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영하 7도, 강릉은 영하 2도. 지난 1월 7일의 기온이다. 강원도의 겨울은 매서운 북풍한설만 몰아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울보다 따뜻하다. 물론 강릉 평지의 기온이 그렇고, 대관령으로 올라가면 기온이 뚝 떨어지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친다.
그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오전 7시 반에 출발하는 강릉행 고속버스를 탔다. 2010년 6월 강릉에 다녀온 뒤 6개월 만에 다시 강릉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소설가 이순원씨를 만나고, 바우길 12코스 '주문진 가는 길'을 걸을 작정이었다. 이순원씨는 며칠 전에 강릉에 내려가 주말까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내린 눈 때문에 고속버스는 10시 반이 조금 넘어서 강릉에 도착했다. 3시간이 넘게 걸린 셈이다. 평소에는 서울에서 강릉까지 2시간 40분가량 걸린다. 이순원씨는 바우길 게스트하우스에 있다면서 버스 편을 알려주었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택시를 탔다. 이런, 택시기사가 바우길 게스트하우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단다.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를 일컫는 말이다. 바우길은 강원도 사람을 '감자바우'라고 이르는 데서 착안한 명칭이기도 하다.) 게스트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는 대굴령 자동차마을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이럴 때는 길을 잘 아는 사람과 통화를 하는 게 직방이다. 이순원씨에게 전화를 걸어 택시기사를 바꿔주었다.
원목으로 잘 지은 집들이 여러 채 들어서 있는 대굴령 마을 입구에서 택시는 섰다. 바우길게스트하우스 표지판이 선명하게 보인다. 게스트하우스가 생긴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시설이 좋아 깜짝 놀랐다. 언제 이렇게 좋은 집을 게스트하우스 용도로 지은 걸까? 건축비는 어디서 어떻게 조달했을까? 궁금할 수밖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이순원씨를 만나니 의문이 대번에 풀렸다. 바우길 운영진에서 그렇게 좋은 집을 지을 능력은 당연히 없었다. 대굴령 마을 영농조합에서 지은 펜션이 비어 있었는데 그것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낸 것이었다. 물론 이름은 게스트하우스지만 숙박비를 받는 건 아니다. 후원금을 받고 바우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숙소로 제공한다.
강릉 사람 이순원, 길을 만들다 2010년 5월부터 6월까지 6주 동안 매주 강릉행 고속버스를 탔다. 이유는 단 하나. 바우길을 걸으려고. 그런데도 바우길 11개 구간을 다 걷지 못했다. 2개의 구간을 남겨둔 상황에서 긴 여행을 떠났고, 다른 일에 쫓겨 강릉에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늘 걷지 못한 길은 숙제처럼 마음에 남아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우길이 2개의 구간이 더 늘어나고 그것도 모자라 야영을 하면서 3박4일은 족히 걸어야하는 '에코 울트라 바우길'까지 조만간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거기에 보태서 대관령 바우길 3개 구간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니, 걸어야 할 길이 이렇게나 많이 생겼다는 말이야? 짜증이 났느냐고? 그건 아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걸을 수 있는 길이 많다는 건, 걸어야 할 길이 많아진다는 건 걷는 사람 입장에서는 즐겁고 행복한 소식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래서 다시 강릉행 버스에 몸을 싣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새로 생긴 길을 '바우길 카페'사람들과 걷고 이순원씨를 만나 바우길을 만들게 된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리라, 작정했다.
<은비령>의 작가로 유명한 소설가 이순원씨는 강릉 사람이다. 강릉에서 태어나 강릉에서 자라 강릉이야기를 쓰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런 그가 강릉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런 기회가 온 것은 2009년 여름.
그에게 제주 올레 못지않게 좋은 길이 많은 강원도 강릉에 길을 만들자고 먼저 제안을 한 사람은 강릉 시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안만 그럴싸했을 뿐, 이순원씨가 막상 길을 만들고자 했을 때, 강릉시나 강릉시장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부분과 관련해 이순원씨는 강릉시장과 강릉시에 상당히 섭섭해 하고 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덕분에 이순원씨는 개인적인 열정으로 '관'의 간섭을 철저하게 배제한 상황에서 가장 자연친화적인 '바우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길을 전혀 모르는 그가 혼자 길을 찾아 나선 건 아니었다. 그는 '바우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등산화를 처음 신었을 정도로 길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길은 길 전문가가 찾아야 한다, 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과 홍보를 맡고, 길은 대학시절부터 등산에 '미쳐' 있었던 베테랑 길 전문가 이기호 국장이 찾아내기로 했다.
이순원씨는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동네의 길도 잘 모른다고 고백했지만 이기호 국장은 달랐다.
"이 국장님은 길을 너무 잘 아세요. 이 양반은 도굴꾼이 산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디를 어떻게 파야하는지를 잘 아는 것처럼 어디로 길이 났는지를 감을 잡더라구요. 진짜 이런 게 길 전문가구나, 굉장히 놀랐어요."
그래서 그는 이기호 국장을 고산자 김정호 같다고 늘 말한다. 이 국장 덕분에 바우길이 아기자기하게 걷는 길이 될 수 있었고, 길의 진정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국장 역시 이순원씨와 마찬가지로 강릉 사람이다.
바우길을 이순원씨와 이기호 국장이 만들었다지만 그들이 없는 길을 새롭게 만든 것은 아니다. 예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찾아내서 다듬고 이어서 '바우길'이라는 명품 길을 포장해낸 것이다. 간단하고 쉬운 일 같지만, 길을 찾아내고 잇는 일은 그만큼 품이 많이 든다. 걷고 또 걷고 또 걸어야 한다.
이순원씨는 이기호 국장과 결합해 8월부터 9월까지 '바우길' 11코스를 만들어냈고, 그것을 세상에 알렸다. 2009년의 일이다. 제주 올레의 성공 이후, 사람들은 걷기 열풍에 휩쓸려 있었고 '바우길'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걸어본 사람은 안다, 그 길이 얼마나 걷기 좋은 길인지. 많은 사람들이 홀로 혹은 삼삼오오 혹은 대절버스를 타고 바우길을 걸으려고 강릉을 찾아 왔다.
등산로로 알려졌던 선자령은 이제 '선자령 풍차길'로 더 유명해졌다.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걸었다는 대관령 옛길 역시 바우길로 더 사람들 기억에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이순원씨는 강릉시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민간주도로 바우길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덕분에 자연을 전혀 훼손하는 환경 친화적인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 충분히 공감한다.
자치단체에서 조성하는 많은 길들은 자연을 보존하는 방법이 아니라 인공구조물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데크를 깔고 길을 포장하면서. 걷는 입장에서 그런 길은 전혀 반갑지 않다. 흙을 밟으면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숲길이나 강길, 오솔길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길이라면 폭이 넓을 필요도 없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라도 충분하다.
그런데 관 주도로 길을 만드는 사람들은 걷는 사람들의 그러한 소박한 바람을 모른 채 그저 겉보기에 그럴싸하고 화려하기만 하면 길을 잘 만들었다고 여긴다. 그건 아마도 직접 걸어보지 않고 생각만으로 길을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걸어본 사람은 사람들이 어떤 길을 원하는 지 잘 알 수밖에 없다.
소설가가 글 쓰는 일을 내팽개치고 길을 만들다보니 생업에 지장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가가 소설을 안 쓰고 바우길에 매달려 있으니, 경제적인 손실 또한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길 만드는 아들보다 소설 쓰는 아들이 좋다?
고향은 강릉이지만 이순원씨는 일산에 산다. 그런 그가 매주 토요일마다 바우길을 걸으려고 강릉에 간다. 그런 그를 가족이 마땅해 할 리 없다.
"처음에는 한 3개월 바짝 서둘러서 길을 만들면 끝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지금까지 발을 못 빼고 있는 중이지요. 집에 가서는 바우길 이야기를 못합니다. 지금도 그만두라고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나는 길 만드는 아들보다 글 쓰는 아들이 좋다'고 말씀하세요. 아내도 '나는 길을 만들어서 그 길이 남는 남편보다 <은비령> 같은 길을 작품 안에서 만들어내는 남편이 좋다, 당신이 문학으로 승부하는 것이 좋다'고 해요."그럼에도 그가 바우길을 놓지 않고 매주 강릉을 찾는 건 길을 지키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손을 놔버리면 바우길에 데크가 깔리거나 인공구조물이 설치되어 자연이 훼손될 수 있어 길이 갖고 있는 진정성과 도덕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염려한다. 그는 바우길이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기대한다.
강릉시장의 제안으로 바우길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고, 2009년 처음 등산화를 신었을 정도로 길과 무관한 삶을 살았던 이순원씨지만, 길과 그의 인연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가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을 쓴 게 15년 전이에요. 그 때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그 때 대관령 꼭대기부터 지금 2구간(대관령 옛길) 길을 걸었거든요. 2011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그 구간을 걷는 이야기가 실려요."
그는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면서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소설을 썼고, 그 작품은 수십만 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좋은 평을 받았다. 그 소설의 일부가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열린 바우길 가운데서 2구간인 대관령 옛길을 가장 좋아하고 애착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 길을 혼자 걷지 말고 가족과 손을 잡고 걸으라고 권한다. 길을 함께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보면 오르막이나 내리막에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잡게 되기도 하니 가족 간의 친화력을 높일 수 있는 계기도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바우길을 만들면서 그가 가장 대견해하는 일이 있다. 대관령 동쪽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살다가 순교한 심스테파노가 살던 마을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마을을 지나가는 바우길 10구간은 그를 기리기 위해 '심스테파노 길'로 이름을 붙였다.
"심스테파노 길을 찾아낸 것은 지금도 뿌듯해요. 가을 작년, 강릉의 임당동 성당에 빌리오 신부님과 같이 성당에 가서 설명도 하고 아침미사도 드리고, 성당 신자들과 걸었어요. 여든 일곱 되신 분이 같이 걸었어요. 심스테파노 걸어보셔서 아시잖아요, 얼마나 가파른지. 그 분을 보니 순례길이라는 의미가 그대로 다가오더라구요. 처음에 그 길을 만들었을 때는 길이 흔적이 없어서 찾아내기 힘들었는데, 작년 가을에 걸을 때는 그 길로 사람들이 하도 많이 다녀서 길이 났더라구요. 사람 발자국이 이렇게 무섭구나, 싶었습니다."이순원씨 덕분에 심스테파노는 바우길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는 심스테파노의 이름만 바우길에 새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도 바우길 위에 아주 깊게 각인시켰다. 바우길을 이야기하면서 이순원을 절대로 빼놓을 수 없게 되었으니 바우길이 존재하는 한 그의 이름 또한 영원히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대관령 길, 지금 구(舊) 도로로 99개의 구불구불한 자동차도로 있지 않습니까? 그걸 중종 때 고형산이라는 강원도 관찰사가 사비로 닦았어요. 그 전에는 등짐을 지고 다니던 옛길을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닦은 거예요. 사람들만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물자들이 넘나들게 닦았는데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125년 뒤에 부관참시를 당했어요, 병자호란 때."당시 청군의 일부 병력이 대관령을 넘어서 서울로 진격을 했는데, 고형산이 길을 닦아서 적을 이롭게 했다고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그는 다시 복권이 되었다. 대관령 길을 이야기하면 고형산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이순원씨는 설명했다. 그리고 말했다.
"길에는 길의 운명이 있고, 길을 닦는 사람의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바우길에는 어떤 운명이 숨겨져 있고, 이순원씨는 그 길과 어떤 운명으로 이어지게 될까, 궁금해졌다. 그것을 지금은 알 수 없을 터.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평가할 몫이겠다.
이순원씨는 바우길과 관련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처음에 책을 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바우길'을 홍보할 목적이었으나, 바우길이 기대보다 빠르게 자리를 잡고, 한국의 3대 트레일로 선정될 정도로 주목을 받게 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바우길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진 것이다.
이순원씨는 지금까지 소설집만 발표했지 산문집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소설가가 소설로 승부를 해야지 산문집은 필요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그런 그가 바우길 관련 산문집을 낼 결심을 한 것은 한 작가가 길에 대해 갖는 인생의 의미와 철학을 남아내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바우길을 만들면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사실대로 담담히 기록하겠다고 밝혔다.
바우길을 걸으러 많은 사람들이 강릉을 찾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길을 만든 사람 입장에서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 같아 물었다.
그의 당부는 단순했다. 사람들은 길을 정복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바우길 전 코스를 빨리 걸어서 해치워버리려고 하는데, 속도가 자랑이 아니니 천천히 여유롭게 느림을 즐기면서 걷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길을 빨리 걷겠다는 생각으로 직선으로 가로 질러서 걸으려 하지 말고 만들어진 대로 지그재그로 걸으면서 벌판도 바라보고, 들녘의 풍경도 즐겼으면 한단다.
그는 올해도 변함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바우길을 걸을 생각이다. 그래야 길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우길을 그와 함께 걸으면서 바우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매주 토요일, 강릉으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