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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중 위원장은 원래 기자라기보다 정치인에 가까웠고 나는 여의도 정치와 정치 행태를 비판하는 열혈 저널리스트였다. 이회창 선진당 대표와 이정희 민노당 대표 차이만큼이나 가치관, 인생관, 행동 양식에 거리가 있다."
이달 초 민주당에서 김충식(57) 방통위 상임위원을 추천했을 때 언론·시민단체에선 너나 할 것 없이 우려했다. 당장 '조중동 종편' 특혜를 막아야 하는데 왜 하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냐는 비판이었다. 여기에 같은 신문사 '선배'였던 최시중 방통위원장을 제대로 견제하겠느냐는 우려도 한몫했다.
이런 우려를 씻으려는 듯 김충식 위원은 취임 첫날인 지난 28일 최 위원장이 보는 앞에서 "최시중은 정치인"이라는 공격적 발언으로 곁에 있던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동아일보가 친정인데 괜찮겠느냐는 질문엔 "남자도 시집가느냐"는 말로 응수했다. 평소 '합리적이지만 온건해' 최 위원장을 제대로 견제할지 모르겠다던 지인들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동아 출신이라 친동아· 친최시중? 오히려 역차별 걱정"30일 오전 서울 광화문 방통위 14층 상임위원실에서 만난 김 위원은 여전히 자신을 향한 편견을 씻으려 애썼다.
"한겨레 창간 멤버들이 대부분 동아일보 출신인데 '친정', '친동아' 얘기 안 나온다. 조선일보 사주 일가도 평북 출신이지만 친북한 적 없지 않나. 동아일보 출신이라 동아 편든다는 건 너무 평면적인 지적이다." 김 위원은 "동아일보 안에서는 오히려 역차별당할 거라는 소리가 나온다고 들었다"면서 "내 가치관과 사고방식과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2006년 동아일보를 그만둔 것 역시 신문 논조 편향성을 지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지난 1988년 잠시 정치부장을 맡았던 최시중 위원장을 '정치인'으로 지목한 이유로 털어놨다.
"최 위원장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서 기사 쓴 경력이 많지 않다. 기획위원이나 비정치부서 일을 많이 해 주로 회사 운영 측면에서 기여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이어서 발이 넓어 대외 활동이 중심이었지, 저널리스트 일은 많이 하지 않았다. 펜 들고 뛰는 기자들에게 가까운 선배는 아니었다. 오히려 김상만 전 사장과 가까웠다. 인촌 김성수 전기도 최 위원장 작품이다."
"종편 4개 선정한 것은 무책임... 종편 승인 이의"김 위원은 다만 최 위원장과 개인적 관계나 평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앞으로 일을 하면서 스스로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첫날 부위원장 자리를 놓고 여야 상임위원들이 다툴 때 김 위원은 여당 쪽 홍성규 부위원장에게 '찬성' 표를 던졌다.
"부위원장을 야당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연장자인 내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될 수도 있고 양문석 위원도 부위원장직을 수행하면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도 있었다. 앞으로 반대할 일도 많은데 처음부터 모양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부위원장이 큰 권한이나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닌 데 이런 일로 샅바싸움 해봐야 재미없지 않겠나."마침 이날 오후 <조선> <중앙> 등 종편 사업 승인 의결을 앞두고 있었다. 종편 사업자들에게 본격적인 날개를 달아주는 첫 정책 결정이어서 김 위원도 이 사안만큼은 비장했다.
"종편 승인에 이의 있다. 시민단체나 야당에서 종편 선정 기본 틀을 부정해왔고 나도 동의한다. (1기 방통위가) 무책임하게 손만 들다가 미디어 산업 혼란만 초래했다. 학자로서 봤을 때도 종편은 무책임한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도 종편이 4~5개인데 침체하고 있다. 우리보다 인구나 경제 규모, 광고시장이 더 큰 선진국이 그런데 우리는 8개나 된다.<테레비아사히> 사장이 자기는 평생 몰락해가는 산업만 한다고 하소연하더라. 신문할 때는 방송에 밀리고 방송으로 오니 (뉴미디어에) 또 밀리고. IT 기술 발달로 다채널, 넷, 웹이 기본이 되면서 종편이 어려워지고 있다. 종편을 성냥갑 찍어내듯 해선 안 된다."각종 종편 특혜 문제는 2기 방통위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다. '조중동'을 비롯한 종편 사업자들은 지상파 채널과 가까운 낮은 번호대나 채널 연번제(비슷한 성격 채널번호를 잇는 방식)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한 홈쇼핑 채널 덕에 막대한 '자릿세'를 받아온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들의 반발이 만만하지 않다.
"기존 SO들이 선택할 문제다. 채널당 1000억 원씩 경제성 문제가 걸려 있다. 방통위가 관여하되 객관적인 공청회를 열어 전문가, 학자들을 통해 답을 내놓으면 SO들이 경제성을 도출할 것이다. 이게 시장에 부합하는 거다."또 "의무재송신이나 광고 직접 영업, 광고품목 확대, 일본 오락·드라마 송출, 편성 비대칭 등은 불공평 특혜라는 비난 소지가 있다"면서 "어떤 경우에도 특혜를 베푸는 방통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특히 미디어렙(방송광고대행사) 문제와 관련, 현 정부가 종편 직접 광고를 허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선 단호했다.
"종편 직접 광고 영업은 불공평 얘기가 나올 수 있다. 언론학자들이 광고와 보도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데 큰 신문들이 편향적 보도를 하는 건 수입원이 대기업이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일본 신문이 편향 보도가 적은 건 신문 판매 매출이 절반을 넘어 독자들 눈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40% 정도가 기업에서 나오지만 다수 개미들을 보고 신문을 만들어 자본에서 자유롭다.한국은 (광고와 판매 비중이) 8.5:1.5라고 하지만 사실상 100%, 110% 기업에 의지하고 있다. 판매는 오히려 제로(0)나 마이너스(-)로 보는 게 현실적이다. 이래선 편향이 해소되지 않는다. 방송에서도 광고 직판을 하게 되면 신문만큼의 불공정 보도 행위가 우려된다.""청와대 대변인 대신 평생 저널리스트 선택"
대표적인 호남(전북 고창) 출신 언론인인 김 위원은 정치권의 영입 제의도 심심찮게 받았다. 김 위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 제안을 거절했던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10년 전 청와대 대변인 제안을 거절했던 적이 있다. 평생 저널리스트로 자부하면서 중립적인 길을 걸었는데 특정 정부, 정파 프로파간다(선전) 하는 데 나 자신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당시 DJ 후반기여서 '조중동'과 청와대가 대립하는 마당에 관용차 타려고 직분 등진다는 게 걸렸다. 생애를 저널리스트로 마감하겠다는 꿈을 정리하기 어려웠다."김 위원은 지난해 청와대에서 새로 만든 사회통합수석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공식적인 제안은 없었다. 언론 보도나 사이드(비선)을 통해 알았다. (청와대에서) 6.2지방선거 참패 후 소통 인사를 해야 희망이 있다는 자성 목소리가 나왔는데 누군가 나를 천거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김 위원은 "현빈이 해병대 간 뒤 다른 군에서 왜 현빈 못 데려왔느냐 따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그게 해병대나 현빈 잘못은 아니지 않나"는 말로 자신과 현 정부 관계에 대한 오해를 일축해다. 만약 그때 공식 제안이 왔더라면? 김 위원은 망설임 없이 "(현 정부와)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 거절했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런 그가 야당 추천이긴 하지만 어떻게 해서 엄연히 정무직 공무원(차관급)인 방통위원을 맡게 됐을까?
"방송과 통신이 미디어의 중심이 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스마트TV로 상징되는 방통융합은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신문이라는 당대의 핵심 미디어에 30년 가까이 봉직해온 '미디어맨'으로서, 변화하는 '핵심' 미디어를 담당한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했다."미디어 정책 집행자인 방통위원 역시 신문기자, 미디어학자에 이은 '평생 저널리스트'의 연장선으로 본 셈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야당 추천 방통위원' 자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1기 방통위는 정연주 KBS 사장 해임 등 방송 장악이나 종편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야당 위원들 역시 최시중 위원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이병기 전 위원이 '중도 하차'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상임위원 5명 중에 청와대와 여당 쪽 3명이 다수결을 무기로 밀어붙여 왔다. 약자와 시민사회를 대변하려는 두 야당 위원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온 것이 방통위 1기의 역사다. 그런 구조적인 족쇄를 차고 어떻게 2기에서 국민 눈높이에 맞춰 공명정대한 미디어를 구현하고 스피드가 요구되는 통신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지 숙고하고 있다.""<동아> 마지막 10년은 고통... 논조 편향 고치려다 그만둬"1978년 동아일보 입사해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전두환 군사 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지난 1985년 '필화' 사건으로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때 경험은 1992년 <남산의 부장들>이란 베스트셀러로 이어졌지만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경험이기도 했다.
"악몽이었다. 모두 지나간 얘기지만 부당한 고문과 초법적 박해가 젊은 저널리스트의 열정을 자극하고 더 도전하게 만든 자극제가 됐다."이런 유명세 덕에 그는 평기자였던 1993년 39세 최연소 논설위원이 돼 화제를 낳았다. 당시 논설위원이란 차장, 부장 거쳐 빨라도 50대는 돼야 이름을 얹을 수 있는 자리였다. 이후 사회부장, 문화부장, 도쿄지사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엔 논조를 놓고 사주 측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결국 2006년 9월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가천의대와 경원대에서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활동하기까지 30년 가까이 현업에 몸담았지만 언론시민단체에선 오히려 미디어 공공성 활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미디어 공공성은 30년 기자 재직하는 동안 20여 년을 실천했다고 자부한다. 마지막 몇 년은 힘들었고 결국 신문사를 떠났다. 2000년대 들어 동아일보 내부에서 후배들과 공공성 문제를 논하고 동아 논조의 편향성을 고민하고 시정을 모색했다. 그게 잘 안 돼 대학으로 와 공공성을 연구해 왔다."
"종편 사업 인정 못해"... '퇴장'으로 첫 소신 밝혀김 위원은 "내용 없이 목소리만 높이는 것보다 조용하지만 할 말 하는 게 최 위원장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며 "위원장 독임제와 일방통행식 결정에 들러리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비공개로 진행된 방통위 회의에서 조선(CSTV)과 중앙(jTBC) 두 종편 사업자는 승인장을 교부받았다. 하지만 김충식 위원은 정회 소동 끝에 "종편 승인장 교부를 인정할 수 없다"며 퇴장했다. 2기 방통위 첫 시험대에서 여야 3대 2 구도를 뛰어넘지 못했지만 '퇴장' 카드로 종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한 셈이다.
김충식 위원은 이날 오후 회의가 끝난 뒤 전화 통화에서 "치열하게 심사해서 시장 상황에 맞게 한두 개를 선정해야지 무더기 종편 남발해놓고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은 정부의 책임 포기이자 광고시장 교란 행위"라면서 "종편 총론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퇴장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