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증언64' <
해괴한 서명운동, 대단한 KBS노조>와 '증언65'
<정연주 사장 박사학위 가짜 아냐?>에서 2008년 봄에 KBS에서 당시 노동조합(위원장 박승규)을 중심으로 한 '반정 세력'이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지 몇 가지 예를 통해 이야기했다. 나의 경제학 박사 학위에 대한 의혹 제기를 비롯하여, KBS 노조가 벌인 해괴한 여론조사,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이를 묵살하는 등의 행위를 그들은 서슴없이 자행했다. 그렇게 한 쪽에서 나의 퇴진을 위해 이명박 정권, 한나라당, 수구언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전면적인 압박을 가하는 가운데서도 KBS 안에서는 이와는 다른 목소리도 적지 않게 나왔다.
"KBS 기자로 사는 길"
내가 해임당하기 한 달 전쯤인 2008년 7월께로 기억된다. 당시 KBS 인도 특파원으로 나가있던 이재강 기자가 보도본부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글의 제목은 'KBS 기자로 사는 길'이었다. 2008년 봄과 여름의 그 혹독했던 시절에 KBS 기자로서 살아가는 길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잘 담은, '시대의 증언'이라고 여겨져,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가 이 글에서 예견한 일들, 그러니까 이명박 정권이 방송장악을 위해 진행하게 될 수순인 1차 목표 정연주 제거, 2차 목표 이명박 정권 인사의 KBS 사장 임명, 3차 목표 KBS의 정권 홍보도구화 등은 그 뒤 그대로 진행되기도 했다.
최근 KBS를 향해 다가오는 권력의 음모는 저열하면서도 치밀합니다.공영방송 KBS에 대한 정치권력의 욕망, 그 속성이야 변함이 없었지만 욕망을 추구하는 방식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의 수준과 궤를 같이 하며 제어돼 왔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그같은 사회적 성취를 단칼에 무시하며 과거 군사 독재,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무식한 방송 장악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음모는 저열합니다.한편으로 그들의 음모는 치밀합니다. 무리수를 감수하며 방송통신위원장 임명을 강행한 이후 이른바 약한 고리 KBS 장악의 수순을 차분하게 밟아가고 있습니다. 광우병 사태에서 드러나듯 이명박 정권에 더 위협적인 존재는 MBC이지만, 상존하는 내부 갈등 속에 무혈입성도 기대해볼만한 KBS가 그들의 1차 접수 대상이 됐습니다. 목표를 정한 후에는 이사 교체, 감사원 특감, 검찰 수사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정권의 뜻대로 진행된다면 KBS 접수의 1차적 전공은 정연주 사장의 퇴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2차적 전공은 이명박 정권의 뜻을 받드는 인사의 사장 임명이 될 것입니다.그러나 그들이 온갖 난관을 뚫고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KBS라는 막강한 방송사를 정권의 홍보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것입니다. KBS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다큐맨타리 등 일정한 사회적 발언을 하는 프로그램들이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들어갈 것입니다.바로 여기에 기자의 고민이 있습니다. 입사 이후 18년 알량한 저의 기자 생활을 취재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에서 돌이켜 볼 때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취재하고 편집해 방송할지, 그 자율성은 꾸준히 신장돼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양심에 결정적으로 반하는 취재와 방송을 강오받지도, 설사 강요받더라도 저항할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가 우리 보도본부 안에 어느 정도 자리잡았습니다.그리고 자율성 확대의 역사는 '땡전 뉴스'로 상징되던 정권의 방송이 국민의 방송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기본이 된 정권이라면 KBS가 걸어온 발전의 역사, 독립의 역사를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KBS가 특별한 존재이어서가 아닙니다. KBS가 있는 자리는 응당 국민 곁이기 때문입니다. KBS가 국민 곁에 있어야 한다는 합의가 우리 사회에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kBS를 홍보도구로 뜯어고치자"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그같은 합의를 정면으로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KBS에 대한 후안무치한 압박은 그들이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드러냈습니다. '눈엣가시같은 사장을 갈아치우고 정권의 사장을 앉혀 KBS를 홍보도구로 뜯어고치자'. 그들의 시나리오는 간단히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래서 정연주 사장 퇴진이라는 1차 목표, 정권의 사장 임명이라는 2차 목표, 그리고 정권의 홍보도구화라는 3차 목표는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1차 목표를 획득하게 되면 2차, 3차 목표를 향해 일사천리로 내달릴 것입니다.지금처럼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1차 방어선이 무너지고 2차 방어선을 지켜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2차 방어선이 무너지고 나면 기자들은 매일 매일을 양심의 시험대 위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여의도 술자리에서 우리의 대화 주제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번민과 하소연으로 날밤을 새우며 무력감과 자괴감에 괴로워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 지옥같은 생활을 저 자신은 물론 그 어떤 KBS 기자도 맛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같은 정세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저는 정연주 사장이 당분간이라는 애매한 기간이 아니라 임기 종료 시점까지 직책을 수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1차 방어선을 정권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KBS 사장이 정권과 무관하게 임기를 채우는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넓게는 방송계를 치고 들어오는 정권의 돌격대를 초입에서 최대한 묶어두기 위해서입니다.좋든 싫든 이명박 정권과 KBS 간의 전선은 정 사장을 한 가운데 두고 형성돼 있습니다. 정권 앞에 정 사장이 쓰러지면 그 패배의 후폭풍은 KBS 전체를 뒤덮을 것입니다.동시에 우리는 정 사장 임기 종료 시점을 지금부터 대비해야 합니다. 정권의 인사가 KBS에 들어올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보완하고 시민 사회단체의 우군을 충분히 확보하는 등의 준비를 통해 사장 교체 시점에 극대한의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대비 없이 정 사장 임기 완수에만 정력을 쏟는다면, 그래서 정권의 인사가 그 때 KBS에 입성한다면 우리의 투쟁은 그저 정 사장 지키기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투쟁의 목표는 우리의 일터, 국민의 방송 KBS 지키기라는 점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위의 두 가지를 모두 이룰 수 있다면 이는 KBS 역사에서 그리고 대한민국 방송 민주화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진전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물과 기름이 본질적으로 서로를 침범하지 않듯 정권과 KBS가 자연스럽게 서로의 자리를 지키는 이정표 역할을 할 것입니다.또한 위의 두 가지는 똑 같이 중요합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목표입니다. 솔직히 취약한 내부 동력을 감안할 때 비관적인 생각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자존과 보람을 위해 정권과 맞서야 합니다. 깨지더라도 말입니다.정연주 퇴진은 '해임'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글이 보도본부 게시판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글에서 이야기한 정권의 1차 목표인 정연주의 퇴진은 '해임'이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그 뒤의 2, 3차 목표는 일사천리로 성취되었다. "우리 스스로의 자존과 보람을 위해 정권과 맞서야 한다"고 외쳤던 그 절규는 묻히고, 대신 당시 KBS 노조를 비롯한 내부의 '반정 세력'들은 스스로 '1차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일에 총력을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KBS 체제의 주력 부대가 되어 있다.
(당시 이 글을 쓴 이재강 기자는 KBS의 미디어 비판 프로그램이었던 <미디어포커스>의 핵심 멤버였고, 오랫동안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인도 특파원을 끝내고 돌아 온 그는 현재 KBS의 <특파원 현장 보고>의 앵커를 맡고 있다. 올해 그는 두 권의 책을 냈다. 인도 특파원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 이야기를 담은 <인도, 끓다>를 1월에, 그리고 자신의 방송 기자 이야기를 담은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라>를 8월에 각각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