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보리가 오랜 논의 끝에 17일(현지시간, 한국시간 18일 오전) 리비아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 결의안을 채택했다. 15개 안보리 회원국 가운데 10개국이 찬성표를 던졌고 그동안 군사적 개입의 장기 영향을 우려해 노골적으로 반대하던 러시아와 중국, 독일, 그리고 인도, 브라질 등 5개국은 기권했다.
이번 결의안은 프랑스와 영국이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미국이 강력한 지지를 표하면서 성사됐다. 결의안은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카다피 세력의 폭력 진압과 학살로부터 리비아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임을 명시했다. 결의안 통과에 따라 카다피 세력의 진격과 저항 세력의 집결지인 벵가지에 대한 학살은 일단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는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두고 오랜 시간 고심을 해왔다. 비행금지구역 설정의 필요성은 카다피 세력의 무력 진압과 학살이 시작된 2월 말부터 가능한 수단의 하나로 제기돼 왔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무력 개입에 대한 부담 때문에 논의를 본격화하진 않았다. 국제사회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사이 벵가지에서 세력을 결집한 후 수도 트리폴리를 향해 진격하던 저항 세력은 공군력과 중화기를 이용한 카다피 세력의 반격에 맥없이 무너지게 됐다. 저항 세력이 후퇴를 거듭하게 되자 인명 피해에 대한 우려도 커지기 시작했다.
아랍 지역 최강의 공군력과 지상 병력을 갖춘 리비아 정부군과 자원 시민으로 구성된 저항 세력의 극심한 힘의 불균형을 방치할 경우 저항 세력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카다피 세력은 15일 저항 세력의 결집지인 벵가지로 가는 길목인 아지다비야를 공격했고 벵가지 탈환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카다피 세력은 벵가지를 이른바 "배신자"들의 소굴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벵가지에 정부군이 진입할 경우 피의 학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번 결의안 채택은 일단 추가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유엔 안보리 결의 직전 한 포르투갈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카다피는 유엔의 비행금지구역 결의안 채택 계획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결의안에 따라 공격이 이뤄질 경우 강력히 대응할 것을 천명했다.
"유엔은 그럴 권한이 없다. 우린 그런 결의안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가 미쳐 있다면 우리도 미치면 된다" 그러나 결의안 채택 직후 이뤄진 외신들과의 인터뷰에서 칼리드 카임 리비아 외교차관은 리비아 영토를 보호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저항 세력과의 휴전 협상 가능성을 언급했다.
"우린 휴전을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논의가 실행되려면 중간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 어제 유엔 리비아 특사와 합당한 방법으로 휴전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토론했다. 리비아는 유엔 결의안에 긍정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시민 보호를 보장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증명할 것이다."그러나 카임 외교차관의 대답이 얼마나 진실성과 신뢰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벵가지 탈환을 앞둔 상황에서 이뤄진 유엔의 강력한 결의안 채택에 맞서 일단 전략적 대응책을 세우려는 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의안 실행 '회원국 의지'에 달려... 적극 적용 가능성도 있어비행금지구역 설정의 실행은 회원국 각자의 참여 의지에 달려 있다. 지중해에 있는 미군과 나토군 기지에서 결의안을 주도한 영국, 프랑스, 미국 전투기들의 출격이 이뤄지고 여기에 아랍 국가들이 협력할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으로 결의안 초안을 마련했던 프랑스와 영국이 빠르면 수 시간 안에 카다피 세력의 벵가지 진입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할 수도 있다고 외신들은 보도하고 있다. <알 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알렝 주페 프랑스 외교장관은 카다피 세력의 학살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의 신속한 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시민들에 대한 카다피 정권의 공격을 중단시켜야 한다. 벵가지에 대한 (정부군의) 압박이 강력하기 때문에 앞으로 몇 일 또는 몇 시간이 중요한 시점이다." 유엔 소식통들은 이번 결의안이 리비아 정부의 공군기 출격을 저지하는 방어적인 적용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일으키고 있는 지상군의 중화기를 공격해 저항 세력 공격 능력을 줄이는 적극적인 적용 가능성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번 결의안의 핵심은 카다피의 공군력을 무력화시켜 시민 희생을 줄이는 것이다. 결의안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카다피 세력에 비해 절대적으로 약한 저항 세력이 몰살당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국제적 지지를 보여주고 실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 중 하나다. 그러나 결의안은 리비아 영토에 어떤 외국군의 주둔 가능성도 배제하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의 무력 개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리비아 상황은 어쨌든 리비아 사람들이 헤쳐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번 결의안 채택은 리비아 상황의 고착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카디피 세력이 벵가지 입구까지 진격한 상황에서 일단 정부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벵가지의 저항 세력과 시민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저항 세력의 대대적인 반격이나 내전의 종식 같은 획기적인 반전은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막강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고 수도 트리폴리를 비롯해 상당 지역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카다피 정권이 쉽게 리비아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비행금지구역 설정이라는 제한적 조치가 카다피 세력의 무력 사용을 어느 정도 저지하기는 하겠지만 저항 세력의 무력 보강을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결의안은 내전의 장기화와 리비아 분단 고착화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국제사회는 이미 리비아의 시민 저항이 내전으로 변화된 상황을 인정하고 있다. 결의안 채택 하루 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리비아 정부에 시민 공격을 중단하고 저항 세력과 휴전을 체결할 것을 촉구했다. 유엔 리비아 특사 역시 카다피 정권에게 저항 세력과의 휴전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비행금지구역 설정도 같은 맥락에 있다. 카다피 정권의 공군력을 약화시키고 시민 학살을 중단시키기 위한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현재 상황의 획기적 변화보다는 상황의 악화를 막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유엔의 비행금지구역 설정이 큰 의미를 가지지만 리비아 사람들이 애초 원했던 독재의 종식은 갈수록 가능성이 낮아지고 우선은 내전의 종식이 발등에 떨어진 현안이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행금지구역 실행을 통한 무력 개입에 더해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국제사회의 협상과 중재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 국제사회가 비행금지구역 실행이라는 이번 조치에만 만족하게 된다면 리비아 사람들은 내전의 장기화와 삶의 피폐라는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