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북구 여행은 조금 막막하다. 경북 칠곡군 읍내의 편입과 산격동 일대의 신도시 개발 등으로 북구의 행정구역이 너무나 펑퍼짐해졌기 때문이다. 대구역 부근도 북구, 경북대학교도 북구, 무태도 북구, 칠곡도 북구이니, 도대체 어디부터 다니는 것이 좋을까?
여행을 다닐 때에는 그 장소에 머물 때의 시각을 고려해야 한다. 계절까지는 다 맞추지 못하더라도 '아침에 가야 좋은 곳이 있고, 저녁에 보아야 더 아름다운 곳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요즘은 그냥 눈으로 즐긴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본 것을 꼭 사진으로 남기려는 이들이 많아서, 햇빛이 어느 쪽에 있는지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건물이 동서남북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눈앞의 바다가 동해인지 서해인지 등을 고려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구에서 일몰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일찍이 서거정이 '대구10경'을 노래하면서 노을 풍경을 즐길 명소로 침산을 상찬한 것이 무작위의 결과는 아닐 터, 북구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는 침산 만조(晩照)가 적당하다. 요약하면, 북구 여정으로는 '칠성바위(지하철 대구역)- 경북대 (야외)박물관- 연암공원(산격동)- 무태- 노곡산성- 침산공원'의 순서가 적절하다는 제안이다.
지하철 대구역 칠성시장 쪽 출구에 가서 칠성바위부터 보자. 그곳은, 북두칠성이 광채를 내면서 떨어지는 꿈을 꾼 경상감사 아버지가 새벽같이 일어나 꿈 속의 현장에 가보니 실제로 일곱 개의 바위가 북두칠성처럼 떨어져 있었다는 '전설의 고향'이다. 꿈을 기막힌 길몽으로 해석한 아버지는 바위마다 일곱 아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겨넣는다. 물론 지금도 그 바위들에는 각각 한자 이름이 뚜렷하다. 그렇게 증거물이 있으니 전설인 것이다.
뒷날 사람들은 그 바위를 만지면서 아들 낳기를 빌었다. 즉, 칠성바위는 토속신앙의 현장이 되었다. 그 후 동네에는 칠성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4840평에 이르는 야외 박물관이 '최고'
북구 답사의 정점은 뭐니뭐니 해도 경북대학교 박물관이다. 이 대학의 박물관은 여느 대학의 박물관과 달리 야외에도 거대한 전시장(4840평)을 가지고 있다.
신라 초기 저수지 축조 기념비인 무술명오작비(보물 516호),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보물 335호)과 석반가사유상(보물 997호), 고려시대 석조부도(보물 135호, 258호), 분청사기(보물 268호), 은을 갈아서 불경을 베껴쓴 수능엄경(보물 271호) 등이 있고, 지금의 남산교회 옆에 있던 석빙고가 1907년 대구읍성 파괴시 함께 없어질 때 간신히 살아남은 석빙고비도 있으며, 대구와 경북 곳곳에서 옮겨온 탑이며 고인돌 등 무수한 유적과 문화유산들이 있다.
경북대 북문으로 나와 경북도청의 왼쪽으로 들어가는 좁은 산격동 길을 따라 들어가면 '서원길'이라는 표지가 나온다. 연암산에 있는 구암서원으로도 가고, 용담재와 서명보 효자각으로도 가는 길이다. 이 중 용담재는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서사진(徐思進)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씨 문중에서 세운 건물이다. 1802년에 세워진 서명보 효자각은 용담재 바로 뒤에 있고, 구암서원은 연암산 정상 인근에 있다.
구암서원은 서침(徐沈) 선생을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 선생은 세거지인 달성(현재의 달성공원 일대)을 정부 땅과 바꿔주면 후손들에게 대대로 경제적 혜택을 베풀겠다는 조정의 제안이 들어오자, 그를 사양하는 대신 대구 일대에서 거둬들이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절반으로 줄여달라고 청함으로써 가난한 민중들을 살린 선비였다.
이에 감동한 지역인들이 그를 기려 1665년 연구산(현재의 제일중 언덕)에 구암서원을 세웠는데, 1995년 이곳으로 이건되었다. 현재 달성공원에 가면 '전(傳)순종 향나무' 뒤편에 높다란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울창하게 하늘로 치솟으며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나무의 이름은 '서침나무'이다.
세칭 '무태'라 부르는 서변동과 동변동 일대는 연암공원에서 마주보는 금호강 건너편 땅이다. 서변동과 동변동을 나누면서 무태를 관통하는 하천이 동화천이다. 동화천은 금호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동화천과 금호강의 물이 만나는 일대를 살내(箭灘)라 한다. 왕건과 견훤 양쪽 군사들이 날린 화살(箭)이 강물(灘)처럼 흘러다닌 데 기인한 이름이다.
무태 역시 마찬가지이다. 왕건이 군사들에게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한다고 훈시한 동네라고 해서 마을 이름이 무태(無怠)가 되었다. 그런데 무태 땅에는 왕건과 연관되는 그런 전설적 이야기만이 아니라 (대구시가 관리를 제대로 했다면) 특별히 볼 만한 답사지가 한 곳 있다. 그곳의 공식 명칭은 '대구 서변동 선사 유물전시관'이다.
하지만 그 유물전시관은 이름만 거창하지 늘 문이 닫혀 있어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고, 정작 입장을 해도 내용이 빈약하여 잔뜩 실망만 안겨준다. 서변동은 대구에서 처음으로 신석기 유물이 많이 발굴되어 역사적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정작 '대구 서변동 선사유물 전시관'이 그 이름을 더럽히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제대로 관리해야 할 '대구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
그래도 서변동에는 여러 채의 옛 건물이 있어 그들이 답사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임란 때의 의병장 이주 선생을 모시는 환성정, 고려말의 충신 송은(松隱) 구홍 선생과 임란시 의병장 계암(溪岩) 구회신 선생을 기리는 재실 송계당 등이 바로 그것이다. 동변동에도 구씨 좌정승파의 재실인 화수정이 높은 곳에 우뚝 서 있어 지나는 이의 눈길을 끈다. 물론 이들도 좀 더 정비되고 가다듬어져야 할 수준에 있기는 하지만.
무태에서 금호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노곡동에 닿는다. 직진하면 팔달교로 가지만 그냥 우회전하면 노곡동 안으로 들어간다. 노곡동은 좌우로 산에 에워싸여 있는 특이한 마을인데, 마을 입구에 선 채 고개를 들면 오른쪽 산비탈로 올라가는 임도가 바로 보인다. 임도 아래에 있는 집이 사육신 때의 김문기 선생을 기려 지은 태충각(泰忠閣)이다.
태충각 옆을 지나 계속 걸으면 등산로는 노곡산성까지 이어진다. 길이 중간쯤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하산부터 하고 다시 등산을 하는 묘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그 탓에 땀이 마지막에 솟는다.
그렇게 산정을 오르면 그동안 산에 막혀 불어오지 못했던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을 시원하게 맞아준다. 예비군 훈련용 잠복 초소들이 곳곳에 파여 있다. 초소들은 이곳이 아득한 옛날 산성이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짐작하게 해준다.
이제 숨을 좀 고른 뒤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은 하나같이 가파른 절벽이다. 적군이 감히 올라올 마음조차 먹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이 단숨에 확인된다. 팔거산성이라고도 부르는 이 노곡산성은 천혜의 성지였던 것이다.
쇠락한 공장지대의 낙조는 어떤 모습일까
비록 노곡산성이 해발 300m에 미치지 못하는 높이에 있지만, 아침에 경북대학교 박물관을 둘러보고 오는 여정이었던 관계로 어느덧 저물 무렵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기다렸던 침산 낙조를 감상할 차례이다.
사실 노을은 두 발을 딛고 선 곳이 바다에 붙었거나, 굽어 도는 강줄기를 바라볼 수 있는 정자이거나, 아니면 첩첩으로 이어지는 산능선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라야 최고의 황홀경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침산 아래 팔달교 방면은 이미 도시화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쇠락한 공장 지대이다.
공장과 주택들로 빽빽하게 메워져 그 혼잡상을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빈한한 지역이다. 노을의 찬연한 빛을 제대로 반사할 수 있는 평화의 땅이 결코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지평선도 수평선도 볼 수 없는 침산 꼭대기에 올라 와룡산 방향을 응시할 때, 과연 눈앞에는 어떤 노을이 떠오를 것인가.
의구심으로 마음은 무겁지만 그래도 일편단심 침산을 오른다. 이윽고 해가 노원동 공장 지대의 머리 위에 있는 와룡산 너머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옛날 문헌에 나오는 만큼 장관은 못 되지만, 그런대로 볼 만은 하다.
만약 노원동 일대가 아직도 벼와 보리 같은 곡물로 가득찬 평야지대라면 대단한 황혼의 빛깔을 볼 수 있겠다 싶은 아쉬움이 펄펄 샘솟는다. 지난날의 선조들이 침산 만조(晩照)의 아름다움을 왜 그렇게 상찬했는지 헤아려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침산 정상에 세워놓은 정자 위에는 나 말고도 사진기를 든 시민이 한 명 더 있다. 이 사람 역시 지금 나와 같은 안타까움에 젖어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주위에 아무런 바람막이가 없으니 별로 높지는 않아도 침산 정상의 삭풍은 이렇게 세찰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랴부랴 아래로 내려와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서거정의 시를 급히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득 몰려온 어둠에 묻혀 글자는 홀연 바위 속으로 아득히 사라진다.
水自西流山盡頭 물줄기 서로 흘러 산머리에 닿고
砧巒蒼翠屬淸秋 침산의 푸른 숲은 가을 정취 더하네
晩風何處春聲急 저녁 바람 타고 오는 방아 소리는
一任斜陽搗客愁 노을에 젖은 나그네 시름 애끓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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