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핸들을 잡은 손이 얼어붙는다. 손이 시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다. 몇 분 달리지 못해 길 위에 멈춰 서서는 자꾸 언 손을 주무른다. 이러다 동상이라도 걸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추운 날은 처음이다. 이날 춘천의 기온이 -18℃까지 내려갔다가 한낮에는 -4℃까지 올라갈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이런 날씨에 자전거를 끌고 강촌까지 갈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대책이 없는 놈이다. 순전히 그놈의 햇살 때문이다. 이날 아침 창밖으로 눈부시게 맑은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잠시, 일기예보 방송 중에 기상캐스터가 강원도 일부 지역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고 하던 말을 잊었다.
날이 아무리 춥다고 해도 이렇게 맑은 햇살이면 길에서 얼어 죽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그 햇살이 일기예보와 상관없이 무척 따뜻해 보였다. 그리고 실제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그렇게 춥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너무 맑아서 따뜻해 보이기까지 하는 햇살에 속아서 최저 기온이 -18℃까지 내려간 날, 강촌으로 자전거여행을 떠났다.
전철 타고 떠나는 강촌 자전거여행
지난 10일(월), 경춘선 복선전철에 몸을 실었다. 경춘선은 지난해 12월 21일 개통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거의 매일, 춘천으로 여행을 떠나는 승객들로 붐비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엄두도 못 내고, 겨우 평일을 택했는데도 여전히 사람이 많다. 예상 밖이다.
-10℃ 아래로 내려간 날씨가 무색하게 많은 인파다. 경춘선은 상봉역에서 출발한다. 이 역은 용문행 전철 노선인 중앙선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해서 역내가 상당히 번잡하다. 마침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과 맞물려 더욱 더 혼잡해 보인다. 통로로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자연히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자전거를 밀고 지나가는데 통행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이때 '접이식 미니벨로'를 가져갔다면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차하면 바로 자전거를 접어서 옮겨도 되고, 설사 자전거를 밀고 지나간다고 해도 사람들과 부딪칠 일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 승객들 중에는 오히려 미니벨로의 앙증맞은 사이즈에 반해 이것저것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덧붙이는 말인데, 경춘선을 타고 자전거여행을 떠날 때는 가능하면 접이식 미니벨로를 가져갈 것을 권한다. 경춘선은 자전거 이용자들을 위해 열차 양쪽 끝 칸에 자전거 거치대를 마련해 놓고 있다. 하지만 아무 때, 아무 자전거나 다 탑승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접이식 자전거가 아닌 경우에는 '일요일'과 '공휴일'에만 탑승이 가능하다.
여행은 굴봉산역에서 시작한다. 굴봉산역은 강촌역에서 두 정거장 못 미친 지점에 있다. 굴봉산역 다음이 백양리역이고, 그 다음이 강촌역이다. 자전거여행은 굴봉산역에서 시작해, 경춘선 복선전철 개통 이후 더 이상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기차역인 '경강역'과 '옛날 강촌역'을 지나 '구곡폭포관광지' 안에서 끝난다.
코스가 매우 짧다. 자전거를 타고 그냥 내처 달리기만 할 때는 1시간 안에도 여행을 끝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빨리 여행을 끝내기가 쉽지 않다. 중간 중간 아기자기한 멋을 간직한 곳이 많아 그냥 지나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단거리 여행으로 이보다 더 좋은 코스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추워서 멀리 갈 수도 없고, 너무 오래 자전거를 탈 수도 없겠다 싶을 때 다녀오기 좋다. 그런데 이날은 날이 추워도 너무 추웠다.
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경강역'굴봉산역에서 내려 찬바람을 맞으며 경강역을 찾아가는데 먼저 코끝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서울하고는 사뭇 다르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짱짱하게 들러붙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아직은 견딜 만하다. 굴봉산역에서 경강역까지는 약 2km다. 역사 안 승강장에서 내려다보면 눈으로 하얗게 덮인 들판 위로 한 줄기 검은 아스팔트길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서 죽 내려가면 경강역이다. 2차선 도로 옆에 붉은색 벽돌로 지어올린 자그마한 역사가 보이다. 폐역이 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아직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드나들던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다.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 역시 역사를 운영하던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열차시간표는 물론이고, 사무실 집기들 또한 역무원들이 사용하던 그대로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먼지만 살포시 내려앉고 있다.
기차는 다니지 않지만, 기차역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은 모양이다. 역사 주변으로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경강역은 영화 <편지>와 드라마 <천국의 계단>을 촬영한 장소로 유명하다. 촬영 장소로 쓰였던 흔적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대합실로 들어서는 문이 철사로 단단히 묶여 있는 것 말고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경강역 철로 위에 서 있는데, 그 위로 금방이라도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들어올 것 같은 기분이다. '경강역'이란 이름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 부근에 지어졌다고 해서 붙여졌다. 건물은 1939년에 지어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낙서로 남은 옛날 영화, 강촌역
'옛날 강촌역'으로 가기 위해 북한강 둔치를 지나가는 강변도로로 들어선다. 이 길은 갓길이 없는 2차선 도로이기는 하지만,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차들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생각처럼 위험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 도로 위를 달리면서 서서히 몸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유독 손이 시려 자전거 핸들을 쥐고 있기가 힘들다.
도로의 상당 부분이 그늘이다. 굴봉산과 검봉산 아래를 지나가는 길이라 산그늘이 짙다. 그늘이 깔린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싶은데, 그 차이가 천양지차다. 그늘 아래를 달리는 동안에 온몸이 얼어붙는다. 몹시 고통스럽다.
비니와 마스크를 쓰고도, 미간 같이 한기를 막을 수 없는 곳이 무언가 둔탁한 물건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 할 수 없이 중간 중간 햇볕이 비치는 곳에 멈춰 서서 언 몸을 녹인다. 중간에 백양리역을 지난다. 생각 같아선 그곳에서 다시 전철에 올라타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백양리역을 지나 옛날 강촌역까지 다시 얼음장 같은 산 아랫길을 달린다. 옛날 강촌역 역시 달라진 게 별로 없다. 기차만 다니지 않을 뿐 기차가 다니던 때의 풍경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철로 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가득 뒤덮고 있는 낙서와 역 건물 여기저기에 그려진 그라피티 역시 아직은 선명한 빛을 띠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어디에선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넓은 역사에 아무도 없다. 어두운 산그늘 아래 터널처럼 지붕을 얹은 철로 위로 살을 에는 듯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친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경강역과 달리 옛날 강촌역은 어둡고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과거의 영화가 컸던 만큼, 그 영화를 잃고 난 뒤의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더 애잔하게 만든다.
이곳은 지금 역을 찾아오는 사람보다, 승강장 밑 절벽에 붙어 있는 카페를 찾아오는 사람이 더 많다. 강촌역 역시 경강역과 마찬가지로 1939년에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강촌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면서, 여러 차례 역을 개보수하는 과정을 거쳤다.
영하의 날씨, 제철 만난 빙벽 타기
옛날 강촌역에서 구곡폭포관광지 입구까지는 자전거도로를 타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자전거도로가 있는 곳까지 내려갔다가, 그 위에 눈이 덮여 있는 걸 보고 나서 다시 도로 위로 올라온다. 구곡폭포관광지 입구까지 약 4km. 이곳의 도로 역시 차들이 그다지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다. 날이 추운 탓이다.
구곡폭포관광지 입구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구곡폭포까지는 걸어서 오른다. 구곡폭포 가는 길로 꽤 많은 등산객들이 오르내린다. 검봉산이나 봉화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가거나, 산골마을인 문배마을에 들렀다 내려가는 사람들이다. 산과 산 사이 계곡을 따라 걷는 산길이 매우 아름답다.
산길에 눈이 살짝 덮여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미끄럽지는 않다. 그리고 구곡폭포까지는 길이 넓고 경사가 심하지 않아 평지를 걷는 것만큼이나 편안하다. 길 위로 바람이 거의 불지 않고,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로 햇살이 풍부하게 쏟아져 내려와 꽤 포근한 느낌이다. 아늑한 느낌마저 든다. 북한강 가를 달려오는 동안 꽁꽁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길 끝에 구곡폭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90˚로 곧추선 암벽에 폭포수가 얼어붙어 거대한 빙벽을 이루고 있다. 그 빙벽에 달라붙어 네 발로 절벽 위를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아찔한 풍경이다. 보는 사람이 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구곡폭포는 우리나라에서 빙벽을 타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장소 중에 하나다. 지난 4일 이곳에서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매년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 그런데도 사고가 일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이날 다시 이 빙벽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날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나같이 매사 엄벙덤벙 덤벼들기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고서, 누가 이 추운 날 강변길을 따라 폭포수까지 찾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 이런 날 바깥나들이를 생각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서, -10℃ 아래로 곤두박질친 날씨 같은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날이 춥다고 마냥 움츠러들 게 아니다.
돌아올 때는 경춘선 전철역인 강촌역을 이용했다. 구곡폭포에서 강촌역까지는 약 3km다. 강촌역은 복선전철로 바뀌면서, 역 위치도 강촌리에서 방곡리로 옮겼다. 그러면서 예전 기차역과는 달리 운치 같은 걸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하지만 전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예전에 기차여행을 할 때와 다를 것 없이 정겨운 풍경이다. 눈에 덮인 산천이 액자에 담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간다. 날은 추웠지만 풍경만큼은 더 없이 따뜻한 여행이었다.
다 좋은데, 경춘선은 터널이 너무 많은 게 흠이다. 거리를 약 86km 가량, 시간은 40여 분 단축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