 펼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을 완전히 믿었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다' 등등…. (정치인이 되어서) 사회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지지자들을 많이 실망시킬 수 있다. 그래서 (총리직 등을 수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빔 콕 전 총리는 "모든 것은 대화(communication)에 달려 있다"며 "왜 노동자가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해야 하는지 설명을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운동 지도자, 총리, 대기업 고문…. 빔 콕 전 총리의 진면목이 어느 것인지는 누구도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TNT의 '우체부 대량감원 사태'가 어떻게 해결되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근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 구영식 기자(팀장), 조명신 기자, 인수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자문)


#유러피언드림#네덜란드#빔 콕#바세나르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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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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