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12월 중순인데 벌써 영하 10도를 넘는 강추위가 휘몰아치고 있다. 작년 겨울의 폭설과 한파가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한데 벌써부터 몰아치는 겨울 동장군이 두렵기만 하다. 그런데 이렇게 겨울 날씨가 추우면 추울수록 이상하게 떠나고 싶은 곳이 있다. 바로 겨울바다, 특히 동해바다다. 독한 스킨 로션을 그대로 얼굴에 뿌린 듯이 강렬하고 알싸한 바다 바람이 맞아주는 곳.
한겨울의 바다를 굳이 찾아 떠나 마침내 겨울바다를 마주하면 생각보다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온난화가 심한 도시에서도 덜덜 떨게 하는 겨울이 왜 동해 바다에 가면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질까? 그건 아마도 깊고 짙은 푸른빛의 바다에서 들려오는 청명한 파도소리 때문이 아닐까. 겨울이면 더욱 푸르러지는 동해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에는 바다색을 닮은 짙푸른 색깔이 느껴질 정도다.
겨울 동해 바다가 춥기보다는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또다른 것으로 등대가 있다. 동해 외에도 서해나 남해 등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문지기처럼 서있는 등대지만, 동해 바닷가에서 마주친 이 등대는 여러모로 다른 등대들과는 다르게 기억된다. 동해바다행 기차를 타고 묵호역에서 내리면 만날 수 있는 묵호등대가 바로 그런 곳이다.
동해바다행 새벽기차타고 만난 등대 묵호 등대를 내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 것은 올해 초 겨울 강원도 바닷가를 자전거 타고 여행할 때였다. 서울 청량리에서 동해바다행 마지막 야간 기차를 타고 밤새 달린 후, 새벽녘 묵호역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해안가를 라이딩하려는 중이었다.
그때 머리 위로 어떤 불빛이 번쩍하며 휙 지나가는데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방금 그 불빛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혹시 나도 UFO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호기심 어린 마음에 자전거에서 내려 바닷가의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알고보니 그것은 묵호항 뒤 언덕위에 있는 묵호 등대에서 드넓은 동해 바다를 향해 비추는 불빛이었다.
서서히 새벽의 여명이 스며드는 어스름한 바다에 등대의 불빛이 거리도 가늠이 안 되는 저 멀리 망망대해까지 뻗어있는 걸 보니 도무지 현실같지가 않았다. 추운 겨울 새벽녘 홀로 불을 밝히는 묵호 등대의 모습이 고독해 보이기도 하고 왠지 감동이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이 등대를 내 마음속의 등대로 삼아야 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묵호등대가 서있는 이곳 묵호동 언덕은 동해시에서 가장 먼저 해 뜨는 곳이라고 한다. 어쩐지 사위가 밝아오면서 바다위로 해가 떠오르는 오렌지 빛 일출 장면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렬하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잊기 힘들 정도였다.
등대 주변의 정겨운 바닷가 언덕동네와 풋풋한 바다내음이 나는 묵호항, 깊고 푸른 바다에서 나오는 새파란 파도소리, 해안가를 따라 난 철길은 묵호 등대를 더욱 잊지 못하게 하는 소금같은 존재다. 특히 새벽 6시경 아침이 밝아오면서 길라잡이 등대 불빛을 따라 묵호항에 들어오는 작은 어선들과 뱃사람들의 분주한 항구 정경은 놓치면 후회한다.
등대라는 말은 어부님들을 위해 홀로 컴컴한 밤바다를 비춰주는 일 때문인지 한해를 마감하는 이맘때쯤 나를 성찰하는데도 참 좋은 도구로 쓰인다. " 올 한해 내게 등대가 되어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의 등대 같은 존재가 되었을까?"
47년간 늘 그 자리에서 밤새 먼 항해를 떠난 배들이 돌아와야 할 좌표를 알려주고 길라잡이가 되어주고 있는 묵호등대. "당신에게도 등대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며 자랑하고픈 내 마음속의 등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