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감사합니다. 멀리서 이렇게 부족한 저를 위해서 와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희망을 전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꼭 낫도록 하겠습니다."
1982년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부미방)의 주역으로 현재 말기 위암과 싸우고 있는 김은숙(52)씨는 5일 저녁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 1층 로비에 마련된 '작은 음악회'에 참석해 낮은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휠체어에 의탁했지만, 그는 최대한 밝은 얼굴로 대중 앞에 섰다. 보라색 땡땡이 수면양말과 보랏빛 슬리퍼로 아랫도리 색을 맞췄고, 스카프로 야윈 목선을 감쌌다. 환자복만 빼면 꽤 멋을 부린 차림이었다.
모금활동 닷새 만에 무려 6천만 원을 모아 건넨 대중들은 기대하지 못했던 그의 출연에 깜짝 놀랐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감사의 말이 튀어나올 때 청중들은 숨을 죽이며 그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세 마디 끝에 결국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니 삽시간 300여 대중의 눈에서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아저씨도 아줌마도 학생도 할아버지도 울어버렸다.
김은숙씨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지는 않았다. 몰라보게 야윈 그의 안색이 알려지길 원치 않는 가족과 지인들이 보호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김은숙씨의 등장에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놀랐지만 그 흔한 '폰카'도 등장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았다. 대중과 행사가 혼연일체 된 엄청난 약속의 일치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숙연한 가운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모두 합창했으며, 김씨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의 병실로 올라갔다. 주위에선 응원메시지가 이어졌다. 손을 잡고 함께 노래를 불러주며 눈물 반, 웃음 반으로 그를 배웅했다.
고은 시인 "김은숙은 숨은 꽃"
이에 앞서 병원 로비에선 약 2시간 가량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함세웅 신부는 "구약성서에는 에스더의 기도가 나온다"며 "그는 개인의 기도를 올린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걸고 민족공동체 전체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 에스더가 바로 김은숙"이라고 말했다.
이어 함 신부는 "82년 부미방 사건 이후 경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한달에 한 번씩 특별면회를 할 수 있었다"며 "마치 봉쇄수도원에 사는 수녀님들처럼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함 신부는 "우리 모두 아주 깨끗하고 순수했던 원초적 체험현장으로 돌아가서 불의한 현실을 바꾸자"며 "그것이 불의한 정권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시인 고은씨는 "목련꽃이 피어나고 개나리도 막 피어서 제 빛깔을 내기 시작하는 봄날에 은숙이는 많이 아프다"며 "이 아픔을 딛고 이 아픔을 넘어서서 우리와 함께 이 고단한 삶을 더불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라고 말했다.
이어 고씨는 "은숙이는 자기의 실체를 어디로 다 파묻어버리고 싶어 하는 늘 부재를 앞에다 내세우는 숨은 꽃이었다"며 "심해에 아주 고요한 조류가 따로 흐르듯이 그런 조류를 타고 사는 삶이 은숙이의 삶이 아니었나 싶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마도 이런 자리도 자기 생애에 가질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라며 "시라도 한 수 읊고 싶지만 마련해 올 수 없어서 이렇게 빈 몸으로 인사드린다"고 전했다.
소설가 윤정모 육성편지 낭독
소설가 윤정모씨는 육성편지를 낭독했다. 윤씨는 "그대 이렇게 지쳐 먼저 맥을 놓아버리면 선배인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며 "부미방 사건으로 감옥살이하고나서 은둔생활하면서도 늘 그늘을 먼저 보고 그들의 그늘을 지워줄 생각을 했던 이"라고 김씨를 소개했다.
이어 윤씨는 "내가 감옥에 있어봐서 안다면서 작가회의 사람들과 함께 갇힌 재소자들을 위한 조그마한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며 "재소자들과 웃음을 나누며 그들에게 필요한 건 영치금이 아니라 친절한 소통이라고 했었다"고 전했다. 어서 빨리 쾌차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소설가 유시춘씨는 "김씨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불의한 권력이 맺어준 우리는 천륜보다 더 큰 인연을 갖고 있다"며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참담하게 부끄러워했던 적이 서너 번 있는데 그 중 한번이 김은숙과 관련돼 있다"고 긴 얘기의 서두를 열었다.
유씨는 "전국 36개 교도소에 정치범만 1만여 명이던 86년 겨울을 기억하느냐"며 "그해 겨울이 유난히도 길고 추웠다"고 말했다. 그는 "NL당, 반제동맹당 등 고문용공조작으로 24시간 고문 당하는 소리가 들렸다"며 "그때 그 고문의 기록을 역사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냈는데 그때 고문 당한 얘기를 써주었던 사람이 김은숙"이라고 전했다.
당시에 고문 당하고 잡혀 갈까봐 두려워 이름도 쓰지 못하고 결국 비겁하게 민가협이라는 단체 뒤에 숨었다고 밝힌 그는 "출옥 후 한달밖에 되지 않은 김은숙에게 글을 부탁했었고 김은숙은 그 글을 써줬다"며 "그때 김은숙이 비겁한 나를 참담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는 "김은숙은 만인의 자유를 위해, 만인의 인권을 위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청춘을 묻었다"며 "결코 강하지도 무섭지도 않은 목련처럼 단아하고 고운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울먹였다.
작곡가 윤민석씨는 "민중가요를 만들었던 윤민석"이라며 "요즘엔 생계 때문에 노래를 때려치우고 비정규직으로 여기저기서 일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씨는 "제 아내도 같은 병을 앓고 있어서 암의 이응만 들어도 목이 턱턱 막힌다"며 "책으로만 만났던 김은숙님이 편찮으신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주로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이 자리에선 노래 한 자락 바쳐 올리는 게 최대한의 경의라고 생각한다"며 아직 발표하지 않은 새 노래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불렀다.
<노동의 새벽>을 작곡한 최창남 목사는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삶을 다 바친 사람들이 많다"며 "난 도대체 뭘 하고 살았나 하며 지냈는데 오늘 이 자리에 오니 그래도 정말 희망이 많이 있구나 싶다"고 말하고 노래를 불렀다.
90년대 한총련 운동을 했다는 황선씨는 "1980년대의 성명서를 꼼꼼히 읽어보니 오늘의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며 <당신은>이라는 시를 지어 발표했다.
모금액 6천만원 돌파...함께 해주어 감사하다 인사도
이날 사회를 맡은 임수경(@su_corea)씨는 "오늘 이 자리는 우리 시대 최고의 따뜻한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며 "김은숙님은 우리 시대의 아주 소중한 사람이고 그 분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에 오신 분들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임씨는 "오늘 이 자리는 트위터로 시작이 됐다"며 "기사로 이 사실을 처음 대중에게 알린 분은 운수노동자님의 위키트리 기사였다"고 새로 등장한 소셜미디어의 힘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임씨는 "오늘로 김은숙님을 위로하는 모금액이 6천만 원이 넘어섰다"며 "큰돈을 보낸 분보다는 2천 원, 1만 원, 3만 원 이렇게 소액을 보내주신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그는 "80년대를 살아온 우리는 굉장히 외롭다고 생각했다"며 "무관심 속에서 그냥 김은숙님을 보내게 될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기억해주시니 정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또한 임씨는 "그동안 사는 게 별로 재미 없었다"며 "TV화면에 보이는 몇 분 말고 힘겹고 어렵게 80년대를 살아낸 모든 분들이 따뜻한 한 길로 가게 되는 훈훈한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날 김은숙씨에게 노래를 선물한 이들은 한겨레통일문화재단 '평화의 나무' 합창단, <노동의 새벽>을 작곡한 최창남 목사, 작곡가 윤민석씨,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작곡한 이창학씨, 노래패 우리나라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