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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

.. 예를 들면 나는 텔레비전 출연이 아주 싫고 귀찮다. 파티 참석이나 사진 촬영도 거의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다 ..  <소노 아야코/오경순 옮김-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리수,2005) 30쪽

"예(例)를 들면"은 "보기를 들면"이나 "이를테면"으로 다듬고, "텔레비전 출연(出演)이"는 "텔레비전에 나가기가"나 "텔레비전에 나와야 하는 일이"로 다듬습니다. "파티(party) 참석(參席)이나"는 "파티에 낄 때나"나 "무슨 잔치 자리에 낄 때나"로 손보고, "사진 촬영(撮影)도"는 "사진을 찍을 때에도"나 "사진을 찍혀야 할 때도"로 손봅니다.

 ┌ 고통(苦痛) :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
 │   - 남에게 고통을 주다 / 목을 비트는 질식의 고통 속에서
 │
 ├ 거의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다
 │→ 거의 미칠 듯이 괴롭다
 │→ 거의 죽을 듯이 괴롭다
 │→ 거의 숨이 막히도록 괴롭다
 └ …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 찬찬히 생각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자말 '고통'이란 토박이말 '괴로움'을 한자로 옮겨적은 낱말임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딱히 다른 뜻을 담은 낱말 '고통'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한자로 적바림하니 '고통'입니다.

이리하여 "남에게 고통을 주다" 같은 말이란 "남을 괴롭히다"를 한자말을 써서 적바림한 셈입니다. "목을 비트는 질식의 고통 속에서"는 "목을 비틀어 숨막히듯 괴로운 가운데"나 "목이 비틀려 숨막힐듯 괴로우면서"를 한자말을 넣어 적바림한 셈이에요.

"너무 고통스럽잖아"라 적을 때에는 겉은 한글이지만 옹글게 쓴 우리 말이 못 됩니다. 옹글게 쓴 우리 말이 되도록 하자면 "너무 괴롭잖아"처럼 적어야 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안겼어"라 적을 때에도 모양새는 한글이나 참다이 쓴 우리 말이 될 수 없어요. "나를 괴롭혔어"라 적어야 비로소 우리 말답다 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이 보기글에서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라 적바림하면 그야말로 뚱딴지 같은 소리가 됩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인데 "괴로움과도 같은 괴로움"이라 읊는 꼴이니까요.

ㄴ. 시즌과 계절

.. 짝짓기 시즌이기 때문인데, 이 계절의 수다람쥐에게는 암다람쥐 외에는 뵈는 게 없다 ..  <송명규-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 160쪽

"암다람쥐 외(外)에는"은 "암다람쥐 말고는"이나 "암다람쥐 빼고는"이나 "암다람쥐 아니고는"으로 다듬고, "뵈는 게 없다"는 "뵈지 않는다"나 "쳐다보지 않는다"로 다듬어 줍니다.

 ┌ 시즌(season) : 어떤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기. 또는 어떤 활동을 하기
 │   에 적절한 시기. '계절', '철'로 순화
 │   - 졸업 시즌 / 취업 시즌 / 프로 야구 시즌
 ├ 계절(季節) :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자연 현상에 따라서 일 년을 구분한 것
 │   - 가을은 독서의 계절 / 계절이 바뀌다 / 계절을 타지 않는 사업을 구상 /
 │     계절에 관계없이 1년에 이모작을 할 수 있다
 │
 ├ 짝짓기 시즌이기 때문인데, 이 계절의 수다람쥐에게는
 │→ 짝짓기 철이기 때문인데, 이 철에 수다람쥐한테는
 │→ 짝짓기 철이기 때문인데, 이때에 수다람쥐한테는
 │→ 짝짓기 철이기 때문인데, 이무렵 수다람쥐한테는
 └ …

국어사전에서 토박이말 '철'을 찾아봅니다. "(1) = 계절, (2) 한 해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기에 좋은 시기나 때, (3) = 제철"로 풀이합니다. '제철'은 "알맞은 시절"로 풀이합니다.

우리 말은 '봄철'이고 '여름철'입니다. 한자말은 '춘절(春節)'이고 '하절(夏節)'입니다. 우리 말은 '봄꽃'이고 한자말은 '춘화(春花)'입니다. 우리 말은 '철바람'이고 한자말은 '계절풍(季節風)'입니다.

뜻이 꼭 같은 말인데, 이 나라에는 토박이말 하나와 한자말 하나가 나란히 있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이런 판에 영어까지 치고 들어옵니다. 이리하여, '철'이란 낱말 하나를 놓고 본다면, 한국사람이라면 '철' 한 마디이면 넉넉하지만, 한자말 '季節'에다가 영어 'season'을 골고루 씁니다. 아니, '철'이라 말할 줄을 모르거나 잊습니다. 으레 '季節'이라 하며, 나날이 '계절'이 영어에 밀리며 'season' 씀씀이가 늘어납니다.

사람들이 영어를 하도 자주 아무 데나 써서 그렇지, 사람들이 영어를 모르거나 안 쓰던 때에는 아주 마땅히 토박이말로 동네 이웃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늘고 신문과 방송과 책이 두루 퍼지면서 사람들 말씀씀이가 차츰 달라집니다. 앞으로는 오늘날보다 영어 쓰임새가 훨씬 늘 테고, 이대로 가노라면 '철'과 같은 토박이말은 어느새 죽어 버릴 수 있겠지요.

안 쓰다 보면 잊히기 마련이고, 잊히다 보면 그예 사라집니다. 국어사전에는 자취를 남기겠으나 사람들 입과 손에서는 멀어져 있다면 죽은 낱말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안 올랐으나 사람들이 자주 쓴다면 중국사람 말이든 일본사람 말이든 미국사람 말이든 마치 우리 말처럼 자리를 잡고 맙니다.

 ┌ 졸업 시즌 → 졸업 철
 ├ 취업 시즌 → 취업 철
 └ 프로 야구 시즌 → 프로 야구 철

아직까지는 "졸업 철"이나 "취업 철"이나 "프로 야구 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2020년까지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는 잘 모르겠습니다. 2030년이 되면 한겨레 말삶이 어떻게 뒤바뀔는지 영 모를 노릇입니다. 2050년이나 2100년쯤에는 이 나라 말과 글이 어떤 모습이 될까요.

 ┌ 가을은 독서의 계절 → 가을은 책을 읽는 철 / 가을은 책읽기 철
 ├ 계절이 바뀌다 → 철이 바뀌다
 ├ 계절에 관계없이 1년에 이모작을 할 수 있다
 │→ 철에 아랑곳 않고 한 해에 두 번 심어 거둘 수 있다
 └ 계절을 타지 않는 사업을 구상 → 철을 타지 않는 사업을 생각

둘레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네 철"이라 말할 때에 몹시 낯설어 합니다. "사 계절"이라 하면 금세 알아듣습니다. "철 따라 날씨가 달라요"하고 말하면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둘레 사람들이나, "계절 별로 기상이 변화해요"하고 말할 때에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지 않습니다.

알파벳으로 이름을 삼아 오던 'NAVER'나 '다음' 같은 누리마당에서는 몇 해 앞서부터 한글날을 맞이하면 하루나 이틀쯤 한글로 '네이버'나 '다음'으로 이름을 고쳐 놓곤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한글날 앞뒤로 며칠일 뿐입니다. 여는 날에는 늘 알파벳을 대놓고 씁니다. 여느 날에는 언제나 알파벳을 대놓고 쓰는데 우리 말과 글이 발돋움할 수 없습니다. 발돋움할 길이 꽁꽁 막혀 있는걸요.

어쩌면 2100년쯤 될 때에는 한글날조차 사라질 수 있습니다. 2100년이 아닌 2050년만 되어도 한글날을 떠올리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을는지 모릅니다. 한글날은 남아 있어도 한글과 우리 말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며 아낄 줄 아는 사람이란 모조리 자취를 감출는지 몰라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와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겹말, #중복표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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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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