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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 겉표지
▲ <예지몽> 겉표지
ⓒ 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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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물리학자, 왠지 좀 안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다. 물리학자라면 실험실에서 진지하게 실험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물리학자가 살인사건을 수사하다니?

어떻게보면 꼭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과학수사기법이 발달하면서 사건수사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기 때문에 과학자가 수사에 참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경향은 영미권 작품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제프리 디버가 창조한 탐정 링컨 라임은 수사관이기 이전에 뛰어난 과학자였고, 퍼트리샤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는 의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법의관이다.

물리학자가 수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건해결을 위해 거리를 뛰어다니며 탐문하고 추리하는 시대에서 과학수사의 시대로 넘어왔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9년 단편집 <예지몽>에 등장하는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도 그렇게 사건수사에 참여하는 현직 과학자다.

과학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경찰청 형사

데이도 대학 공학부 물리학과 교수인 유가와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형사에게 조언을 해준다. 그렇다고 그가 경찰청으로부터 공식적인 도움을 요청받는 것은 아니다. 경찰청 수사과에는 데이도 대학을 졸업한 구사나기 슌페이라는 형사가 있다. 구사나기와 유가와는 같은 대학 동창이기 때문에 구사나기는 수사가 벽에 부딪히면 개인적으로 유가와를 찾아가는 것이다.

같은 대학이지만 서로 전공은 달랐다. 구사나기는 과학과 수학에 젬병이기 때문에 유가와에게 '과학 멍청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한다. 사건만 제대로 해결된다면 그런 놀림 따위가 대수일까. 그래서 구사나기는 어려운 사건이 생기면 부지런히 유가와를 찾아다닌다.

구사나기의 주변에서는 유독 괴상한 사건들이 많이 생겨난다. 오래전 초등학교 때 꿈 속에서 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가 나이를 먹고 스토커로 변해버린 남자가 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애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그 시간에, 전혀 다른 장소에서 애인의 혼령을 보게된 남자도 있다.

망자의 저주인지 특정 시간만 되면 아무 이유도 없이 요란하게 가구가 흔들리고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귀신들린 집도 있다. 한 여인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며칠 전에 그 모습을 꿈 속에서 보았다고 주장하는 어린아이도 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건과는 전혀 다른, 난해하면서도 으스스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터지는 것이다. 상식과는 맞지 않는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면 구사나기는 유가와를 찾아간다. 그러면 물리학자는 현장에도 가보고 관련자들을 만나보면서 사건을 추리하고 그 전모를 구사나기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아주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초현실적인 현상을 해명하는 물리학자

사건이 해결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물리학자의 도움을 받는 일이 계속 이어진다면 경찰청의 입장도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형사들이 투입되고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의 진상을 일개(?) 물리학자 한 명이 밝혀낸다면, 그리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경찰청으로서는 꽤나 체면 구기는 일이 된다.

구사나기는 체면 대신에 실속을 챙기기 때문에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유가와를 찾아간다. 그럴때면 유가와는 실험실에서 무엇인가를 실험하며 구사나기를 맞이한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줄다리기를 하며 마찰력 실험을 하기도 하고, 유리막대를 불로 가열하며 전류의 흐름을 실험하기도 한다.

물리학자 유가와가 탄생하게된 배경에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기공학을 전공했다는 사실도 한몫 했을 것이다. 실제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작품들 안에 꽤나 전문적인 이공계의 원리와 이론들을 싣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런 이론들이 크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이론과 사건이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공계를 전공하지 않은 형사 구사나기는 유가와의 실험을 보면서 인간의 심리를 생각한다. 어떤 동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이후에는 그 범죄 때문에 열이 올라서 다음 범죄를 저지르는, 그러다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인간의 심리를 떠올린다. 천재 물리학자와 어수룩 하면서도 통찰력있는 형사, 다소 독특하지만 어찌보면 이상적인 콤비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예지몽>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양억관 옮김. 재인 펴냄.



예지몽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재인(2009)


#예지몽#히가시노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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