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이분은 큰 꿈을 꾸고 난 스케일이 작아서…."지난달 30일 일본 도쿄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난 이석채 KT 회장이 남긴 말이다. 이날 양사는 한국에 일본 기업들 서버를 보관할 인터넷데이터센터(IDC)를 함께 만들기로 했다. 3월 동북부 대지진 이후 전력난과 재해에 대비한다는 명분 외에 손정의 회장이 강조한 건 기존 사용료 절반 수준인 '가격'이었다.
'아이폰 후광' 소프트뱅크와 KT의 닮은 점과 차이점 KT와 소프트뱅크는 한국과 일본에 애플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가장 먼저 도입해 '모바일 혁명'을 이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날 공동 기자회견 때도 두 사람은 아이패드2를 나란히 들고 나와 '아이패드 전도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KT는 2009년 11월 아이폰 3Gs 도입을 전후해 '소프트뱅크 따라 하기' 행보를 보였다. 단말기값 24개월 할부와 요금 할인 방식,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 모두 2008년 7월 아이폰 3G 출시를 앞두고 소프트뱅크에서 도입한 것이다. 심지어 아이패드를 전 직원에게 지급한 것이나 표현명 KT 개인고객부문 사장이 트위터로 고객 소통에 나선 것도 손정의 회장 판박이다.
그런 KT지만 '화이트 플랜'으로 상징되는 소프트뱅크의 '통신요금 파괴'만은 외면하고 있다. 2006년 보다폰 재팬을 인수해 이동통신사업에 뛰어든 소프트뱅크는 만년 3위 사업자에서 벗어나려 통신요금 인하 경쟁을 주도해 왔다. 2007년 당시 2000~3000엔대였던 휴대폰 기본요금을 1/3 수준인 980엔(한화 약 1만3000원)으로 낮춘 '화이트 플랜'은 그 결정판이었다.
'화이트 플랜'은 음성 통화 요금이 30초당 21엔(한화 약 270원, 10초당 약 90원)으로 비싼 대신 가족끼리는 완전 무료 통화가 가능하고 같은 소프트뱅크 가입자끼리는 오전 1시부터 다음날 오후 9시까지 무료 통화를 허용했다.
여기에 '아이폰 효과'까지 겹쳐 소프트뱅크는 지금껏 순증 가입자수 1위를 고수하며, 전체 15%에 불과하던 가입자 점유율을 2010년 말 현재 21%(2440만 명)로 끌어올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1, 2위 사업자 NTT도코모(48.8%)와 au KDDI(27.7%)도 기본료를 1000엔 미만으로 낮추고 가입자간 무료 통화를 제공하는 값싼 요금제를 앞 다퉈 선보였다.
'3위 반격'에 일본은 '요금 경쟁', 한국은 '요금 담합'2010년 말 현재 일본 휴대폰 가입자 수는 전체 인구수에 근접한 1억 1700만 명으로, 올해 5천만 명을 넘긴 한국처럼 정체 상태다. 5대 3대 2란 이동통신시장 경쟁 구도 역시 한국과 비슷하다. 국가 소유였다고 민영화된 NTT 도코모가 SK텔레콤이라면 KDDI는 KT, 소프트뱅크는 LGU+에 해당한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은 3위 사업자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제4이동통신사인 E-모바일 등장으로 요금 파괴가 통신시장 전반으로 확산된 반면 한국은 이통3사 '카르텔'에 묶여 요금 경쟁이 정체됐다는 점이다.
LG유플러스(옛 LG텔레콤) 역시 3위 사업자답게 미니요금제, 오즈 데이터 요금제, 온국민요금제에 이르기까지 나름 저렴한 요금으로 승부를 걸었지만 SK텔레콤, KT의 반격에 맥을 추지 못했다.
2002년 당시 LG텔레콤은 소량 사용자를 위해 기본료를 6000원(통화 요금은 10초당 39원)으로 파격적으로 낮춘 '미니요금제'를 선보여 한때 가입자 50만 명을 확보하는 등 인기를 끌었지만 8개월 만에 서비스를 중단했다.
다량 사용자를 위한 무제한 통화 요금제도 오래가지 못했다. 2004년 1월 번호이동성 제도가 도입되자 당시 이통3사는 우량 가입자를 확보하려고 월 10만 원 정도만 내면 음성 통화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무제한 요금제와 커플 무료 요금제를 경쟁적으로 선보여 가입자가 각각 12만6천 명과 51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해 6월 이통3사 CEO들이 모여 '과열 경쟁'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두 요금제를 없앴다. 그 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담합 행위로 이통3사에 과징금 17억8200만 원을 부과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이처럼 '요금 경쟁'이 원천 차단된 가운데 이통3사는 오히려 5대 3대 2 구도를 지키려 단말기 보조금을 앞세운 신규 가입자 유치에만 '올인'했다. 이후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인하 압박이 거세지면 못 이기는 척 가입비와 기본료를 찔끔찔끔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일본 통신 요금이 한국보다 싸다?
엔화 가치가 원화보다 13배나 높은 상황에서 단순 환율로만 따지면 일본 통신요금은 우리보다 훨씬 비싸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방통위에서 OECD 주요 국가 이동전화 요금을 비교한 결과 소득 수준과 물가 등을 감안한 OECD PPP(구매력 평가지수) 환율로 따졌을 때 오히려 일본 통신비가 우리보다 싼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소프트뱅크 '화이트 플랜' 이후 일본 이통사들이 단말기 보조금을 줄이는 대신 기본요금을 꾸준히 낮춘 결과다.
손정의 회장은 초고속인터넷, 휴대폰 시장에서 공격적인 마케팅 때문에 경쟁사들에게 '시장 파괴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일본 국민에게 '혁신적인 기업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특히 3월 일본 동북부 대지진 때 100억 엔을 기증하는 한편 원자력 발전을 대체할 태양열 발전에 수천억 원을 투자하기로 하는 등 '통 큰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손 회장은 지난 30일 기자회견에서도 "우리는 야후 등 통신 인프라 사업을 하고 있어 이미 한 기업이라기보다 국민에게 '라이프 라인(생명줄)'을 제공하는 공익적 사업을 하고 있다"면서 "통신과 전기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프라의 큰 기둥이라는 점에서 원자력 의존도를 낮추려 자연 에너지 사업 확장을 생각했다"고 밝혔다.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9월 창립 30주년을 맞아 '신30년 비전'을 발표하고 30년 뒤 '글로벌 10대 기업' 도약을 선언했다. KT경영경제연구소는 지난해 7월 발표한 '소프트뱅크의 미래 비전과 Lesson'이란 자료에서 기존 시장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파괴적 혁신'과 '디지털혁명을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공익성'을 교훈으로 꼽았다.
지난해 LG유플러스의 '탈통신' 선언을 시작으로 최근 KT의 비통신 사업 강화, SK텔레콤의 플랫폼 사업 분사 등 국내 통신사들도 사업 다각화를 통한 글로벌 IT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기본료 1000원 내리면 연간 6000억 원 손해'라며 공익보다는 당장 눈앞의 손익 따지기에 바쁜 통신사들 모습에서 손정의 같은 '큰 스케일'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