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마다 그런 곳이 하나쯤은 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곳, 시골 동네 어귀의 정자처럼 누구나 오며가며 들러 쉴 수 있는 곳. 빠르게 변하는 세월 속에서도 굳건히 뿌리내리며 사람들의 입에서 입에서 전해내려오는 곳. 지역마다 그런 곳이 하나쯤은 있었다.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했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기도 했다.
전주에는 민중서관이라는 서점이 그렇다. 경원동 시내 사거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민중서관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었다. 문화공간이자 만남의 장소였다. 지금처럼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누군가와 약속을 할 때는 무조건 '민중서관 앞'이었다. 시간이 허락되면 서점 안에 들어가 책을 보았다. 민중서관 안은 책을 보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서점 앞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민중서관은 그런 곳이었다.
민중서관의 본점이 문을 닫는다. 1970년대 개업했으니 40년만이다. 그것은 단순히 서점폐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전주시민에게는 그렇다.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린 3월의 첫날, 민중서관의 대표 강준호(53) 사장을 만났다. 강사장은 3층 창고에서 서적반품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곳은 서점, 그 '이상'이었다
강 사장은 그동안 인터뷰를 고사했다고 했다. 폐업 공고문이 나간 뒤, 여러 언론에서 이를 다루기 시작했고 취재요청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무 말 않는 것도 그동안 사랑해준 많은 고객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싶어서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창고에 들어서자 해묵은 책냄새가 풍겼다. 궂은 날씨 영향도 있을 것이다. 요즘 대형서점에서는 맡을 수 없는 오래된 책 특유의 고지식한 냄새가 풍겼다. 난로에 앉아 강 사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강 사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많은 격려를 해줍니다. 폐업공고문이 나간 뒤, 일부러 들러서 책을 사간 고객도 있죠. 하지만 단순히 '망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셔서 좀 씁쓸합니다. 망했다라기보다는 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몸집정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민중서관은 현재 본점인 경원동 매장은 문을 닫지만 서신동과 평화동에 있는 지점은 현상태로 운영된다. 그나마 위로가 된다.
강 사장과 민중서관과의 인연이 궁금했다. 민중서관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 사장은 전주가 고향이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 있는 한 기업체에서 근무하던 그는 언젠가 전주로 내려올 생각을 하고있었다. 마침, 평소 인연이 있던 민중서관의 사장님으로부터 민중서관의 인수 제의를 받게 되었다. 당시만해도 전주에서 민중서관의 위치는 프리미엄을 얹어서라도 인수할 만큼 '잘나가는' 서점이었다. 강 사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가 1992년도였다.
"민중서관 사장이기 이전에 저도 민중서관의 단골고객이었습니다. 책을 사기도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그냥 하릴없이 책구경을 하기도 했죠. 서점에서 한 번도 일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왠지 서점이라는 말에 하고싶다는 생각을 했죠. 아마 음식점 인수를 제의했더라면 안 했을 겁니다.(웃음)"민중서관과 강 사장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강 사장은 출근 첫날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35살의 젊은 사장이 큰 서점을 인수했다고 하니, 직원들은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가장 말단 직원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이 모두 '출근거부'를 했다. 출판사들도 이 젊은 사장이 얼마나 버틸지 두고보자는 심산에서인지 거래에 뜸을 들였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등짐지고 책을 나르는 모습을 보인 지 3개월. 강 사장의 성실한 태도는 직원들과 출판사 사장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서점 사장, 폼나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이렇듯 서점의 사장이란 결코 폼나는 직업이 아니었다. 노가다에 비견될 만큼 고되고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서점은 호황기였다. 서점을 찾는 많은 고객들이 있었기에 그정도의 수고는 오히려 달기만 했다.
당시 1층이었던 서점을 2층까지 확장하여 매장을 넓혔고 3층은 서적창고로 사용했다. 여러 극장이나 공연장의 포스터를 붙여 문화공간으로서 기능을 더했다. 지금도 기억한다. 입구에 있던 공중전화와 그 옆에 있던 메모와 쪽지를 붙여놓은 게시판을. 민중서관 글씨가 씌여있는 책 포장지로 책표지를 씌워주기도 했다(아, 정말 그땐 그랬다). 그리고 그곳은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기도 했다. 연락처가 없던 시절, 민중서관 게시판에 붙여있는 쪽지를 읽고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애틋했다.
그러나 2006년, 전주에 기업형 서점이 들어온 후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주의 몇몇 서점은 그 뒤로 차례차례 문을 닫았다. 대형서점 반경 300㎞내의 서점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속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가까운 서점부터 문을 닫았다. 그 때부터 민중서관도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가장 어려운 점은 기업형 서점의 '온라인시스템과 할인제도'였다.
"온라인 판매가격이 일반서점에 비해 터무니없이 싸니 도저히 상대가 안 되더군요. 지금은 좀 덜하지만 처음에는 많게는 50%까지 할인해서 판매하니 누가 일부러 서점에 와서 책을 사겠습니까? 처음부터 지는 게임이었죠. 계란으로 바위치기예요. 요즘 전국적으로 서점폐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동안 5년 정도 버텼는데 서점사정을 알 만한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해요."끝까지 지키고 싶었다5년 동안, 적자운영을 감수하면서도 문을 닫지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지역문화를 지킨다는 자긍심때문이었다. 서점을 운영한다는 긍지 때문이었다. 흑자운영은 고사하고 손해만 보지 않는다면 끝까지 간판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젊은세대는 모두 기업형 서점으로 가고, 민중서관에는 오래된 향수를 그리워하는 몇몇 고객들만 드나들뿐이었다.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그럴때마다 '일반 서점도 똑같이 자생력을 길러라'는 주위의 충고만 돌아올 뿐이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와 시장논리로 돌아가는 데는 속수무책일뿐이었다.
민중서관도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강 사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한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하기위해서는 적지 않은 경비가 든다는 것이다. 알라딘이나 yes24에 버금가는 인터넷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100여 가량의 직원을 고용해야한다.
무엇보다 온라인 시스템의 생명은 신속한 정보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다. 그것은 지역의 한 서점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문제였다. 실제로 대구의 한 서점에서 지역 서점의 온라인 시스템 구축 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홈페이지 구축까지는 성공했지만 접속자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홈페이지에 접속했던 많지 않은 사람들도 결국 구매는 기업형 서점에서 이뤄졌다는 선례가 있었다.
요즘은 영상문화가 발달한때문인지 서점에서 책을 사 보는 층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강사장은 일반 서점의 미래는 어둡다고 말했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변화이기도 하죠. 거기에 따라가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거죠. 지키지 못한 자의 변명이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요. 앞으로 서점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하지만 없어지지는 않겠죠. 서점이 살아남는 방법이 있긴하겠죠. 분명한 건, 지금 이대로는 아니라는 겁니다. 책에 칫솔을 얹어팔든 뭐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해요.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야하는데 그 방법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민중서관 간판을 내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정도 어려웠지만 실제적인 뒷마무리도 방대했다. 재고를 분류 정리해 일일이 출판사로 돌려보내야하는 작업을 현재 두 달째 하고 있다. 출판사로 돌아갈 책들을 보았다. 정말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있었다. 색도 바래고, 베스트 셀러 목록에 끼지못했지만 편집자의 정성과 꿈이 있는 각양각색의 책들이었다. 대기업 서점에서는 보기 힘든 책들이었다. 그러한 책들이 마치 앞으로의 오프라인 서점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기업형 서점이 출판시장을 잠식하게 될 겁니다. 현재 점차 그렇게 되고있구요. 그렇게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출판사가 기업형 서점에 의해 끌려다니게 된다는 거죠. 서점에 책을 대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기업형 서점이 원하는 책들, 팔릴 수 있는 상품가치가 있는 책들만 찍어내게 됩니다. 결국은 돈놓고 돈먹기식이 되죠. 서적의 전문성, 다양성은 사라져버리고 잘 팔리는 책들만 나오게 된다면 그 피해가 결국 누구에게 갈까요? 그즈음 되면 기업형 서점도 더 이상 할인판매를 하지 않을 거라는 건 눈에 보듯 뻔한 일입니다."기업형 서점이 시장에 진출함으로써 일차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아온지역 토종 서점들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출판시장의 획일화, 상업화'라고 강대표는 지적했다. 팔리는 책들만 찍어내다보면 그것을 읽는 독자의 사고 역시 그것에 잠식당한다. 그것은 곧 사고의 획일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피해를 입는 쪽은 소비자다.
토종서점의 폐업,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프라인 서점이 살아남기위해서는 '도서정가제' 밖에 없다고 강 사장은 주장했다. 인정이나 향수에 의지하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 온라인 서적의 할인판매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 강구책이 있지만 단호하고 확고한 도서정가제를 실행하지 않는 이상, 오프라인 서점은 현실적으로는 힘들다는 것.
책은 상품이 아닌 문화로 보기 때문에 도서정가제를 정확히 지키는 외국의 몇몇 나라의 선례를 들었다. 애초부터 도서정가제를 실시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서점들의 폐업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서정가제를 열심히 설명하던 강 사장의 목소리가 마지막에 가서 힘이 빠져 버렸다. '이론상으로는 누구나 다 알고있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실천없는 이론은 공허하다.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냥 한 생명이 죽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사람과 관련된 추억과 생각, 문화, 지난 시간까지 함께 죽는 것이라고 했다. 하물며 지역주민들과 반백년을 함께 살아온 공간이 사라진다. 단순히 '망하는 것'이 아니다. 민중서관의 간판이 내린 그 자리에 이제 무엇이 들어설지는 모른다. 아마도 '시대의 흐름'에 맞는 것이 들어설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를 것인가, 시대의 흐름을 이끌 것인가. 민중서관의 입구에 붙어있는 폐업공고문은 오늘도 지나는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전주 민중서관 경원점은 문을 닫지만 서신점과 평화점은 그대로 유지된다. 포인트 적립금도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