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특정인을 참배 혹은 추모하는 행위는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안보위기에는 현충원을 참배하고, 민주주의 위기에는 광주 5·18 묘역을 참배하면서 선열들의 뜻을 이어가겠노라고 공개적으로 다짐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행동양식이다.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24주기인 14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은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던 서울 갈월동 박종철 기념관을 찾아 고인의 넋을 기렸다.
한나라당 대표의 박종철 열사 추모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추모 일정은 갑작스럽게 마련됐고, '안 대표가 직접 챙긴 일정'이라는 것이 대표실 관계자의 설명이다.
뜬금없고, 돌발적인 일이긴 하지만, 안 대표는 열사가 숨을 거둔 장소에 가서 추모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당시 서울지검 형사부 당직검사였던 안 대표는 공안부장 최환 검사의 '부검하고 증거를 확보하라'는 지휘를 받은 정황은 있지만, 정권과 경찰의 온갖 방해를 뿌리치고 부검을 통해 고문치사의 증거를 확보해 낸 최일선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 대표는 이날 박종철 열사의 영정이 모셔진 9호 조사실에서 10여 분 동안 당시의 고문과 부검 상황을 세세하게 회고했다. 안 대표는 자신이 쓴 책 <안 검사의 일기>를 "6월 항쟁에 대해서는 가장 정확하게 기술한 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안 대표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서는 '이미지 쇄신용'이라는 해석이 있다. '보온병 포탄' '룸살롱 자연산' 등 자신이 초래한 '설화'로 실추된 이미지를 24년 전에 자신이 민주화에 공헌한 일을 다시 꺼내 만회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박종철 정신 계승' 강조... '청와대 압박에 굴하지 않겠다'?
그러나 정치인의 추모행위가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감안하면, 안 대표의 '박종철 열사 추모'는 보다 깊은 뜻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날 안 대표가 거듭 '박종철 정신 계승'을 강조한 것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안 대표는 이날 기념관 방명록에 "우리나라에 민주화를 가져오고 본인은 산화한 박종철 열사의 숭고한 뜻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자라나는 많은 후배들이 배우고 기념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썼다.
안 대표는 취재진들에게도 "오늘날 우리가 정말 완전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것도 박종철 열사 같은 수많은 희생과 이 분들의 피의 대가, 목숨의 대가라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 감사 이런 것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야겠다"고 말했다.
최근 안 대표는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를 낙마 시킨 일로 청와대와 불화를 겪고 있다. 26일로 예정됐던 이 대통령과의 만찬도 뒤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고,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청와대 참모진들의 좋지 않은 감정이 안 대표에게 집중되고 있다. 언론은 4월 재보선 이후 조기 전당대회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시련이 닥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일정을 변경해 목숨을 바쳐 민주화에 헌신한 박종철 열사를 추모했다는 점에서, 이후 상황에 대한 안 대표의 각오를 읽을 수 있다. 안 대표가 '압박에 굴하지 않는' 민주열사의 정신을 자신의 상황에 대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안 대표의 열사 추모는 '앞으로도 당·청 관계 정상화를 위한 행보를 멈추지 않겠다' 혹은 '내 한 몸 희생해 대의를 이루겠다'는 의지로도 해석된다. 청와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민심을 우선한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를 박종철 열사 추모로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열사 정신 어긋날 땐 더 큰 비난 자초할 것그러나 한 인물에 대한 추모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부담되는 일이기도 하다. '박종철 열사 뜻 계승'을 강조한 안 대표가 열사의 뜻과 어긋나는 행보를 보일 때는 '더 이상 열사를 들먹이지 마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당·청 관계 정상화'는 안 대표의 전당대회 공약이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011년에 들어서자마자 '인사반란'을 일으켜 '당·청관계 정상화' '민심의 국정반영'의 깃발을 든 안 대표가 열사의 뜻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