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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받은 정신적인 충격과 상처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단순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당사자의 일상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 청소년이라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할 것이다. 그 어두운 기억이 성격에 영향을 미쳐서 폭력적으로 변한다거나 아니면 타인과의 소통자체를 거부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지속적인 상담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아니면 주변에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피해자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도록 꾸준히 도와주어야 한다.

 

앨리스 호프먼의 <아넬의 소녀들>(앨리스 호프먼 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넬'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엘브'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열다섯 살의 엘리자베스는 4년 전에 한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엘브는 그 때의 일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 속에만 묻어두고 있다.

 

세 자매가 공유하는 상상의 세계 '아넬'

 

그리고 아넬이라는 가상의 세계로 도피해서 그 안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한다. 엘브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다. 열네 살의 메그, 열두 살의 클레어가 그들이다. 셋 다 짙은 색 긴 머리와 옅은 색 눈이 놀랍도록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메그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책벌레다. 클레어는 4년 전에 엘브가 당한 일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엘브의 부모는 4년 전에 이혼했고 세 자매는 어머니 애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니까 4년 전에 엘브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줄줄이 생겨난 셈이다. 그해 여름에 엘브는 두 동생에게 아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엘브는 동생들에게 '그냥 눈을 감고 다른 세계에 있다고 상상해봐'라고 말했다.

 

그 아넬은 땅 속 깊은 곳에 있어서 계단을 천 개도 더 내려가야 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산사나무 밑과 밤나무 밑이 그 출입구로서, 세 자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통과할 수 없다. 아넬에서는 누구도 그들을 해치거나 괴롭힐 수 없다. 입구를 통과해서 내려가기만 하면, 현실세계에서는 눈이 펑펑 내릴 때에도 아넬에서는 늘 장미가 만발해 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의 세계가 오래 유지되지는 못한다. 현실적인 메그가 가장 먼저 아넬에서 빠져나왔다. 클레어 역시 '엘브 언니가 영원히 지하세계에 갇혀버리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한다. 세 자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엘브는 일탈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옷을 모조리 태워버리는가 하면 도둑질을 하고 술을 마신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는 것만 같다. 이렇게 시작된 갈등은 결국 끔찍한 사고로까지 이어지고 마는데…

 

계속되는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때를 회상하다 보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엉망인 삶을 살아가는 엘브도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순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모든 것이 변하기 전인 열 살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하고 생각한다.

 

클레어도 변해 간다. 언제나 엄마의 일을 도와주던 마음씨 착한 소녀였던 클레어도 점점 말수가 없어지고 주변환경에도 관심이 없다. 사랑과 행복보다는 처벌과 보복, 운명이라는 단어를 신봉하게 되었다.

 

반면에 세 자매의 엄마와 할머니는 조금씩 집안을 바로잡으려 고민한다. 엘브가 열한 살 때 험한 일을 당했고 부모는 이혼했다. 그 이후로 동생도 망가졌고 이제는 집안이 콩가루가 되기 일보 직전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잘못되기 시작한 걸까?

 

불운이 한 집안을 덮쳤더라도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운명일 것이다. 어린 시절 상상 속의 세계에서 무가치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또 한번의 기회를 얻게 하기 위해 운명이 자신을 지금까지 살려둔 것일 수도 있다. 작품 속 한 등장인물의 믿음처럼 불행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사람들의 능력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아넬의 소녀들> 앨리스 호프먼 지음 / 박아람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아넬의 소녀들

앨리스 호프만 지음, 박아람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2010)


#아넬의 소녀들#앨리스 호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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