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남북관계는 최악인데 MB의 악재는 북한이 다 막아준다." 최근 한 기자가 건넨 우스갯소리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기자는 한술 더 뜬다.
"언제나 무슨 일이 터진 상태여서, 북한 관련 뉴스가 터지면 마치 (큰 이슈가) 덮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 아닌가?" 사실 그렇다. 지난 1년여만 되돌아보자.
2010년 11월 23일 오전 11시 <사찰 파문, 여권도 '부글부글'…"기막힌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5시 <한나라당 "계획적 도발행위, 단호히 대응할 것">(연평도 포격 관련) 2011년 12월 19일 오전 11시 <디도스 수사 축소 의혹 관련, 청와대 "사실무근"> 2011년 12월 19일 오후 2시 <이명박 대통령 "국론분열 안 되는 게 가장 중요">(김정일 사망 관련) 위의 2건은 지난해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북한의 연평도 포격 전후 기자가 입력한 기사 목록이다. 또 아래 2건은 지난 19일 오후 12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전후의 기사 목록이다.
정권에 악재가 될 만한 사건이 터져 정권 핵심부와의 연관성 의혹으로 번져가고 이에 대한 진상규명 여론이 최고조에 달할 때, 북한발 빅뉴스가 터져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가장 중요했던 뉴스거리들이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원충연 수첩'으로 '불법사찰 재수사' 요구 절정 때 연평도 포격
지난해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 대한 재수사 요구를 덮었다. 연평도 포격 사건 직전 원충연 당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사무관의 수첩 내용 일부가 공개돼 파장을 일으켰다.
이 수첩에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남경필·원희룡·이혜훈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공성진 당시 한나라당 의원 등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언론사와 노동계 관련 사항도 포함하고 있어 여권 인사들도 사찰 사실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었다.
당시는 이인규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과 수하들이 민간인 김종익씨에 대한 불법 사찰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여서, 검찰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청와대 직원이 마련한 대포폰이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증거인멸에 사용됐다는 '대포폰 게이트'도 이미 터져있어, 무차별 민간인 불법사찰의 '윗선'이 청와대가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그해 12월 초 연평도 포격으로 인한 충격이 다소 줄어들면서 민주당이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민간인 사찰 사건 재점화를 시도했지만, 사안의 폭발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결국 검찰도 재수사를 수용하지 않았고 MB정부에 치명상을 안길 수 있었던 불법사찰 의혹은 유야무야됐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 수사에 '청와대 개입' 의혹 절정 때 김정일 사망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시기도 절묘하다. 지난 10·26 재보궐선거 당시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가해진 디도스 공격에 대한 경찰 수사 결과가 한나라당 국회의원 비서의 '우발적인 단독범행'으로 발표됐고, 이를 납득하지 못하는 여론이 절대 다수였다.
경찰의 축소수사 의혹은 사실 검찰이 밝혔다. 사건 관련자들 사이에 큰돈이 오간 정황이 드러났고, 급기야 경찰 수사 과정에서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이 조현오 경찰청장과 전화로 수사 관련 대화를 한 것으로 나타나 '청와대가 사건 축소를 지시한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 번졌다. 또 수사 결과 발표를 두고 경찰 수뇌부의 난맥상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19일 오전까지도 청와대는 '전화통화는 했지만 수사 개입은 사실 무근'이라고 해명하기에 급급한 상황이었지만, 이날 정오를 기해 김 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청와대는 디도스 사건 관련 답변을 내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비슷한 사례는 더 있다. 지난해 3월 26일 천안함 사건도 여권에 불리한 소식들을 한꺼번에 사장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봉은사 주지였던 명진 스님의 폭로로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안상수 전 대표가 봉은사를 조계종 직영사찰로 전환하도록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천안함에 묻혔다.
정권의 MBC 장악 비결을 "큰 집이 불러다가 조인트도 까도 매도 맞고"한 것으로 말한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도 천안함 사건에 온 나라의 이목이 집중된 틈을 타 출국, 국회 '조인트 청문회'를 피했다.
당장의 악재는 북한발 빅뉴스가 막아도...이렇듯 MB정권은 소위 '북풍'을 타고 메가톤급 위기를 탈출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북한은 절묘한 시기에 대북 강경정책을 펴온 MB정부의 구원투수로 나선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 때마다 정권의 대북정보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보수 정권으로서 안보를 외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과거 정권보다 안보에 무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가령 연평도 포격 이후 정부는 북한 동향 파악과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는 질타를 받았고,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보수정권이 안보에도 취약하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이번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MB정부 일부 인사들은 디도스 사건의 파장이 덮였다고 내심 박수를 칠지 모르나, 김 위원장 사망 이틀이 지나도록 북한의 특이동향을 파악하지 못한 대북 정보력 부재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오죽하면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입에서조차 "국정원은 동네정보원"이라는 비아냥거림이 흘러나올 정도다.
대포폰을 동원한 국가기관의 불법사찰 의혹, 국기기관이 국가기관에 가한 사이버테러 의혹과 수사기관의 은폐 의혹, 그리고 방송도 모자라 종교조차도 장악하려는 음모. '북풍'이 이를 잠시 가렸다고 MB정부가 안도할 일이 아니다. 진실은 묻히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쌓이며 누군가가 뇌관에 불을 붙이는 순간 봇물터지듯 터져나온다. 그 전에 MB정권은 디도스 청와대 개입 의혹부터 스스로 밝혀야 한다. 그게 더 큰 파국을 모면하는 길이다.