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의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
"영국 의사들은 돌팔이다"
"영국에서는 환자가 기다리다 죽는다더라"영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은 대개 영국의 국가 의료 시스템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NHS에 대한 소문은 유학생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유학생들을 대개 웬만한 질병은 병원에 가보지도 않고 버티거나, 증세가 심해지면 아예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온다. 심지어 한국에서 항생제를 상비약(?)으로 잔뜩 처방받아 가져 오는 사람도 봤다.
항생제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 이유 있었네하지만, 역시 유학생이었던 필자가 보기에, NHS에 대한 한국 유학생들의 반감은 상당 부분 오해와 편견에 기초해 있다. 그 오해와 편견의 근원에는 NHS의 GP(General Practitioner)가 있다.
유학생을 포함해 모든 영국 국민들은 주치의인 GP가 있다. 우리로 치면 보건소 비슷한 1차 의료기관이 전국적으로 8000여 곳 있는데, GP는 바로 여기서 근무하는 의사다. GP는 우리로치면 의대 6년 과정을 수료하고 전문의 자격증이 없는, 말 그대로 '일반의'라고 보면 된다. GP는 전문의가 아니기 때문에 감기나 복통 같은 가벼운 질병을 치료하면서 환자를 2차 진료기관으로 보내는 일종의 '문지기' 역할을 한다. 때문에 한국 유학생들은 GP가 '치료도 못하는 돌팔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응급환자가 아닌 이상 반드시 GP를 거쳐야 2차 진료기관의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GP는 당장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 아니라면 집에 돌려보내거나 간단한 처방을 한다. 그렇게 경과를 지켜보다가 2차 진료기관으로 보낼 것인지를 결정한다. 질병의 경중에 따라, 그 속도가 적절히 조절된다. 그러다 보면, 유학생들이 전하는 것처럼 '한 달씩 기다리는 경우'도 있지만, 빠른 치료가 요구되는 경우에는 바로 그 다음날 진료를 받게 해주기도 한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데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멍청한 시스템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시스템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 GP가 의학적 판단에 의해서 2차 진료 여부를 통제하다 보니 의료자원의 낭비가 줄어든다. 1차 진료기관의 과도한 의료장비와 과잉진료가 문제되고 있는 한국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물론 GP의 의학적 판단은 (합리적 의료자원 분배를 추구하는) 관료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순수하게 의학적인 판단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개별 의사들의 이윤추구 동기에 의해서, 과잉진료를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유학생들이 영국 의료 괴담 유포자가 된 이유그런데 유학생들의 상당수는 NHS의 2차 진료기관을 이용해 본 경험이 없다. 체류 기간 자체가 짧은 데다가, 그나마도 큰 병이라고 생각되면 한국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몸살, 비염, 복통, 두통, 디스크, 아토피 피부염 등 가벼운 질병으로 치료를 받아본 것이 대부분이다. 그 정도의 경험에 다른 유학생들로부터 주워들은 '괴담'을 더해서, 영국의 의료 시스템을 속단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실 알레르기성 비염이나 아토피 피부염은 전 세계 어느 병원에 가도 쉽게 낫지 않는 병이다. 감기 몸살은 병원에 가든 안 가든 1주일이면 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GP는 이러한 경증 질환 환자가 쉽게 2차 진료기관에 접근할 수 없도록 적절히 통제하고, 병세가 심할수록 빠른 시일 내에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한다. 물론 GP는 신경외과 전문의만큼 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의사는 아니다. 하지만, 환자의 두통이 일시적인 증상인지, 아니면 뇌경색이나 뇌출혈이 의심되어 정밀진단이 필요한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고, 실제로 그 정도의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응급'이 아닌 이상, 진료에 일정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의학적 판단에서 감기 같은 질병은 아예 치료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그렇게 관리하는 덕분에 전 국민에게 무상의료가 가능한 것이다. 초기 접근이 약간 불편한 대신, 큰 병에 걸릴수록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1차 진료기관에서 GP랑 약달라고 싸우다가 한국에서 치료하고 오곤 한다. 2차, 3차 진료기관의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해 보지 않고, NHS를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무조건 진료가 느리다는 것도 큰 편견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GP는 상황에 따라 그 속도를 조절한다. 예를 들어,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서 뇌출혈이 의심되면, 그 자리에서 응급실로 보낸다. 당장 응급실 갈 정도는 아니지만, 정밀진단이 빠르게 요구되는 증세라면 1~2일 안에 전문의의 정밀진단을 받게 한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병의 경중을 따져 적절한 시기에 치료 받도록 시스템이 짜여져 있는 것이지 무조건 한 달씩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을 알지 못하고, "영국에선 전문의 만나려면 한 달 걸린데"라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유학생들이 NHS를 불신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학생'은 대개 자기 나라에서 상류층에 속한다. 한국 유학생들의 다수는 아마 평생 치료비 걱정 한 번 안해 본 사람들일 테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서 누리던 의료혜택을 기준으로 NHS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영국 NHS는 국민의 의료 접근권이나 선택권에 있어서는 제약이 많은 시스템이지만, 전 국민에게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아마 병원비 때문에 사채를 빌려야 했던 한국 사람이 영국에 와서 의료 서비스를 받는다면, '지상낙원'이라는 찬사를 보낼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균형있게 보지 못한다면 NHS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영국 의사, 어떻게 신뢰받는 직업 1위가 됐나물론 영국의 NHS는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다. 블레어 정부 이후 상당한 수준의 개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유학생들이 자신의 지엽적인 경험과 그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비롯된 편견에서, NHS를 비웃고 폄하하는 것은 생산적인 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그들의 그런 왜곡된 시선이 '무상의료'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나 '공공의료'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말이다.
만약 유학생들이 전하는 대로 영국의 의료가 그렇게 엉터리라면, 당장 폭동이라도 일어나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NHS를 개혁하자고 하지, 그것을 폐지하자고 하지 않는다. 의료 시스템에 문제가 많아 개선이 필요한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90%는 의사가 하는 말을 신뢰한다고 답했고, 영국 의사는 25년간 '신뢰감을 주는 직업'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켰다. 영국 의사들이 정말 돌팔이라면, 이런 놀라운 결과가 가능할 수 있을까?
오히려 NHS는 우리의 의료현실과 관련해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영국 NHS는 공공의료가 반드시 비효율적이지는 않다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고, 1차 진료기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NHS가 우리 의료 개혁의 '모범답안'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비중있게 검토해야 할 중요한 '현실'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편견 없이 영국 의료의 장점과 단점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홍성수님은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