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 국무회의에서 친일전력 독립운동가 19인에 대한 서훈 취소를 결정한 후, 그 후유증이 적지 않군요. 19명 가운데는 1905년 을사늑약 후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써 그동안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으로 불렸던 장지연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장지연의 서훈 취소 결정이 알려진 후 몇몇 보수언론에서는 그를 비호하는 듯한 칼럼을 실어 이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명단 발표 후 예상됐던 일이긴 하지만 '서훈 취소' 결정에 따른 소송이 제기됐습니다. 19명 가운데 한 사람인 김홍량(金鴻亮, 1885~1950)의 넷째 아들인 김대영(74) 전 건설부차관이 그 당사자입니다. 김씨는 지난 5월 16일 국가보훈처장을 상대로 "선친에 대한 서훈 취소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당장은 김씨 혼자이지만 어쩌면 유사한 소송이 뒤따를 가능성도 있습니다.
'서훈 취소' 김홍량 유족의 소송, 합당할까요?김홍량.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독립운동 공적이 있었기에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으며, 또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이번에 서훈이 취소됐을까요? 김홍량은 독립운동사 분야 전문가 외에는 그리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백범의 '감옥동지'로 백범 김구 선생과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며, 황해도 안악 지방에서 애국계몽 운동과 교육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먼저 독립기념관에서 구축한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에 나와 있는 김홍량의 인적사항과 독립운동 관련 활동 내역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황해도 안악(安岳)군 안악읍 판팔(板八)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6년에 김용제(金庸濟) 등과 함께 안악읍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양산학교를 양산중학교로 발전시켜 그 교장으로 있으면서 황해도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의 중심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회영(李會榮)·최광옥(崔光玉)·이동녕(李東寧)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지회에서 가장 유력한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민회 황해도 지회의 교육구국운동을 지도하고 사리원(沙里院)에 모범농촌을 건설할 공사를 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추진할 때 김홍량은 황해도에서 김구(金九)·안윤재(安允在)·이승길(李承吉) 등과 함께 김도희(金道熙)의 연락을 받고 자금모집과 서간도 이주민 모집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정달하(鄭達河)와 함께 안동현(安東縣)에 이주하여 이곳에서 농업과 무역회사를 공동 경영하면서 이곳에 독립군 기지와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청년들을 훈련시켜서 독립 전쟁을 일으켜 국권 회복을 이룩할 준비로서 1910년 12월 김홍량이 8500원, 정달하가 3000원을 내고 본격적 준비를 진행하였다. 1910년 12월 안명근(安明根)이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가 이를 기화로 황해도의 신민회의 회원들과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의 추진자들을 1911년 1월에 일제히 체포할 때 김홍량도 다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11년 7월 21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의 언도를 받고 8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위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실린 내용과도 유사하며, 또 국가보훈처가 구축한 '나라사랑' 사이트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현재 국가보훈처 '나라사랑-인물찾기'사이트에는 김홍량이 삭제돼 있는데, 그와 함께 서훈이 취소된 윤익선, 이종욱 등도 공적 내용이 삭제돼 있음).
위 내용에 따르면, 김홍량은 을사늑약 체결 후 애국계몽운동을 시작으로 안악읍에 양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양기탁, 안창호 등이 주동이 돼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이후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만들 때 자금 모집과 서간도 이주민 모집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안동현으로 이주해서는 사업을 하면서 한국 청년들을 훈련시켰고, 1911년 1월 황해도 지역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다 발각된 이른바 '안명근사건'(일명 '안악사건')으로 체포돼 김구 등과 함께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5년 10월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8년간 옥고'는 사실과 다름).
김홍량, 초기 독립운동가 맞지만 변절했습니다이렇듯 김홍량은 독립운동가 맞습니다. 애국계몽 및 교육 분야를 비롯해 청년교육과 독립자금 모집에도 분명히 큰 공로가 있는 인물입니다. 특히 '안명근사건'으로 백범 김구와 옥고를 같이 치르기도 했고, 백범이 중국으로 망명 후 백범의 가족들을 돌봐주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공로로 정부는 1977년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 3등급)을 추서했으며, 그는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건국훈장 서훈이 취소됐을까요? 위의 공적내용들이 모두 허위일까요? 아닙니다. 위 내용은 대부분 <백범일지>에도 기록된 것으로 모두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바로 '그 이후'의 그의 행적들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보훈처 등에서 언급한 그의 활동 내역에는 독립운동 관련 부분만 언급돼 있고 그가 가출옥한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관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한글판)와 <경성일보>(일어판), 그리고 민간지 <동아일보>와 <삼천리> 등 잡지, 그밖에 일제 당시 발행된 <신사록(紳士錄)>(일종의 '인명사전'임) 등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가 1915년 10월 가석방된 이후 해방 때까지의 행적이 소상히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부분은 유감스럽게도 항일이 아닌 친일과 관련한 기록입니다. 친일연구가 고 임종국 선생이 이미 80년대에 이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였고, 필자도 이를 근거로 몇몇 글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 기관에서는 이를 그간 외면해 온 겁니다.
이번 '서훈 취소'를 촉발시킨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내용은 임종국 선생의 연구를 토대로 보강한 것으로, 모두 정확한 출처와 근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친일로 볼 수 있는(혹은 유사한) 김홍량의 행적을 몇 가지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받음(1928년 1월)2. 조선박람회 평의원 임명(1929년 5월)3. 육군지원병훈련소 환자 수송용 자동차 구입비 2000원 헌납(1939년 12월)4. 황해도 신천경찰서 건축비 1000원 헌납(1940년 6월)5.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 및 봉축회 초대 및 기념장 받음(1940년 11월)6. 황해도 도회 부의장 피선(1941년 6월)7. 임전보국단 발기인(황해도) 참여(1941년 9월)8. 황해도 지주보국회 통해 30만 원 모금하여 지주호 2대 헌납(1941년 11월)9. 황해도양곡배금조합 대표로 조선군 애국부에 전투기 헌납기금 10만 원 헌납(1942년 1월)10. 국민총동원총진회 이사 임명(1944년 9월)황해도 안악 지방의 재력가였던 그는 독립자금 모금에도 참여하였지만 그는 반대편, 즉 일제 측에도 적잖은 돈을 기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일본군 군용 차량 구입비나 경찰서 건축비, 그리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투기 헌납금도 여러 번 냈군요. 그런 공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황해도 도회 부의장과 같은 지역유지 '감투'를 썼으며, 그 연장선에서 여러 친일단체에서 간부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다 소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는 일제에게 포상도 더러 받았더군요.
이것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김홍량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걸렸다거나 혹은 가족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해 불가피하게 한 두 차례 친일 대열에 선 것은 백 번을 양보해 눈감아 줄 수 있다고 칩시다.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李秉岐)가 일제말기에 친일성향의 시('12월 8일', <매일신보>, 1943. 12. 8) 한 편 쓴 것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친일인명사전>에 가람 이병기는 제외돼 있습니다)
그러나 김홍량은 사정이 다릅니다. 적어도 1920년대 중반 이후, 즉 가석방된 지 10년이 넘어서부터 그는 완전히 친일대열에 서고 맙니다. 위 독립기념관 자료에도 가석방 이후 그의 행적은 전혀 언급돼 있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제 당시 그의 전반부 삶은 '민족' 진영에 서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후반부는 '반민족' 진영에 서 있었음도 분명합니다. 이는 그에 대한 음해나 모략이 아닙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고 모두 공개된 자료에서 확인한 것들입니다.
김홍량 유족의 주장, 조목조목 반박하겠습니다그의 4남 김대영씨는 <중앙일보>(2011.5.17)와의 인터뷰에서 당국의 조치에 대해 불만과 서운함을 피력했더군요. 자식으로서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 내용을 조목조목 분석, 반박해 보겠습니다. [참조-
"아버지 서훈 취소를 취소해 달라" 첫 행정소송]
첫째, 김씨는 소장에서 "서훈 취소하려면 1.서훈 공적이 거짓이거나 2.국가 안전에 관한 범죄로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3.형법·관세법·조세범처벌법으로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경우여야 하는데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참고로 위 3개 항은 상훈법 8조에 규정된 것으로, 서훈 취소의 근거 규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김씨 주장이 맞을까요? 아닙니다. 김홍량은 3개항 가운데 바로 제1항, 즉 '서훈 공적이 거짓이거나'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의 기존 공적조서에는 독립유공 공적내용만 언급돼 있을 뿐 후반부의 친일행적에 관한 사항은 전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반쪽' 공적조서였기 때문에 '거짓'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참고로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변절 여부'를 확인하는 난이 별도로 있는데, 1977년 공적심사 때 보훈처가 이를 소홀히 한 셈입니다.)
둘째, 김씨는 "근거 자료인 <매일신보> <경성일보> 기사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꼭 맞는 지적은 아닙니다. 김씨의 주장대로 이들 신문이 총독부 기관지였기 때문에 100% 믿기 어려운 대목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김홍량과 관련한 내용은 논설이나 주장이 아니라 인사발령, 행사, 포상 등 구체적인 사안(fact)과 관련한 것이어서 <관보>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할뿐더러 특히 이 신문들은 독립유공자 공적 확인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 "아버님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안 하신 분"이라고 한 대목 관련입니다. 김홍량이 창씨개명을 했다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그런 자료가 나올지도 모르니 자식인 김씨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를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습니다. 아울러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친일파가 아니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친일거두인 한상룡이나 박흥식, 그리고 도지사를 지낸 김대우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가 창씨개명은 강요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이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그냥 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끝으로, 김홍량과 백범 김구 선생과의 친분을 거론한 대목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홍량은 '안악사건'으로 백범과 같이 체포돼 같은 '15년형'을 선고받고 같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또 백범 모친을 돌보는 등 백범과는 절친한 사이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 즉 백범과의 친분과 김홍량의 친일은 전혀 별개입니다. 오히려 백범의 절친한 친구요, 동지였다면 친구를 생각해서라도 처신을 더 잘했어야지요. 동지는 중국땅을 떠돌며 일제와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고향에서 일제에 돈 바치고 그 대가로 벼슬하면서 호의호식한 게 말이 됩니까? 김홍량의 변절에 대해 당사자나 그 유족들이 민족 앞에 사죄했어야 마땅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홍량 서훈 취소는 당연한 일입니다초기에는 민족진영에 서서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나중에 친일로 변절한 인사가 비단 김홍량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널리 알려진 인물 몇을 거론해 본다면,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그 때문에 옥고를 치른 육당 최남선이 그렇고,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편집책임을 맡았던 춘원 이광수가 그렇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인이었던 최린과 정춘수 등등이 그렇습니다. 이들의 말로는 모두 친일파 거두였고, 해방 후 반민특위에 검거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김홍량에게 훈장을 줘야한다면 이들에게도 훈장을 줘야 형평에 맞습니다. 결국 김홍량에 대한 서훈 취소는 부당한 것이 아니라 잘못 주어진 훈장을 회수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은 어느 글에서 "옛말에 '만절(晩節)을 보고 초심(初心)을 안다'고 했다"며 "탄압 때문에 훼절했다는 것은 기실 최초부터 절개가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의 변명이 아닐까"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백범 친구' 김홍량의 서훈 취소, 안타깝지만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