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제시카 멜로(26)와 키넨 탐슨(21)이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그들이 뉴욕 맨해튼 5번가 애플스토어 매장 옆에서 노숙을 한지 9일째 되는 날이었다. 멜로는 가지고 있던 '아이폰'으로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았지만, 그의 사망 소식이 믿기지 않아 '맥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검색하고 나서야 실감했다고 한다.
"잡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정확하게 10분 뒤, 기자들이 몰려왔고, 잡스를 추모하기 위한 사람들이 꽃과 ('애플'의 상징인) 사과를 들고 찾아왔다. 그들은 촛불도 켜고, 카드에 메시지도 남겼다. 나를 비롯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아이폰4S' 첫 번째로 갖게 되면, 잡스 위해 특별한 선물 준비" 멜로와 탐슨이 애플스토어 매장 옆에서 노숙을 하는 이유는 오는 14일(현지 시각) 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 예정인 '아이폰4S'를 첫 번째로 사기 위해서다. 일찌감치 줄을 선 것이다. 기자가 두 사람을 만난 건 지난 8일이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간이 의자 사이에는 '12일째'라는 알림판이 세워져 있다. 6일을 더 길에서 잠을 자야 한다. 멜로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가장 힘든 것은 날씨다. 오늘은 괜찮지만 최근 갑자기 추워졌다. 비가 와도 힘들다. 정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내게 매우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처음에는 미쳤다고 했지만 나중에 우리를 찾아와서 응원해주고 지지해줬다."
그들은 비가 오거나 건물 경비원에게 쫓겨나면 차를 렌트해서 잠을 잔다. 컴퓨터나 휴대폰은 근처 스타벅스에서 충전해 쓴다. 식사는 인터넷으로 인근 식당을 검색해 배달을 시킨다. 지나가는 시민들이나 관광객들이 '너희들 뭐하고 있니?' 하고 자주 물어보니, 심심할 겨를도 없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상을 매일매일 '맥 노트북'을 이용해 그들의 블로그에 올린다.
멜로는 바디 페인팅을 하는 프리랜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탐슨도 친구인 멜로와 마찬가지로 '파트타임 잡'을 가진 평범한 미국 청년이다. 탐슨은 "지난 번 아이폰4를 12번째로 샀는데, 이번에는 '넘버 1', 첫 번째로 아이폰4S를 갖고 싶었다"며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상품을 기다리면서 가장 먼저 그 상품을 경험해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3주 전부터 잡스가 사망했다는 루머가 떠돌기는 했지만, 탐슨에게도 그의 사망 소식은 충격이었다.
"우선 잡스에게 고맙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 그는 IT 혁신을 가져왔고,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만든 제품을 즐겁게 쓰고 있다. 그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는 비즈니스맨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위대한 사람이다."그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애플스토어 입구 옆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잡스를 추모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도 아이폰이 들려있다. 잡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세상에 내놓은 신제품 '아이폰4S',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 제품을 얻기 위해 열흘 넘게 길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래서 잡스의 사망 소식에 조금 더 특별한 감정이 들 법도 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우린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이폰4S'를 첫 번째로 갖게 되는 날, 그것을 가지고 잡스를 추모하기 위해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블로그에 기록해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오는 14일을 기다리는 것은 비단 그들뿐이 아니다. 애플 팬보이(광팬)들은 '아이폰4S'의 오프라인 매장 첫 판매를 기념해 14일을 '스티브 잡스의 날(Steve Jobs Day)'로 정하고, 세계 각국에서 추모행사를 열자고 제안했다.
잡스의 혁신철학은 '인간'... 아이폰과 SNS로 무장한 청년들의 시위기자가 잡스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로어 맨해튼 뉴욕증권거래소 인근 자유광장(주코티파크)에서였다. 당시 자유광장에는 막 행진을 마친 1만5000여 명의 '월스트리트 점령(Occupy Wall Street)' 시위대가 모여 있었다. 지난달 17일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가 시작된 이후 최대 규모였다. 금융 자본가의 탐욕과 부패,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며 광장에서 노숙을 시작한지 19일째였다.
그들은 스폰지, 매트리스, 종이박스 등을 깔고 광장에서 잠을 잤다. 텐트가 허용되지 않아 비가 오면 대형 천막을 뒤집어썼다. 시민들이 기부한 빵과 피자로 배를 채웠다. 시민들이 가져다준 옷으로 추위를 버텼다. 소형 발전기를 돌려 얻은 전기로 간신히 노트북 몇 대를 사용할 수 있다. 주요 언론이 이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시로 인터넷에 광장의 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행진은 끝났지만 아직 시위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시위대는 "우리는 99%다", "매일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북을 두드리며 광장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이들을 지켜보는 시민들이나 관광객들은 물론, 행진에 참여하고 있는 시위대들도 이 장관을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해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들 대다수는 아이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난 여름 영국과 프랑스를 휩쓴 청년들의 시위가 그랬고, 스페인의 '캠핑시위'가 그랬다. '아랍의 봄' 당시 이집트와 리비아의 민중혁명, 시리아의 '모래폭풍'이 그랬다. 2008년 대한민국을 휩쓴 '촛불집회'도 예외는 아니다. 시위대들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등을 이용해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속, 시위 소식을 전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으로 무장한 청년들은 '뉴욕의 가을'로 명명된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를 순식간에 확산시켰다. 워싱턴과 보스턴 등 미국의 주요 도시를 넘어서 전 세계로 들불처럼 번져갈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 됐다.
제1의 물결, 제2의 물결에 이어 서로의 생각과 정보를 손쉽고 빠르게 공유할 수 있는 사회 인프라, 즉 SNS의 물결을 만들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낸 장본인이 바로 스티브 잡스다. 종교인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닌 기업 CEO의 죽음을 향해 동원 가능한 모든 수식어로 애도와 찬사를 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연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고 간 이 모든 가치가 이렇게 거대한 사회적 파고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끊임없이 추구했던 '인간에 대한 열망'을 보면 다소 짐작은 할 수 있을 듯하다. 생전의 잡스는 애플의 신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애플의 정체성이 '인문학'에 있다고 강조했다. 올해 1월 아이패드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잡스는 "인문학(Liberal Arts)과 기술(Techonology)의 교차로에 애플이 서 있다"고 말했다. IT혁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대상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그의 혁신 철학은 그대로 제품에 반영됐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가 외치는 대표적인 구호, "이익보다는 인간이 먼저(People before Profit)"와 맥을 같이한다. 그들은 스스로 "99%"라고 부르며 이득을 독점하고 있는 나머지 '1%'에 분노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6일 잡스를 추모하면서 '자본주의의 두 얼굴'에 대한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지만 열정적으로 애플의 신상품을 소개하던 스티브 잡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용감한 천재들의 존재가 자본주의를 더욱 멋지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런데 월스트리트를 보면 자본주의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탐욕으로 미국 경제 아니 전 세계 경제를 위기상황으로 밀어 넣고도 반성할 줄 모른다."그는 이어 "미국의 88만원 세대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느꼈나 보다"며 "뉴욕에서 일어난 불꽃은 미국 전역으로 아니 세계 주요 도시로 한꺼번에 번져 나갈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제 시장만능주의에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며 "과연 이와 같은 모습의 자본주의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다음 '점령지'는 어디일까?
지난 8일 멜로와 탐슨을 애플스토어 옆 노상에 남겨둔 채 기자가 간 곳은 역시 자유광장이었다. 이날 밤, 한국에 있는 김진숙과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가 전화통화로나마 만나기로 돼 있었다.
김진숙은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70여일 째 35미터 높이에 떠 있는 타워크레인 위를 홀로 '점령'하고 있다. 한 평 남짓 한 그 곳엔 마음껏 걸어 다닐 수 있는 길도 광장도 없다. 함께 어깨 부딪히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를 동지도 없다. 장갑과 양말을 두 개씩 신고도 얼어붙은 손끝과 발끝으로 겨울을 버텼고, 불볕으로 달궈진 쇠붙이 위에서 폭염과 태풍을 견뎠다. 꾸역꾸역 그를 찾아오는 희망버스를 보면 두 손 활짝 치켜들고 환하게 웃지만, 그는 매일 밤 '살아서 걸어 내려오는' 연습을 한다.
대한민국 부산에 있는 김진숙이 전화기에 대고 한 마디를 건넨다. 미국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자유광장에서 전화를 받은 이가 통역을 한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시위대가 이를 반복하며 '인간 확성기' 노릇을 한다. 중간에 있던 시위대가 뒤쪽까지 들릴 수 있도록 한 번 더 반복한다. 25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있던 자유광장, 그리고 뉴욕 맨해튼 밤하늘에는 그렇게 김진숙의 이름이, 그의 메시지가 한없이 메아리쳤다. 김진숙은 말했다.
"노동이 존중받고 돈보다는 인간이 우선인 사회. 그 꿈은 하나입니다."'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는 겨울에 대비하며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도 길에서, 공장 한 켠에서 노숙하며 장기전을 벌였거나 벌이고 있는 이들은 수없이 많다. 1895일, 기륭전자분회가 투쟁을 마무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5년하고도 2개월여가 걸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의 투쟁일은 오는 11일로 1391일째를 맞는다고 한다. 이외에도 KTX 여승무원, 코스콤, 이랜드-뉴코아,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 GM대우 비정규직투쟁 등이 아직도 거리를 '점령'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옥쇄파업에 참여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10일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그동안 17명의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오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OCCUPY SEOUL!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 행사가 열린다. 월스트리트의 시위대가 외친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바로 99%다, 1%에 의한 수탈을 거부하고 99%의 살만한 환경을 만들자"라고 외칠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갔지만, 그를 추모하기 이전에 그가 남기고 간 '인간'의 가치, 그리고 변화에 직면한 우리 주변을 다시 돌아볼 때다. 우리의 다음 '점령지'는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