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자료 파일을 뒤적여 수 년 전 고서점에서 구입한 전단지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전단지는 말하자면 '초대장'입니다. 행사 일시는 1955년 6월 15일, 장소는 남한산성 서장대, 초청자는 당시 경기도지사로 있던 이익흥(李益興)입니다.
주최 측은 이날 교통 편의를 위해 당일 12시 30분 정각에 경기도청 정문 앞에 버스를 준비해뒀습니다. 그리고 참석자는 당일 이 전단지(사실상 초대장)를 지참하고 참석하랍니다. 대체 무슨 행사기에 남한산성에서 행사를 열었으며, 또 초청자가 경기도지사였을까요?
<대한뉴스> 제59호(1955년 7월 4일 제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탑 건립과 제막식'이었습니다. <대한뉴스>는 "6월 15일 오후 유서 깊은 남한산성 일각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탑 제막식이 성대히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함태영 부통령 및 정부각료와 내빈들이 참석했으며 변영태 외무부장관과 내외 요인들이 축사를 했고 송수탑 건립위원장인 이익흥 경기도지사가 송수탑 건립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이어 인천여고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비는 합창을 했습니다"라고 보도했더군요.
위키백과와 네이버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4월 18일, 음력으로는 3월 26일생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1955년이면 이승만이 80세가 되는 해입니다. 바로 이 해에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경축행사가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이승만 대통령 '80세 탄신 경축'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老)대통령의 건강을 비는 게 허물이랄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그 정도가 송축(頌祝) 차원을 넘어 아부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까지80회 생일을 맞은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송수탑(頌壽塔)'은 조각가 윤효중(尹孝重)이 만든 것으로, 날개를 펼친 봉황새를 탑 꼭대기에 조각해 얹었는데 이 역시 '80세 탄신' 경축행사의 일환이었습니다.
송수탑을 세운 경기도지사 이익흥은 일제 때 친일경찰을 지낸 인물로 흔히 아첨꾼의 상징으로 불립니다. 어느 핸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하러 갔다가 생리현상으로 방귀를 '뿡!' 하고 뀌자 이익흥이 이를 낼름 받아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부를 떨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승만이 몇 번 들른 것 말고는 별다른 연고도 없는 남한산성에 송수탑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만하다 하겠습니다.
이승만 우상화는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시작됐으나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부터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학교 교실에 이승만 초상화가 내걸린 것은 국가원수이니 그 시절엔 그랬다고 쳐도, 이승만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단 것은 예우 차원을 넘은 '우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 우표와 화폐에 이승만의 얼굴이 등장하더니 마침내 서울시내 요소에 이승만 동상도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탑골공원을 비롯해 남산 중턱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또 전국 각지에서는 소위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승만 우상화는 '80세 탄신'인 1955년에 극치를 보였습니다. 우선 이승만이 80세 생일을 맞은 3월 26일 당일 벌어졌던 각종 경축행사를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대통령 취임식도 아니고 대통령의 80회 생일잔치를 이처럼 요란하게 치른 경우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일 상황을 기록한 <대한뉴스>(제54호)에 따르면, 당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온 내외의 방문객들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외교사절로는 '80회 탄신'을 맞아 특별히 내한한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 우드, 콜터 장군, 김홍일 자유중국 대사, 왕동원 중국대사 등이 잇따라 경무대를 예방하였습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경무대를 찾아 그의 '80회 탄신'을 축하하였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80회 생신'이니 축하인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미풍양속입니다.
운동장엔 "만수무강", 서울 시내엔 '꽃전차'방문객 접견을 마친 이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날 오전 이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돼 있었습니다. 시민과 학생 수천 명이 스탠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운동장에서는 숙명여고,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으며, 이들 주위로는 '만수무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물론 군인들도 이날 경축행사에 대거 동원됐습니다. 서울운동장에서 경축행사가 열릴 때 하늘에서는 공군이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습니다.
KBS가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영상실록'에 따르면, 이날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행진에는 마치 국군의 날 기념행사처럼 기갑부대도 등장했더군요. 이 '영상실록'을 소개하는 내레이터는 "대통령의 생일이 국경일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전했습니다.
이날 경축행사는 비단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당일 저녁에는 이승만 탄신 경축음악회를 위해 특별초청을 받고 25년 만에 귀국한 작곡가 안익태가 지휘하는 경축음악회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안익태는 4월 18일 정부로부터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전국에서 '80회 탄신' 경축기념식수와 경축경로회가 벌어졌으며, 당일 열린 전국무술대회에는 이 대통령이 현장에 구경을 나오기도 했더군요. 또 3월 26~27일 이틀에 걸쳐 서울 시내 전차들은 '80회 탄신' 경축 꽃을 달고 다녔는데 당시 이를 '꽃전차'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80회 탄신' 기념우표가 발행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초대, 2대, 3대 대통령 취임기념을 비롯해 80회, 81회 탄신기념 우표 등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얼굴이 담긴 우표는 모두 6종이 발행됐습니다. 기념우표에 이어 심지어 생존인물인 그가 화폐에도 등장하였습니다. 1953년 지폐에 한복 차림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1957년부터는 한복 대신 양복 차림으로 바뀌었다가 4·19혁명 뒤인 1962년부터는 지폐에서 그의 얼굴이 사라졌습니다.
이밖에 '80회 탄신'을 경축하여 공보실에서는 현상문예를 공모하였고, 정부기관지 격이었던 서울신문사에서는 축하글을 묶어 '헌수송(獻壽頌)'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또 그 무렵부터 전국에는 이른바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으며, 몇몇 문인들은 그의 '60회 탄신'을 경축하면서 낯간지러운 축시를 써댔습니다. 흔히 '민족시인'으로 불려온 노산 이은상(李殷相)은 그해 <희망> 4월호에 '송가(頌歌)'라는 제목으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을 기념하는 축시를 실었습니다.
이 겨레 위하시어 한 평생 바치시니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이기붕 찬가'에 이어 전해오는 '이승만 찬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대한 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를 동서로 가르는 큰길의 이름은 세종로(世宗路)를 비롯해 충무로(忠武路), 다산로(茶山路), 율곡로(栗谷路) 등 우리 역사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아호 등을 딴 도로명이 서울 시내엔 적지 않습니다. 이승만의 호는 '우남(雩南)'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호를 딴 '우남로' 같은 도로명이나 그 외 기념물은 없었을까요?
'80회 탄신' 그해(1955년) 6월 15일 남한산성에서 '송수탑' 제막식을 가진 함태영 부통령 등 일행은 식후에 행사를 따로 하나 더 가졌습니다. 바로 '우남로' 개통식 참석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남로란 경기도 광주에서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도로로, 우남은 이승만의 호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우남'을 따서 붙인 이름은 이밖에도 한 둘이 아닙니다. 우남정(亭), 우남공원, 우남도서관, 우남회관 등이 그것입니다.
이승만 동상 세우려면, '4·19혁명'이 '4·19난동' 돼야'80회 탄신' 이듬해인 1956년 8월 15일, 이승만의 제3대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초대형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남산공원을 '우남공원'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며, 1959년부터는 남산 정상에 있던 팔각정도 '우남정'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남산 분수대 자리는 일제 때는 조선신궁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승만 시절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었으며, 현재는 이 일대에 백범 김구 동상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서 있어 시대의 변화를 절감케 합니다).
이밖에도 두 건의 '우남' 기념물이 더 있는데, 우남도서관과 우남회관이 그것입니다. '우남도서관'은 1958년에 서울이 아니라 대전에 건립됐는데, 현재 대전 중구청 뒤켠 주차장과 맞닿아 있는 대전시립 연정국악원 건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남도서관' 역시 이승만 탄신 80주년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건립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내려와 건축과정을 살펴봤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1978년에 개관한 서울 세종로 소재 세종문화회관은 그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이 1972년 화재로 전소되자 새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시민회관의 전신이 바로 '우남회관'입니다.
해방 후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 건물을 국회의사당 등으로 사용하면서 체신부 청사 자리에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지은 것으로, 1956년 6월 20일 기공식을 한 후 5년 뒤 1961년 10월 31일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기공식은 이승만 정권 때였으나 준공식 테이프는 이승만이 아니라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 끊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냉혹합니다. 그래서 공과(功過)가 교차된 인물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혹평도, 과장된 미화도 금물입니다. 독재 권력의 힘을 빌려 세우거나 특정 집단들이 주도해 세운 동상들은 언젠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근자에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학계를 중심으로 한 '이승만 재평가' 활동은 몰라도 최근 일각에서 추진하고 있는 이승만 동상 건립은 온당치 않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면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4·19혁명'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또 '4·19국립묘지'를 '수유리 공원묘지'로 바꿔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승만이 '4·19혁명'을 밟고 넘어가 '4·19'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저도 이승만 동상 건립에 미력이나마 보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